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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고 내 맘은 흐리고
생각은 많고 정답은 없고
마음이 어렵고 티 내긴 싫고
나 요즘 왜 이럴까

하루가 길고 재미는 없고
할 일은 많은데 내키질 않고
이렇게 살면 무엇이 될까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네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할 거야
자꾸 작아져 사라질 것 같아
나의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한숨도 안 나오네

- 담소네공방 '산책' 노랫말 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뉴욕에 도착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숙소 호스트 수잔 할머니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수잔은 맨해튼에 직장이 있고 아침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늦은 밤 체크인이 불편하기도 했을텐데 공항에서 노숙을 하려고 했던 나에게 흔쾌히 늦게라도 집으로 와서 자라고 배려해줬다. 호텔이었다면 에누리 없이 숙박비를 추가 지불해야 했을텐데 가정집 쉐어룸을 이용한 덕분에 이런 환대도 받을 수 있었다. 첫날부터 신세를 지고 앞으로 보름간 수잔과 함께 살게 됐다.

뉴욕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수잔의 아파트
 뉴욕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수잔의 아파트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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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보름동안 지내게 될 수잔의 쉐어룸 (정리를 좀 했어야 했다.)
 앞으로 보름동안 지내게 될 수잔의 쉐어룸 (정리를 좀 했어야 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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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 입고 짐을 풀고 나니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친다. 비행기에서 떠나보낸 고래들의 빈자리에 이번엔 거지들이 들어 앉아서 소리를 지른다. 꼬르륵. 그런데 허기보다 더 빨리 몰려오는 게 있었으니 피로였다. 배고프다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은데 눈 뜨니 아침이었다.

전날 밤 아스토리아 지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슈퍼마켓을 수잔에게 물어보고 위치까지 확인해 뒀다. 슈퍼마켓에는 값싸고 맛있는 식료품이 가득하겠지! 우유, 시리얼, 빵, 치즈, 생수를 사기 위해 룰라랄라 슈퍼마켓 문을 열었을 때 내 눈앞에 가장 많이 보인 단어는 'Organic'이었다. 유기농 마켓도 아닌데 거의 모든 상품에 'Organic'이라고 적혀 있었다. 심지어 생수도 유기농 표시가 되어 있었다. 부끄럽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직원에서 물었다.

"유기농 아닌 우유랑 GMO 사용한 시리얼을 찾고 있어요. 그러니까 싼 우유랑 싼 시리얼은 없나요?"
"(놀람, 당황, 뭐 이런? 표정으로) 우리 매장의 모든 우유는 신선한 유기농 우유 밖에 없습니다. 시리얼은 좋은 품질의 저렴한 제품이 저쪽 구석에 있습니다."

일주일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이즈의 시리얼을 3.5달러를 주고 품에 안으니 세상이 안긴 것 같았다. 그나저나 미국 사람들이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건지, 환경 문제나 유전자 조작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유기농이 아니면 음식으로 취급을 안 하는 건지, 거대 자본의 거대 음모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미국 사람들이 건강한 음식 많이 먹고 건강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건강하니까 일단 싼 거 주세요.

유기농 우유와 안 유기농 시리얼의 아침 식사
 유기농 우유와 안 유기농 시리얼의 아침 식사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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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섰다. 숙소가 있는 롱아일랜드 아스토리아에서 맨해튼으로 가는 가장 편한 방법은 배(NYC Ferry)를 타는 것이다. 편도 2.75불(지하철과 같다)을 내면 맨해튼 동쪽 선착장 곳곳에 내려준다. 단, 뉴욕 메트로 카드로는 탈 수가 없어서 매번 표를 사야한다. 지하철도 있지만 역까지 거리가 멀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페리를 타는 사람들이 많다.

페리가 이스트 리버를 따라 맨해튼 남쪽으로 미끄러지며 내려갔다. 수잔도 매일 이 페리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대중교통, 누군가에겐 유람선이다. 한여름이라 햇볕은 뜨거운데 바람은 선선했다. 맨해튼의 벼랑 같은 마천루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뭐하지...?'

뉴욕을 오긴 했는데 어디서 뭘 해야하는 건지. 하늘은 맑은데 저 하늘을 머리에 얹고 어디를 가야하는 건지. 강바람인지 바닷바람인지 참 시원하고 좋은데 누구에게 말을 해야하는 건지. 지난 1년 간 호치민에 정착해서 앞만 보고 달리느라 오랜만에 오롯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이 낯설었다.

힘들게 휴가를 내고, 비싼 비행기를 타고, 하늘길만 20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맨해튼의 마천루 앞에서 나는 갑자기 조금 쓸쓸해졌다. 하지만 낯설지 않은 쓸쓸함이었고, 오히려 낯익은 쓸쓸함이었고, 그 쓸쓸함을 만나러 이역만리 뉴욕까지 날아온 것이다.

롱아일랜드 아스토리아에서 맨해튼을 오가는 페리 (NYC Ferry)
 롱아일랜드 아스토리아에서 맨해튼을 오가는 페리 (NYC Ferry)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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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리아에서 맨해튼으로 가는 페리 위의 풍경
 아스토리아에서 맨해튼으로 가는 페리 위의 풍경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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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 출발 전 내가 강의하는 인문학 산책의 마지막 수업은 정신분석학에 관한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의자> 저자 정도언은 우리가 고독을 소중히 감싸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고, 그 쓸쓸함을 즐길 수 있어야 건강할 수 있다고 했다. 살면서 오롯하게 혼자 있는 경험을 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고독이나 쓸쓸함을 느낄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외로움이 훅하고 밀려올 때 사람들은 힘들어하는 것 같다. 혼자 있지 않아도 쓸쓸함은 느낄 수 있고 누군가와 늘 함께 있어도 외로움은 찾아올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혼자 여행하는 것이 건강한 삶을 위한 훌륭한 영양제 같다는 생각도 든다. 슈퍼에서 'Non Organic'을 찾으면서도 스스로 애처로운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걸 보면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페리에서 내리자 쓸쓸함 같은 오글거리는 감상은 사라졌고, 구글맵 속에 펼쳐진 낯익은 지명들이 나를 다시 설레게 했다.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으로 뉴욕을 선택한 데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는 데 그 중 하나는 팟캐스트 방송 '과학하고 앉아있네'에서 진행자 파토님이 했던 말 때문이다.

