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러시아에선 전쟁이 한창이다. 작은 공 하나를 놓고 벌이는 월드컵이 16강 전쟁의 절정에서 치열함의 끝을 보여줬다. 각 국 국가대표팀의 경쟁만큼이나 치열한 게 각 방송사의 중계 시청률 경쟁이다. SBS와 MBC 등 방송국은 경기 중계 마지막에 그날 경기의 특징을 함축하는 선곡으로 경기 보는 맛을 더한다.

정형화되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스포츠 중계에 재치 있는 선곡이 가미되니 마치 예능 프로그램을 보듯 재미와 개성이 느껴진다. 하긴, 스포츠도 '재미'있어서 보는 건데 그것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건 방송국의 기분 좋은 서비스가 아닐 수 없다. 그날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과 함께 어떤 곡들이 중계방송의 마무리를 장식했는지 살펴보자.

[콜롬비아 vs. 잉글랜드] 징크스 깬 잉글랜드에 'Festival'

잉글랜드 MBC 월드컵중계 화면 캡처

▲ 잉글랜드 MBC 월드컵중계 화면 캡처 ⓒ MBC


한국시각으로 4일 새벽 3시에 열린 콜롬비아와 잉글랜드의 8강행 마지막 티켓 쟁탈전. 잠을 포기하고 시청한 축구팬이라면 밤샌 보람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을 명경기였다. 1-1 무승부 끝에 도달한 승부차기. 이 승부차기마저도 뒤집기 승부였다. 잉글랜드 에릭 다이어 선수의 마지막 슛으로 잉글랜드의 역전승 4-3 승리가 확정된 것.  

승리도 승리지만 잉글랜드의 '승부차기 승리'는 특별했다.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승부차기에서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잉글랜드가 오랜 징크스를 시원하게 박살낸 것. MBC는 '축구는 징크스도 깨진다'라는 자막을 띄우며 배경곡으로 엄정화의 '페스티벌'을 선곡해 축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잉글랜드에 보내는 축하곡처럼 들렸다.

"이제는 웃는 거야 Smile again/ 행복한 순간이야 Happy days/ 움츠린 어깨를 펴고 이 세상 속에/ 힘든 일 모두 지워버려" (엄정화, '페스티벌' 중)

SBS는 "축구종가가 2006년 이후에 다시 한 번 8강에 진출했다"며 잉글랜드의 12년만의 8강 진출을 축하했다. "축구 종가의 자존심"이란 글귀와 함께 로비 윌리엄스의 'It's Only Us'를 들려주며 중계를 마무리했다. 이 곡은 축구게임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피파 2000'의 배경곡으로 유명한 노래다. 게임을 실행시키면 타이틀 화면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로, 축구팬이자 동시에 축구게임팬들이 들으면 피가 뜨거워지는 곡이 아닐 수 없다.

[벨기에 vs. 일본] SBS '뒤집어버려', MBC '다행이다'

SBS 월드컵 중계 SBS 월드컵 중계 방송 캡처

▲ SBS 월드컵 중계 SBS 월드컵 중계 방송 캡처 ⓒ SBS


지난 3일 벨기에 vs. 일본 16강전은 3-2로 벨기에가 승리했다. 경기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됐다. 일본이 2-0으로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다가 연속 3골을 벨기에에게 허용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 일본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뼈아픈 패배가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벨기에가 후반에 완전히 뒤집어버린 꼴이었다. 역전골이 추가시간에 나왔으니 이런 역전극도 또 없었다. 

곡명 위에 짧게 설명글을 덧붙이는 SBS는 이런 특징을 포착하여 박재범, 사이먼도미닉, 로꼬, 그레이가 함께 부른 '뒤집어버려'를 선곡한 후 설명글로 '벨기에가 이 점수를?'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승부를 뒤집어버린 벨기에에 딱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라는 내용은 스포츠정신에도 잘 어울렸다.

"뒤집어/ 안 될 거란 생각은 뒤로/ 언제나 네 자신을 믿어/ 끝나기 전에 계속 도전해/ Yeah, we on fire

아직도 넌 눈치만 보고 있어/ 아무도 몰라 발 딛기 직전/ 왜 아직 기적을 기적이라고 믿어/ 매 순간이 기회라고 그 negativity 당장 뒤집어 버려" (박재범 외, '뒤집어버려' 가사 중)

똑같은 경기에 MBC의 선곡은 이적의 '다행이다'였다. 일본이 져서 다행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피식 웃게 하는 선곡은 맞지만 너무 노골적이고 편파적인 중계의 연장선에 있는 선곡인 것 같아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MBC는 선곡 외에도 '빈칸 채워넣기'로 예능적 재미를 부여했다. '축구는 OOO이다'를 제시하고 빈칸에 '한여름 밤의 꿈'을 채워 넣었다. 축구란, 한여름 밤처럼 아름답고 설레는 시간을 선물하지만 동시에 잘 잡히지 않는 환상 같다는 의미를 부여한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것 역시 8강 진출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한 일이 되어버린 일본에게 보내는 문구가 아닐까 싶다. 

