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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노믹스'(문재인 경제정책)를 이끄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동연 경제부총리 간의 엇박자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언론들은 두 사람이 제이 노믹스의 대의에는 동조하지만, 가계소득 증가에 초점을 두느냐(장하성) 아니면 기업수익 증가에 보다 중점을 두느냐(김동연) 등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는 듯한 보도도 나오고 있다. 김 부총리가 장 실장과 달리 소득주도성장(가계 중심)에 대해 속도조절론을 제기하고 있다거나, 최저임금이나 노동시간 정책의 수정을 거론하고 있다는 기사도 나온다. 또 고용문제 전망에 관한 시각 차도 거론되고 있다. 고용 상황이 연말쯤 나아질 거라는 장하성 실장의 전망과, 이른 시일 내 회복되기 힘들다는 김동연 부총리의 전망이 대비되고 있다.

내부의 의견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견제장치 없이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조직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장하성·김동연의 의견 차이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아닌 듯하다. 경제팀 내부의 견해 차가 자체적으로 조율되지 않고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갈등은 아니지만, 외부 관찰자들에게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만한 수준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혹은 좀 더 심한 수준의 내부 대립을 잘 활용해서 정책적 목표를 달성한 군주가 있다. 바로 정조 임금이다. 물론 지금 거론되는 '소득수도성장' '혁신경제'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정부 아래 경제 정책에 대한 이견이 있었고,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지금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커 소개하고자 한다.



'중소기업 살리자' vs. '대기업 피해주면 안 된다'


 
조선 후기 장터.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조선 후기 장터.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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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들어 봤을 것이다. 한국사 수업 시간에 나오는 유명한 경제정책, 상업 발달에 크게 기여한 조치로 평가되는 이것은 정조 때인 1791년 나온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음력으로 신해년에 나온 이 개혁 조치는 6대 특허기업, 즉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정부특허 상인)들의 금난전권(노점 단속권)과 전매특권을 폐지함으로써 중소상인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신해통공은 요즘으로 말하면 중소기업을 살리는 조치였다. 이 조치는 관상(官商)으로도 불리는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철폐하고, 사상(私商) 혹은 잠상(潛商)으로 불리는 신흥 상인들의 활동 범위를 넓혀줬다. 김옥근 전 경성대 교수의 <한국 경제사>는 신해통공이 경제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평가한다.
"신해통공이 발표된 이후, 어용 시전제도가 거의 무너지게 되고 종래의 사상(私商) 혹은 잠상(潛商)으로 불린 비(非)관상 계열의 신흥 상인들의 활동범위가 확대되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하여 상업 활동을 하게 되었다."

사통(私通)이란 단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옛날에는 한자 사(私)가 주로 불법을 의미했다. 이런 사(私)자를 영세 상인들한테 붙여 私商이라 불렀으니, 신해통공 이전에 중소 상인들의 처지가 어땠을지 짐직할 수 있다.


이처럼 중소 상인들을 살려 상업과 경제 발달에 기여한 신해통공은 결코 수월하게 나온 혁신안이 아니었다. 지금 언론에 보도되는 장하성·김동연 의견 차이 이상의 격렬한 내부 논쟁을 거쳐 나온 것이었다.


신해통공을 추진한 쪽은 이 시대의 유명한 재상인 좌의정 채제공이다. 지금의 부총리에 해당하는 채제공은 이때 사실상 총리나 마찬가지였다. 삼정승 중에서 영의정과 우의정이 궐석인 상태였다. 삼정승 중에 한 명만 임명된 상태를 독상(獨相) 체제라 부른다. 채제공은 신해통공 1년 전인 1790년 좌의정에 임명된 뒤 3년간 독상으로서 국정을 이끌었다.

중소기업과 서민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독상 채제공은 시전 상인, 즉 대기업의 독과점 행위를 규제해야 신흥 상업세력을 키우고 '거시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조 임금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소득 불평등이 경제위기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음력으로 정조 2년 6월 4일 치(양력 1778년 6월 27일 치)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민산(民産), 즉 백성들의 재산 혹은 살림이 불균등한 것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고 인식했다. 정조의 인식과 궤를 같이해 채제공은 시전 상인들의 도고(都賈), 즉 독과점을 규제하고 중소 상인들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신해통공을 추진하는 명분이었다. 정조 15년 6월 20일 치(1791년 7월 20일 치) <정조실록>에 따르면, 채제공은 어전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아 이익을 독점하려고만 드니, 도고(都賈)라는 명칭도 여기서 비롯된 겁니다. 도고를 없애지 않으면 백성의 삶이 제대로 될 수 없고 백성의 살림도 넉넉해질 수 없고 상인들도 활동할 수 없고 시장도 번성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시장도 번성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전의 독과점을 규제하는 일이 일반 백성이나 중소상인들한테만 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시장'으로 상징되는 상업계 전체에도 이익을 줄 것이라는 게 채제공의 논리였다. 

