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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4월 27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회담장인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 부근 '도보다리'까지 산책하며 친교의 시간을 갖고 있다.
▲ 남-북 정상 '도보다리' 친교 산책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4월 27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회담장인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 부근 '도보다리'까지 산책하며 친교의 시간을 갖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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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에서 "베트남식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데 이어, 7월 9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베트남 현지에서 "베트남이 지나온 길을 북한이 따른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거론했다는 베트남 모델에 대해 폼페이오 장관이 '좋은 생각'이라면서 화답하는 셈이다.

이틀 일정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폼페이오는 수도 하노이에 마련된 미국 기업인들과의 모임에서, 한편으로는 북한의 비핵화 이행을 촉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베트남 모델을 북한에 권했다. 베트남 경제성장이 미국 덕분이었다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자신은 북한이 이 모델을 걷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베트남 모델을 앞세워 북한을 비핵화로 유도하려는 미국 지도부의 최근 분위기를 반영하는 사례다.

북한처럼 베트남은 미국과 대규모 전쟁을 치른 나라다. 북한은 사실상 무승부로 끝낸 데 비해, 베트남은 명확한 승리까지 거뒀다. 그래서 북한처럼 이 나라도 미국의 미움과 경제제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을 상대로 열렬한 '구애 공세'를 펼친 결과, 1995년 7월 11일 관계정상화에 성공했다. 레득아인(黎德英) 주석과 빌 클린턴 대통령 때였다. 5년 뒤인 2000년 7월 13일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했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수교보다 FTA가 더 값진 수확이었다.

베트남의 고도성장, 북한과 미국이 바라본 포인트

레득아인 베트남 국가주석.
 레득아인 베트남 국가주석.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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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도이머이, 쇄신)라는 개혁개방을 실시한 이후, 연평균 6.7%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1995년 및 2000년 사건이 한몫을 한 게 사실이다. 폼페이오는 미국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이 경제제재를 풀어준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베트남 경제성장은 미국이 도와줘서가 아니라 '방해하지 않아서' 가능해진 일이다. 

김정은과 폼페이오가 베트남 모델을 언급한 것은 베트남 고도성장에 대한 두 사람의 감탄을 반영하는 것이다. 북한이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굳이 베트남 모델을 거론하는 두 사람의 동기는 다르다. 지구상에는 베트남 말고도 고도성장을 이룩한 나라들이 많다. 그런데도 굳이 베트남 모델을 언급했다. 여기에는 각자의 계산법이 제각기 작동하고 있다.

북한은 예전부터 중국 모델뿐 아니라 베트남 모델에도 관심을 가졌다. 김정은이 최초가 아닌 것이다. 일례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방문한 직후인 2007년 10월 하순, 김영일 북한 내각총리가 베트남을 방문해 개혁개방 현장을 시찰했다.

북한의 경우: 동구권 모델은 피해야지

북한이 그곳에 관심을 갖는 것은 구소련 및 동구권 모델을 피하기 위해서다. 구소련·동구권은 경제개혁을 정치개혁과 동시에 진행했다. 이 때문에 정치 시스템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베트남 모델 즉 도이모이 모델은 다르다. 하노이국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송정남 한국외대 교수의 <베트남 역사 읽기>는 이렇게 설명한다.

"도이모이 정책의 모델은 정치개혁이 없이 먼저 경제개혁을 추진하여 그의 가시적 성과를 바탕으로 정치개혁을 모색하려는 점진주의적 시장도입 전략이다."

김정은은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경제를 바꾸려 한다. 그래서 '정치개혁 없는 경제개혁'인 베트남 모델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사실, 베트남 모델은 중국 모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 역시 공산당 지배를 유지하는 가운데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중국의 성과는 베트남의 성과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런데도 김정은이 굳이 차이나 대신 베트남을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과 북한은 체제 변화를 위한 경제구조적 초기 조건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두 국가의 경제규모의 차이다. 중국은 경제의 규모에 있어서 북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방대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큰 충격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대내 개혁을 안정적으로 추진해올 수 있었다.

중국과는 달리 베트남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경제라는 점에서 북한과 유사하다. 베트남과 북한은 모두 규모의 경제를 가지지 못해,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해외자본의 유입과 국제금융기구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2005년 <통일전략> 제5권 제1호에 실린 국립경찰대 정웅 교수의 '북한의 체제변화 경로에 관한 연구' 중

