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메인포스터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메인포스터 ⓒ 티캐스트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성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일관성 있는 안정감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영역이 아닌 문화와 관념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One Source Multi-Use'를 실현해내고 있는 인물이라고나 할까. 2000년대 소개되었던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와 <그때는 그에게 안부 전해줘>(2007)의 원작자이자 소설가 이치가와 다쿠지의 소설 세계가 마치 그러했듯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속에도 어떤 유사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현존하는 감독들 가운데 '화해'와 '이해'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현실적으로 풀어낼 줄 아는 감독이 아닐까?

감독의 작품 세계 속에는 현실과 맞물려 있는 실로 다양한 주제들이 혼재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역시 가족이다. 작품에 따라 세부적인 주제와 소재는 그 모습이 조금씩 달랐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무도 모른다>(2004)를 시작으로 <걸어도 걸어도>(2008),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등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여줬다.

심지어 가장 최근 작품인 <세 번째 살인>은 그의 외도라 불릴 정도로 이질적인 분위기의 작품임에도 가족이 담겨 있을 정도. 그가 연출한 거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통념적으로 그 관계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더욱 섬세하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역시 그 연장선 상에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바로 직전의 연출작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아이를 통해 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의 인물들은 이전 세대가 남겨 놓은 이야기들을 통해 성장하는 아이(어른 아이)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2.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스틸 컷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스틸 컷 ⓒ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은 언뜻 많은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는 듯 보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모두 가지런히 잘 표현돼 스토리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등장인물 각각의 스토리가 영화의 어떤 한 부분에 묻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골고루 잘 분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인지 그의 작품 속에는 특정한 주인공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느낌보다는 함께 어우러져 간다는 기분이 더욱 크게 든다.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들이 서로 함께 호흡하며 진행되는 영화의 흐름마저 우리의 실제 인생과 닮아 있는 듯하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가장 뼈대가 되는 것은 같은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이복 자매들의 이야기다. 같은 아버지를 두었지만 첫 번째 아내의 딸로 함께 자라 온 사치(아야세 하루카 역),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 역), 치카(카호 역)와 두 번째 아내의 딸로 앞의 세 자매를 그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나게 된 소녀 스즈(히로세 스즈 역)가 마음을 나누어 가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

물론 이 커다란 틀 속에서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각자가 처한 상황과 현실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가족이라는 표현으로 묶여 있기는 하지만 결코 동일할 수만은 없는 개개인의 마음들.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잘 아울러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이 작품에 녹아있다.

03.

서로 다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세 자매와 스즈에 대한 이야기는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므로 조금 뒤로 미뤄놓아야겠다. 그 전에, 함께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장녀인 사치와 그 동생들인 요시노, 치카의 부모에 대한 원망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것처럼 표현되는 것이 흥미롭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공통적이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떠나버린 엄마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요시노와 치카와는 달리 사치의 원망은 오히려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향해 있기 때문이다.

장녀인 사치의 원망이 어머니를 향해 있는 것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떠나버린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두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난 긴 시간 동안 그녀가 지켜온 것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어머니라는 존재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 시간을 버텨온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의 이러한 성격은 '옷'을 통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언제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아온 그녀였기 때문일까? 자신의 옷 한 벌마저도 쉬이 내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머니와의 화해 이후, 둘째인 요시노에게 옷을 주는 장면이라던가, 막내 스즈에게 기모노를 내어주는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녀에게 화해와 용서의 과정이 얼마나 더 간절했을지 가늠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아파 온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스틸 컷.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스틸 컷. ⓒ 티캐스트


04.

그런 그녀가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유부남 카즈야(츠츠미 신이치 역)와 밀애를 나눈다는 점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이런 모습 역시 그녀가 다른 여자를 만나 자신들을 떠난 아버지보다는 아버지가 떠난 뒤 마지막 기댈 곳이었던, 하지만 그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던 어머니의 부재를 오랫동안 증오해 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이 부분은 그녀가 처음 만난 이복동생 스즈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티끌 한 점 없이 어른스럽기만 한 스즈가 안타까워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 또한 유부남과 사랑을 공유하고 있는 지점에서 어머니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속죄에 대한 심리가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속마음까지 스크린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동생들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어 보인다.

05.

처음 만나는 이복 언니들의 동거 제안을 어린 소녀인 스즈가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애초에 한 남자의 두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스즈가 사회적으로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며, 이후 그녀가 또 다른 엄마(아버지의 세 번째 아내)와 함께 살면서도 홀로 감내해야만 했던 부분들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전까지는 생판 알지도 못했던 그녀들을 따라 나섰다는 점 자체가 이전에 있었던 그녀의 불안정했던 삶을 대변하는 것이다.

물론 이복 자매이기는 하나, 세 언니들에게 마음을 연 것은 스즈가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가(첫째 언니인 사치) 자신의 진짜 마음을 이해해주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들과 함께 사는 삶 역시 스즈에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모든 것이 새로움과 적응의 연속이니까. 같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가족의 모습으로 함께 살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것은 더 많아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는 '잔멸치 덮밥'에 대한 이야기를 애써 숨기려는 스즈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조심스러워 했는지를 잠시 들여다 볼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쉬이 꺼낼 수는 없는 사이라 느끼지 않았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치카를 통해 조심스럽게 아버지와 그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는데, 이 때부터 스즈는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열어간다. 언니들과 함께하는 삶에서 태어나 가장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서로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교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06.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스틸 컷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스틸 컷 ⓒ 티캐스트


모든 이야기가 닫히고 나면, 과거 세 자매의 키가 측정되어 있던 자리에 스즈의 키를 함께 새겨 넣는 장면이 나온다. 이 행위는 영화 속 모든 인물이 비로소 온전한 가족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장면이 이후에 함께 나누게 될 세월 동안 세 자매와 스즈, 이제 네 자매가 조금도 다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즈가 가족이 되기 전 세 자매도 수 없이 다투고 또 다투어 왔으니까. 하지만 첫째 사치와의 다툼 이후 술에 취한 채로 슬그머니 방문을 두드리던 요시노의 모습처럼 네 자매는 서로의 시간을 함께 메워가며 세월을 물들여 갈 것이다. 그녀들이 매 계절마다 담가 놓은 매실주가 시간의 무게 속에 익어가듯이 말이다.

평생의 기억을 담은 가게를 처분하던 바다 고양이 식당 주인,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야만 했던 영화 속 많은 인물들, 평생을 갈망하던 산을 포기하고 그녀의 곁을 지키던 치카의 남자친구. 이 모든 이들의 행위가 현실의 벽 앞에서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에서 이것이 단순한 좌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높은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에 머무를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안정된 행복감과 평온함. 그것들의 또 다른 표현이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진다.

이 영화 속에 인상적인 대사가 하나 있다. "살아있는 건 다 손길이 필요하단다." 술에 취한 스즈가 깨어난 뒤에 네 자매가 함께 마당에 심어져 있는 매실 나무를 보며 하는 말이다. 이 대사 하나에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모든 게 설명되어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있어 '손길'이란 누군가를 향한 관심이며, 그 관심의 지속성이 낳은 '시간의 가치'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의 시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레에다히로카즈 바닷마을다이어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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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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