달 착륙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에 가 본 적 있어요? 없죠? 늘 티비로만 봤잖아요. 미국이란 나라는 사실 없어요'라는 농담을 했는데 왜 그런지 그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특히 요즘은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보다 뉴스와 신문에 더 자주 나오고 있으니 '대체 거기가 어딘데? 나도 한번 가보자.' 싶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UN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들어봤을까. 실제로 UN은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UN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들어봤을까. 실제로 UN은 있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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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선착장 바로 옆에 UN 본부가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UN이란 단어를 몇 번쯤 들었을까. 그 말로만 듣던 UN 본부가 바로 옆에 있었다. 쫄래쫄래 두 블럭을 지나가니 레고를 처음 만지는 아이가 쌓아올린 네모난 기둥 그 밋밋한 모양 그대로 UN 본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저마다의 독특한 외형을 아이덴티티로 삼은 맨해튼의 고층 빌딩 속에서 UN 본부는 특징 없음이 특징이라는 듯이 이스트 강가에 우뚝 서 있었다. 방금 페리를 타고 오면서 분명히 본 건물인데 강 위에서 볼 때는 UN 본부인지도 몰랐다. 한 무리의 일본인 관강객이 그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모습과 UN 건물을 사진 한 장 속에 담아보려 땅바닥에 카메라를 대고 사진을 찍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법했다.

전세계가 모여서 머리를 맞대는 대는 이 정도 건물 하나만 있어도 되는 거였다. 건물 부지를 록펠러 재단에서 제공했다는데 돈을 참 잘 쓰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메디치 가문은 미켈란젤로를 키워서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올렸고, 록펠러 재단은 UN을 통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지. 돈이 많은 사람들이 돈을 좋은 곳에 많이 썼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UN이 이사 가면 어떡하나. 참 속상하겠다.

오늘 나의 첫 번째 목표는 맨해튼이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거였고, 두 번째 목표는 미국 선불 유심칩을 사는 것이라 다음 목적지는 AT&T였다. 가장 가까운 AT&T 대리점 들러서 선불 유심칩을 샀다. 한국에서도 살 수 있다고 했고, 공항에서도 살 수 있었지만 가격 차이가 많이 났고 무엇보다 미국 내 통신 품질에서 1, 2등을 다투는 버라이즌이나 AT&T 유심칩을 구하기는 어려워서 매장을 직접 찾기로 했었다.

4G 데이터 무제한은 60달러, 8GB 데이터는 50달러였는데 무제한 요금제는 핫스팟 이용이 불가능해서 8GB 유심을 샀다. 물론 더 비싼 요금을 내면 데이터 무제한에 핫스팟 이용에 원하는 건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건 없다.

AT&T 매장에 들어갔더니 나 말고 손님이 두 명 더 있었다. 제법 큰 매장인데 손님이 셋 뿐이라 썰렁했는데, 매장 직원은 몹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얼른 다가와서 '무슨 일로 왔냐.', '지금 앞에 손님이 있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 '한 사람 남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원하는 상품이 뭐냐.' 등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3~4분 동안 오며가며 했다.

지나치게 친절하다 싶었다. 그런데 매장에서 나오고 나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휴대폰이 개통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AT&T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서비스 만족도 조사였다. 몇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대기 시간을 묻는 질문도 있었다. 5분 이하, 5~10분 등으로 기다린 시간을 체크해달라고 했다.

그제서야 바쁘게 움직이며 연신 미안하다고 하던 직원이 이해가 됐다. 이런 걸로 체크를 하고 그에 맞춰서 상벌을 받겠지.. 고객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사람마다 시간의 가치는 다른가?'라는 질문을 한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당연하다'라고 했다. 그럴테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지만 모두의 시간이 같은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억울하고 속상한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뉴요커들의 1분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일까? 나로서는 가늠이 잘 안 되는 시간이다. 어딘가 찾아보면 누군가의 1분이 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계산해 놓은 곳이 있겠지만, 찾지 않고 싶다. 결혼 정보 회사의 리스트에 오른 내 삶의 등급은 '판정불가'일 정도로 멋지고 대단할 테니까!

유심칩을 사서 밖으로 나오니 저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날 듯이 걷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걷고 있다. 물론 저들 중에는 뉴요커도 있을테고 나처럼 관광객도 있을테지만 내 눈에는 모두들 바빠 보인다. 바빠야 한다는 내 안의 강박이 저들에게 투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내 마음을 다독이려고 맨해튼 중심을 향해 더욱 더디게 한 걸음씩 내디디며 인파 속으로 섞였다. 그러나 이내 알게 됐다. 맨해튼에서 더딘 걸음은 인도 위를 걷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만 될 뿐이었다. 기어를 낮추고 속력을 바꾸고 싶다면 길에서 잠깐 벗어나야 했다. 지금 나처럼.

뉴욕 맨해튼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뉴요커 또는 관광객 그리고 나
 뉴욕 맨해튼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뉴요커 또는 관광객 그리고 나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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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아홉걸음세계일주, #뉴욕, #맨해튼,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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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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