 
임금과 신하.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율곡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임금과 신하.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율곡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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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은 당시 진보세력인 남인당 출신이었다. 채제공과 달리 보수세력인 노론당 출신의 김문순은 신해통공 반대 논리를 폈다. 1791년 연초에 병조판서와 평시서제조(시장 감독)를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논리는 정조 15년 2월 12일 치(1791년 3월 16일 치) <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시전이 설치된 지 수백 년에 가까워, 뿌리가 단단해지고 국가 부역에 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전이 기득권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정부 살림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시전을 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간의 특권을 갑자기 혁파하면 시전 상인들이 제대로 장사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금난전권 폐지가 '대기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반발한 것이다.

채제공과 김문순, 두 사람의 주장은 일견 조화되기 힘들어 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채제공은 개혁의 주체이고, 김문순은 개혁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람들끼리 논쟁을 벌였으니, 결론은 요원해 보였을 것이다. '정조 노믹스'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위험한 징후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려도 할 말이 없을 만한 일이었다.



논쟁 마주한 정조의 선택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화성행궁에서 찍은 정조의 초상화. 정조의 실물과 닮았다는 보장은 없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화성행궁에서 찍은 정조의 초상화. 정조의 실물과 닮았다는 보장은 없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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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요한 것은, 논쟁과 대립을 처리하는 정조의 태도였다. 정조는 논쟁을 서둘러 봉합하지 않고,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내부 토론이 결론 도출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한국정치학회보> 제35집 제1호에 실린 박현모의 '신해통공의 정치경제학: 18세기 후반의 개혁논쟁과 정조의 경제개혁'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신해통공 조치는 (중략) 개혁의 주체는 물론이고 개혁의 대상까지도 함께 참여하여 찬반 논쟁을 벌인 가운데 채택, 추진되었다.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개혁안의 논의 과정에 참여하여 격론을 벌인다는 것은 그 당시의 정치가 단순한 문제 해결 차원에서 이해된 게 아니라, 당면한 문제의 해결과 함께 그 문제의 해결방식 및 과정에 큰 의미를 두었음을 보여준다."
 
정조가 개혁조치 도출이라는 결과만 중시한 게 아니라 그 논의 과정까지도 중시하다 보니, 격렬한 찬반 논쟁을 끈기 있게 지켜봤다는 것이다. 정조가 그렇게 한 이유를 위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위기 상황에서 정조가 해야 했던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중략) 개혁 부정론을 불식시키는 일이었다. 기득권층의 저항을 막아내고 개혁 지지세력을 규합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납득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세력과 계층의 이해관계가 걸린 신해통공 같은 사안에서, 정조가 충분한 토론 과정을 허용치 않고 어느 한쪽의 의견을 신속히 채택했다면? 정조의 정부는 만백성의 조정으로 비치지 않고 특정 세력이나 특정 계층의 정부로 여겨졌을 수 있다. 그랬다면 정조가 선택한 최종 결론, 즉 신해통공 실행에 대한 저항이 훨씬 더 거세졌을 것이다.

정조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부의 격론을 묵묵히 지켜보며 결론이 자연스레 도출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정조의 정부 안에서 진보와 보수가 논쟁을 벌이고, 서민층 대변세력과 부유층 대변세력이 토론을 벌이는 장면은, 이 정부가 진보·보수 및 서민·부유층 모두를 아우르는 정부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만약 정조가 토론의 과열을 막는다면서 내부 논쟁을 조기에 종식시켰다면, 일부 백성들의 눈엔 정조의 정부는 편향된 정부, 남의 나라 정부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쟁을 허용한 결과, 정조는 혁신적인 경제개혁을 무사히 시행할 수 있었다. 대립하는 양쪽의 논쟁을 통해 도출된 개혁 조치이기 때문에 정당성도 부여받을 수 있었다. 물론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해통공이 오늘날의 국사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가 내부 논쟁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개혁 조치에 생명력을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논쟁이 앞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런 논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경기 활성화나 경제개혁 전망이 불투명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런 논쟁 구도를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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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제이 노믹스, #장하성, #김동연, #신해통공, #소득주도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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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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