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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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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의혹의 핵심,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사용한 컴퓨터 하드디스크 '디가우징'(강력한 자성을 통한 파일 영구 삭제)은 대법원의 자의적 판단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됐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대법원 지침'과 '국가정보보안 기본지침'(국가정보원 지침)에 따라 디가우징했다고 밝혔지만,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두 지침 모두 근거로 충분치 않았다. 특히 국가정보보안 기본지침은 삭제 방법을 각급기관에서 정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지침에 따라 처리했다'는 대법원의 해명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퇴임 대법관 PC, 불용품으로 볼 근거 없어

지난 27일 법원행정처는 검찰이 요구한 임의제출에 응하면서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의 PC가 디가우징 됐다고 밝혔다. 행정처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의 경우 지난 2017년 9월 퇴임 후 한 달이 넘게 지나 지난해 10월 31일 디가우징됐고, 박 전 처장의 경우 퇴임 당일인 지난해 6월 1일 디가우징됐다.

행정처 관계자는 "다른 퇴임 대법관의 하드디스크도 같은 방법으로 조치했다"라며 대법원의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지침 제31조에는 "개인용 컴퓨터를 불용처분하여 매각, 양여, 폐기, 해체 등을 할 때에는 다음 사항을 유의하여야 한다"면서 "제16조 제1항 1호 다목(업무용 응용 프로그램), 같은 조 같은 항 3호(워드프로세서용 자료화일)의 화일 및 그외 모든 자료화일을 완전히 소거조치하여야 한다"라고 나와있다. 여기서 '완전히 소거'한다는 지침에 따라 디가우징을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대법관 이상의 경우 퇴직 때 하드디스크를 폐기처분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대법관실로부터 폐기를 요청을 받은 전산담당자는 이를 폐기해야 한다"라며 "관련규정과 통상의 업무처리절차상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퇴임시 폐기원칙에 따라 해당 대법원장실과 대법관실에서 퇴임시에 직접 처리를 지시한다"라고 말했다. 대법관 등이 사용한 PC는 판결 합의 과정 등 민감한 내용이 들어 있을 수 있어 '불용품'으로 분류하고, 하드디스크를 영구 삭제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대법관이 사용한 PC가 불용품(사용할 수 없는 장비)에 해당하는지는 지침에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다. 해당 지침에 불용품은 "사용불능 상태가 되거나 훼손 또는 마모되어 수리하여도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 "내용기간 경과 등으로 수리 사용할 수 없거나 수리하여 사용함이 비경제적인 경우"로 한정돼 있다. 사용자가 변경되거나 사용자가 퇴임했다고 해서 '불용품'이라고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이에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기술적으로 '사용불능'한 장비를 어떻게 한다는 것이지 장비를 사용불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박 의원은 "30조 2호(내용기간 경과 등으로 수리 사용할 수 없거나 수리하여 사용함이 비경제적인 경우)의 '대법관 직무상 특성' 때문에 '내용 등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하는데, 다른 모든 법관 컴퓨터는 뒤에 후임 법관이 사용하는 것에 비추어 타당한 변명이라 할 수 없다"라고 반박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도 이날 논평에서 "대법관 하드디스크 디가우징은 법률과 지침 위반"이라며 "대법원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 어디에도 대법관 이상이 사용하던 하드디스크를 완전히 소거 조치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은 없다"라고 밝혔다. 민변은 이어 "대법관 이상이 사용했다는 이유로 하였다는 지침 상의 '사용할 수 없다고 인정되는 것'으로 볼 근거가 없다"며 "퇴임으로 인한 사용 불능이라는 논리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삭제 조치가 상위법령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라며 "설령 대법원이 내부 지침에 따라 하드디스크를 소거해왔다고 해도 하드디스크 내 저장된 전자문서 등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한 행위는 공공기록물법 위반에 해당한다"라고 비판했다.

국가정보원 지침에도 "각급기관이 삭제 방법 지정"

이 같은 양 전 대법원장 등의 PC 하드디스크 디가우징이 논란이 되는 것은 대법원이 해당 장비를 도입한 시기와도 맞물려 있다. 대법원은 2014년 12월 디가우징 장비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 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을 추진하면서 청와대에 '입법로비'한 문서, 즉 이번에 문제가 된 '재판거래' 등의 문서가 집중적으로 생산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전에도 대법관들이 퇴임했지만 왜 그때 디가우징 장치를 도입했는지 의문이 남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법원행정처는 "디가우징 장비는 국가정보보안 기본지침 제48조(전자정보 저장매채 불용처리)에 따라 전자정보 저장매체에 저장된 자료를 폐기하기 위하여 도입된 것"이라며 "2012년까지는 이레이징(디가우징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영구 삭제 방법)식으로 복구불능상태를 만들어 폐기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행정처가 제시한 국가정보보안 기본지침 제48조(전자정보 저장매체 불용처리)에도 대법관의 PC를 디가우징 대상으로 특정할 근거가 부족하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해당 지침(국정원 지침으로 일반에 공개가 되지 않는다) 제 6조에는 "각급기관의 정보보안담당관은 별표를 준용하여 당해 기관의 실정에 맞게 정보시스템별 저장자료 삭제방법을 사전 지정하여야 한다"라고 나와있다. 즉 저장자료 삭제 방법은 대법원에서 지정하는 것이다.

해당 지침 별표에 따르면 하드디스크의 경우 공개자료는 '완전포맷 1회', 민감자료(개인정보 등)는 ①'완전파괴'(소각, 파쇄, 용해), ②'전용 소자(디가우징 같은 삭제 방법)장비 이용', ③'완전포맷 3회' 가운데 한 가지 방법을 택하게 돼 있고, 비밀자료의 경우는 ①또는 ②의 방법을 택하게 돼 있다.

즉 대법관의 PC를 대법원이 '민감자료'로 분류했다면 '완전포맷 3회'를 삭제 방법으로 선택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비밀자료'로 분류했다면 디가우징 방식 이상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게 맞지만 대법관이 사용한 PC 하드디스크 전체를 '비밀자료'로 분류하는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대법원이 디가우징 장치를 도입한 시기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지침은 지난 2006년 참여정부 시기에 만들어졌고 이후 특별한 개정사항이 없었다. 대법원은 디가우징 장비를 들여오기 이전까지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전산정보관리국에서 2008년 디가우징 장비를 1대 마련해 두고 디가우징이나 이에 준하는 정도의 복구 불능 조치(이레이징)를 했다고 한다.

즉 대법원이 2014년 연말 갑작스럽게 직접 디가우징 장비를 들여와 직접 복구 불능 조치를 하게 된 근거가 미약하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 PC가 디가우징된 시점은 퇴임 직후가 아니라 사법농단 관련 3차 조사를 앞둔 시점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취임 직후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 조사와 관련해 "당장 급하게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고, 그해 11월 3일 실제로 추가조사를 지시했다. 양 전 대법원장 PC는 김 대법원장의 지시가 있기 불가 사흘 전에 디가우징됐다.

이와 관련해 검찰 관계자는 지난 26일 기자들과 만나 "양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이 된 경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라며 대법원의 증거인멸 의혹에 대한 수사 가능성을 시사했다.



태그:#양승태, #사법농단, #대법원, #디가우징,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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