김정은은 시장경제 시스템을 노동당 지배체제 속에 안착시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외부 충격에 대비할 목적으로, 북한과 경제 사이즈가 유사한 베트남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김정은이 관심을 갖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베트남도 미국과 전쟁을 벌인 나라다. 그런데도 미국의 경제재제를 해제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통일연구원 소속 김성철·김영윤·오승렬·임강택·조한범의 공동 논문 '북한의 경제전환 모형: 사회주의 국가의 경험이 주는 함의'는 베트남 경제성장과 미국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베트남의 경우, 대미관계의 중요성은 중국보다 더 컸으며, 따라서 베트남 당국이 관계 개선에 더욱 열성적이었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는 국제금융기구의 금융지원에 대한 비토권으로 나타났는 바, 이는 1990년대 초반 캄보디아 평화문제 해결과 함께 해제되었다.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권의 베트남 투자는 붐을 이루게 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국제 금융지원을 미국이 더 이상 제지하지 않은 게 베트남 외자 도입의 붐을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에 패전과 수모를 안긴 나라가 미국의 경제제재를 해제시킨 사실에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베트남 모델에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잘 따라오라고, 군말하지 말고

트럼프와 폼페이오도 김정은이 그런 의도로 베트남 모델을 거론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베트남 모델을 권유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베트남은 북한처럼 핵문제로 미국과 대립한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이 베트남 모델에 관심을 갖는 데는 특유의 이유가 있다. 

미국에 대한 북한의 구애 공세도 대단하지만, 베트남의 경우는 훨씬 더했다. 미국과 전쟁까지 벌이긴 했지만, 미국을 무시하고는 국제적 경제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로 통일된 베트남을 탈출한 해상 난민, 이른바 보트 피플이 대거 양산된 것도,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베트남의 전략적 고안물이었다. 어느 정도는 그런 측면이 있었다.

한국국제정치학회가 발행한 <국제정치논총>에 실린 권경희의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 과정에 관한 연구'는 "베트남은 미국과의 협상을 개시하기 위하여 의도적인 난민 유출을 개시하였다"고 말했다. 지금 유럽과 중동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난민의 대거 유출은 국제질서를 흔든다. 그런 식의 상황을 만들어서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고자 보트 피플의 발생을 조장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보트 피플.
 보트 피플.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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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열렬히 미국을 원했던 베트남은 사실상 일방적인 양보 끝에 수교를 얻어냈다. 베트남전쟁 뒤에 베트남은 서쪽 캄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미국은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를 요구했다. 베트남은 들어줬다.

또 베트남 땅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들이 많다. 미국은 유해 송환도 요구했다. 베트남은 이 역시 들어줬다. 권경희의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아래 인용문에서 'MIAs'는 전시 행방불명자 문제 즉 미군 유해 문제를 말한다.

"통일 이후부터 베트남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일방적으로 노력해 왔으며, 미국은 지속적으로 무관심과 강경책을 고수하여 왔다. 결국 미국의 모든 지속적인 요구사항들(캄보디아 문제와 MIAs)이 베트남에 의해 양보될 때 양국은 관계정상화를 이룩한 것이다."

트럼프와 폼페이오는, 미국의 일방적 요구를 다 들어주며 수교를 얻어낸 뒤 경제성장을 이룩한 베트남을 김정은이 본받기를 바라고 있다. '수교 전까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미국의 요구부터 들어주라'는 메시지를 김정은에게 전하고자, 베트남 모델을 베트남 현지에서 언급한 것이다.

사실, 베트남이 일방적 양보를 한 것은, 양보의 대상이 자국의 생존에 결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군 유해 문제에서 일방적 양보를 했다는 말 속에는, '숨기지 말고 더 송환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추가 송환을 해준 것 등이 포함된다.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수하는 것도 베트남의 영향력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긴 했지만, 경제건설이 시급한 베트남 입장에서는 캄보디아 주둔에 사활을 걸 이유가 없었다. 양보할 만한 것이기에 시원하게 양보했던 것이다.

만약 베트남도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일방적 양보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미국의 수확이 별로 없다고도 볼 수 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을 패전시킨 베트남이 자신들의 요구를 군말 없이 수용했다는 사실에 가슴 뭉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트럼프 미국대통령.
 트럼프 미국대통령.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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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국이 베트남 모델을 북한 비핵화와 연계시키는 것은, 북한이 리비아 모델을 따라줬으면 하는 희망사항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일단은 미국의 요구부터 들어줬으면 하는 속내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측면이 있다.

북한이 반발하고 판이 깨질까 두려워 리비아 모델을 입에 담지는 않으면서도, 북한이 리비아처럼 '선 핵폐기, 후 보상' 모델을 따라줬으면 하는 생각을 베트남 모델을 거론하며 표출하는 것이다. 북한이 리비아 모델을 따라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니, 베트남 모델을 거론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한번 더 언급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베트남 모델을 따를지라도 일방적 양보를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 모델에서 북한이 배우고자 하는 것은, 적대국 미국과 손을 잡는 한편 경제개혁 중에도 정치체제를 보존하는 것뿐이다. 핵을 안 가진 베트남이 미국에 일방적 양보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고 있을 것이다.


태그:#베트남 모델, #비핵화, #베트남 경제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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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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