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스>의 한 장면.

영화 <유스>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내가 너무 오래 일했나 봐."

노익장을 과시하며 작품에 대한 의욕을 보이던 노장 감독 믹(하비 케이틀)은 자조 섞인 투로 그렇게 말한다. 그의 오랜 친구이며 세계적 지휘자였던 프레드(마이클 케인)는 반대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다. 영화 <유스>(2015)는 이 두 노인이 스위스의 한 고급 별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밀도 높게 그려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유스>와 더불어 2015년 개봉한 <라스트베가스>, 조금 뒤로 가서 2007년 국내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코미디 영화 <버킷리스트> 등.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바로 환갑 이상의 배우들이 전면에 나선 일명 '실버 영화'라는 것. 나날이 빠르게 바뀌는 유행, 배우들의 세대교체 흐름에서 이런 실버 영화들은 할리우드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 심심찮게 관객들과 만나오곤 했다.

다시금 주목받는 한국 기성 배우들 

그렇다면 한국은? 물론 존재했다. 최불암과 오지명이 주연을 맡은 영화 <까불지마>(2004), 여운계·김수미 등이 한 축을 담당한 <마파도>(2005) 등 노인 코미디물이 2000년대 초반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2010년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이순재, 윤소정, 송재호 등 연륜 있는 배우들의 가슴 절절한 멜로 연기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건드렸다.

이런 작품들을 제외하고 환갑 이상의 배우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아버지거나 할아버지 혹은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주변 캐릭터로 분했다. 물론 흥행을 노린 상업영화 측면에선 가장 보편적 구성이겠지만 연륜의 배우들이 참신한 이야기를 통해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작품이 희귀해진 건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영화 <마파도>의 한 장면.

영화 <마파도>의 한 장면. ⓒ 코리아엔터테인먼트


반가운 일은 최근 개봉한 영화들의 면면이다. 우선 지난 4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변산>은 외형적으로는 힙합음악과 박정민, 김고은 등 젊은 배우들이 보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박정민이 맡은 학수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배우 장항선과 김고은이 맡은 선미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배우 정규수의 비중이 꽤 높다. 극적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하며 인물들이 각성하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캐릭터로 참여하는 것.

가정을 등진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학수는 아버지로 인해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아버지 때문에 다시 고향을 찾는다. 영화는 끊을 수 없는 이 피의 연결고리를 코믹하게 풀어내며 관객에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런 쓰임을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해보면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도가 될 것이다. 돈 가방을 우연히 습득한 남자와 그를 쫓는 연쇄살인범 사이에 늙은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이라는 캐릭터를 설정해 영화 제목과 이어지는 주제 의식을 짙게 깔아놓았다. 벨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마을 보안관을 하고 있는 연륜의 인물. 코엔 형제는 토미 리 존스를 캐스팅 할 당시 "그의 고향이 텍사스이기에 기질적으로 그 보안관 역에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토미 리 존스 역시 "늙었다는 이유로 날 캐스팅해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평균 연령 환갑 이상의 배우들이 대거 전면에 나선 최근 한국영화가 있으니 바로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다. 1993년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재판을 진행한 일본군 성노예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김희애를 제외하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주연배우들이 모두 60세 이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환갑의 배우가 열연을 펼친 사례를 해외에서 찾아보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작품이 <철의 여인>(2011) 정도다. 영국 역사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의 이야기로 메릴 스트립이 해당 인물을 맡아 깊은 감정 연기를 선보였다.

뻔한 흥행공식에 사장되는 작품은 없어야

앞서 언급했듯 젊은 배우가 아닌 연륜의 기성 배우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야기는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 게 사실이다. 올해 1월 개봉한 코미디 영화 <비밥바룰라>는 박인환, 신구, 임현식 등 내공 있는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지만 4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아마도 2000년대 초반 흥행했던 실버 코미디 영화의 부활을 노린 걸로 볼 수 있겠지만, 평단에서도 영화는 그 미덕을 인정받진 못했다.

<변산>과 <허스토리>가 다른 점은 만듦새 면에서 일단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의 호불호가 다소 갈리긴 하지만 평단에서 <허스토리>는 무겁고 아픈 역사를 진정성 있게 풀어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야기를 넘어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좋기에 꼭 봐야 하는 필람 영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변산> 역시 암에 걸린 아버지와 아버지를 원망하는 아들, 래퍼를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다소 우울한 현실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하지만 감독 특유의 재치와 해학으로 영화는 세대 간 화해, 인생의 의미를 유쾌하게 묻는 작품이 됐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 컷.

영화 <허스토리> 스틸 컷. ⓒ (주)수필름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면 지난 6월 27일 개봉한 <허스토리>는 9일 현재까지 2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것. 4일 개봉한 <변산>도 신작임에도 3위로 출발하며 현재 28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다. 물론 <앤트맨과 와스프>라는 거대 경쟁작이 있지만, 작품성과 다양성을 고루 겸비한 두 작품이 밀리는 모양새는 한국영화산업에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이지 않다.

<변산>은 이제 막 개봉했기에 입소문을 타고 뒷심을 발휘할 여지가 크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으로 예매율에서 <앤트맨과 와스프>(78%)에 비해 매우 낮지만 2위(5.6%)로 올라온 상태다. 반면 개봉 2주차를 지나고 있는 <허스토리>는 0.9%를 기록하며 6위에 머물러 있다.

상업영화 시장에서 이런 의미 있는 시도들이 실패한다면 결국 더욱 다양성은 위축될 것이다. 또한 한 분야를 오래 지키며 자신을 증명해 온 좋은 배우들을 볼 기회 역시 점점 줄어들 위험이 있다.

<허스토리>에 출연한 예수정은 과거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어떤 기자 분이 '오랜 세월 연기하면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 있는가'라고 물었는데 네? 하고 되물었다"며 "배우라는 직업은 무명, 유명과 상관없는 직업이다. 유명세를 위해 연기라는 걸 했다면 벌써 그만뒀을 것이다. 난 자랑스러워하며 40년을 연기했다"고 말한 바 있다.

<변산>에 출연한 배우 장항선 역시 최근 인터뷰에서 "재산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 연기를 했다"며 "작은 역할을 하더라도 최소한 싹이 보인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돌아보니) 가끔은 내가 열심히는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치열함이 보이는 말이었다. 장항선은 암 투병을 하는 와중에 이준익 감독의 연락을 받고 병상에서 큰 힘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노장 감독 믹의 그 대사가 우리나라 훌륭한 이 연륜의 배우들의 실제 한탄이 되지 않길 바라본다. 여전히 이들은 보여줄 것이 많고, 관객은 아직도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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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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