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 블록버스터 영화들 사이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 영어 제목으로는 'shoplifters' 일본어 제목으로는 '万引き家族 (만바키 가조쿠)'다. 외국어 제목이 '좀도둑'을 강조했다면 한국어 제목은 '가족'을 강조했다. 201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입소문이 퍼지며 좌석 점유율과 스크린도 늘어나고 있다.

외국어 제목처럼 이 가족은 상점에서 생필품을 훔치며 생활한다. 그렇다고 도둑질이 본업은 아니다. 부부처럼 보이는 남자와 여자는 불안정해 보이지만 일하는 곳은 있다. 가장 연장자인 할머니는 연금을 생활비로 제공하고 손녀처럼 보이는 소녀는 성인업소에 다닌다. 할머니는 돈을 수월하게 번다며 부러워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준다. 성인업소에서 일하는 손녀에게 조언을?

그러고 보니 이 가족이 수상하다. 남자는 아이가 상점에서 물건을 훔칠 때 망을 봐주며 잘했다 칭찬한다. 다른 가족은 자기가 필요한 물건은 왜 안 훔쳤냐고 핀잔을 준다. 아직 어린 남자아이는 학교에 다니질 않는다. "혼자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다니는 곳이 학교"라는 남자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수긍하는 아이. 그에게 아빠라고 부르기는 주저한다. 가난해 보이는 이 가족은 어느 추운 날 밖에서 떨고 있던 여자아이까지 데려오고 훔쳐온 음식을 함께 먹으며 길에서 주워온 여자아이를 무심히 바라본다. 이들은 어떤 가족일까?

있을 법한 이야기 같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 티캐스트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는 목적은 다양하다. 요즘처럼 무섭게 덥다면 시원한 곳을 찾아서 또는 시원한 액션과 판타지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다. 그런 액션과 판타지는 영화에서만 가능하니 영화관에 갈 수밖에. 그러나 나는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그런 판타지보다는 실제 일어났으면 하는 혹은 일어남 직한 판타지를 보고 싶다. 영화이지만 실제 내 눈앞에서 벌어진다면 좋을, 마치 진짜 같은 허구를.

그런 면에서 <어느 가족>은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핍진성'을 담고 있다. 허구의 세계이지만 실제 벌어진 이야기처럼 몰입되는. 감독은 일본에서 알려진 실제 사례를 영화 소재로 녹여냈다. 인간관계에 서툰 사람들을 겨냥한 퇴폐업소, 가족 행세를 하며 보험범죄를 벌이던 조직, 노인이 죽어도 신고하지 않고 연금을 수령 하던 가족. 현대 일본의 어두운 구석을 파고 나온 사례들을 영화의 소재로 녹여 단단한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 마치 지금 일본에서 벌어진 일처럼. 오늘 해외토픽에 소개된 뉴스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전작에서도 가족의 '정의(definition)'와 '의미'를 묻곤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자기 핏줄이 아니었던 아이를 바라보는 감정을 그렸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는 아버지가 남긴 배다른 동생을 대하는 감정을 통해서 가족의 새로운 의미를 보여줬다. 감독은 이번 영화 <어느 가족>에서는 혈연이 아닌 '사연'과 '인연'을 가진 구성원이 모여 가족이 된 이야기를 풀어내며 가족의 '정의'와 '의미'를 다시 써보려 한다.

영화에 잠깐 등장한 '진짜' 가족이 보인 폭력적이거나 위선적인 모습과는 달리 이 새로운 '정의'의 가족은 '유대'와 '보호'로 뭉쳤다. 등장인물, 특히 큰딸로 그려진 '노부요 시바타 (안도 사쿠라 분)'는 이 '유대'라는 말을 곱씹는다. 불안하게. 모임의 구성과 생활 자체가 역설적이지만 범죄의 현장이고 증거였으니.

틀 밖에 있다면 가족이 아닌 걸까?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 티캐스트


그래서 감독은 제도와 관습에 되묻는 건 아닐까. 틀 밖에 있다면 가족이 아닌 거냐고. 영화는 계속 얘기한다. 이 '어느 가족'은 사회와 학교와 가정의 빈 구석을 채워준 가족이었다. 제도와 관습을 대표하는 조사관은 이를 단호히 되받아친다. 그 되물음은 '어떤 가족'에 설득당해 가던 관객과 등장인물의 가슴에 날카롭게 날아든다. "집에서 배울 수 없는" 것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다"라고.

물론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보완재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엄마가 되지 못하는 걸까? 엄마가 되고 싶었던 '시바타'는 조사관의 얘기에 무너졌지만, 표정으로 항변하고 있었다. 영화는 결국, 아이들에게 관습과 제도에서 허용하는 가족을 찾아준다. 틀을 벗어났던 그 '어느 가족' 대신. 아이들은 행복해질까?

이 영화는 메시지를 계몽적으로 담지 않았다. "가족은 이래야 해", "사회적 보호망은 이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노골적인 내러티브를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관객들에게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관객과 씨름하며 "이래도 울지 않을래?", "어때, 감동이지?"라고 묻지 않았던 영화다. 배우들의 연기에도 공감이 간. 멋지게 보이려 하지 않아서 멋있었고 자연스러워 더욱 진짜 같았던. 특히 아이들이. 그래서 칸이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지난주에는 우리 동네 영화관에선 상영을 안 했지만, 이번 주에는 볼 수 있었던. 상영관이 열리고 좌석이 채워진 힘을 느끼게 한 영화다. 놀랄만한 반전이나 요란한 엔딩은 없었지만, 하루가 지나도 여운이 계속되는 그런 영화.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대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오피니언뉴스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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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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