[브라질 vs. 멕시코] 2-0 멕시코 패배에 MBC 김광진의 '편지'

MBC 월드컵 중계 MBC 월드컵 중계 화면 캡처

▲ MBC 월드컵 중계 MBC 월드컵 중계 화면 캡처 ⓒ MBC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김광진, '편지' 중)

브라질 대 멕시코의 16강 승부는 2-0 브라질의 승리로 끝났다. MBC는 경기 후 하이라이트 장면과 함께 김광진의 '편지'를 선곡했다. 멕시코 입장에서 선곡한 것으로 보이는 건 가사가 멕시코의 상황과 찰떡처럼 어울렸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하고 담담하게 깔리는 노랫말은 멕시코뿐 아니라 8강 진출에 실패한 모든 선수들의 마음을 대변한 구절처럼 보인다.  

[일본 vs. 세네갈] 2-2로 비기자 윤종신의 '좋니'


SBS 월드컵 중계 SBS 월드컵 중계 방송 캡처

▲ SBS 월드컵 중계 SBS 월드컵 중계 방송 캡처 ⓒ SBS


지난달 25일 H조 경기로 일본과 세네갈이 맞붙었을 때 서로 지지 않는 명승부 끝에 결국 2-2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그리고 SBS는 경기 마지막에 하이라이트 영상과 함께 윤종신의 '좋니'를 내보냈다. 기사의 댓글을 보면 '이건 일본에게 하는 말이다. 일본에게 '비겨서 좋니?라고 묻는 듯' 이라는 글이 눈이 띈다.

[우루과이 vs. 사우디] 가버린 16강 티켓... 선미 '가시나'

SBS 월드컵 중계 SBS 월드컵 중계 방송 캡처

▲ SBS 월드컵 중계 SBS 월드컵 중계 방송 캡처 ⓒ SBS


지난달 21일 A조 우루과이 대 사우디의 경기. 승자는 우루과이였다. A조에서 러시아와 우루과이가 16강 진출을 확정하게 됨으로써 사우디는 쓴맛을 봐야만 했다. 경기 끝에 달린 SBS의 선곡은 선미의 '가시나'였다. 짧은 설명 글귀는 '16강 또는 집으로...'였다. 양팀 모두에게 해당되는 선곡처럼 보이지만 가사는 사우디에게 더 가까워보였다.

"정말 미친 거 아냐 넌/ 왜 예쁜 날 두고 가시나

날 두고 떠나가시나/ 그리 쉽게 떠나가시나/ 같이 가자고/ 약속해놓고/ 가시나 가시나" (선미, '가시나' 중)

선곡한 노래의 어떤 구절부터 트느냐도 눈여겨 볼만한 재미있는 요소다. '정말 미친 거 아냐'부터 삽입한 SBS의 재치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가자고 약속해놓고/ 가시나 가시나'란 부분도 16강에 가지 못하고 홀로 남게 된 사우디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웃픈' 대목이다. 물론 당사자들에게 패배란 '절대 웃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눈물 나는 이 심각한 상황을 위로하는 건 결국 '유머'가 아닐까 싶다.

[크로아티아 vs. 덴마크] 골키퍼 활약에 '너 때문에 산다'

SBS 월드컵 중계 SBS 월드컵 중계 방송 캡처

▲ SBS 월드컵 중계 SBS 월드컵 중계 방송 캡처 ⓒ SBS


지난 2일 중계된 크로아티아 vs. 덴마크 16강전도 명승부였다. 무승부를 이어가다가 결국 승부차기까지 갔고 크로아티아의 골키퍼 다니엘 수바시치가 5골 중에 3골을 막아내면서 20년만의 8강 진출을 이뤄냈다. 캐스터는 "실축도 아니고 제대로 찬 공인데 그걸 어떻게 3개나 막아버립니까!"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SBS는 '수바시치가 다 막았다!'라는 설명글과 함께 왁스의 노래 '너 때문에 산다'를 선곡했다. 수바시치 너 때문에 크로아티아가 살았다, 그런 의미로 보면 되겠다.

"내가 눈물에 잠겨들 때마다/ 나를 다독여준 사람/ 어둡고 캄캄한 내 가슴에 스위칠 켜준 너

내 사랑 너 때문에 산다/ 니가 있어 내가 빛난다/ 너를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사치" (왁스, '너 때문에 산다' 중)

SBS 스포츠는 지난 2009년에 EPL(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중계권을 사고 중계를 했고, 몇 년 전부터 이 중계에서 위트 있는 선곡을 시도해왔다. '중계'라는 객관적인 전달방송의 무거움 위에 힘을 뺀 '병맛코드'의 선곡을 얹음으로써 스포츠를 더욱 흥미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신선한 시도가 이번 월드컵에서도 빛을 발했다.

MBC 월드컵 중계 MBC 월드컵 중계 화면 캡처

▲ MBC 월드컵 중계 MBC 월드컵 중계 화면 캡처 ⓒ MBC



러시아월드컵 SBS MBC 중계 1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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