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출판된 장편소설 <울분> 표지.

국내 출판된 장편소설 <울분> 표지. ⓒ 문학동네


지난 5월 22일 85세 나이로 별세한 미국 작가 필립 로스(1933~2018)는 생전 30여 편 소설을 남겼다. 그는 70세가 넘어서도 왕성하게 집필하는 다작 작가였다. 보통 작가들은 30대부터 50대 사이에 주로 대표작을 발표하고 말년으로 갈수록 발표작이 적어진다. 후기작이 이전 작품보다 문학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반면 필립 로스는 후기로 갈수록 더 작품이 정갈해지고 주제가 심오해졌다. 그에겐 언제나 '현재 쓰고 있는 작품이 대표작'이었다.

필립 로스는 상복도 많았다. 전미도서상(1960), 퓰리처상(1998), 펜포크너상(2001), 펜나보코프상(2006) 등을 받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노벨문학상은 끝내 받지 못했다. 지난 십수년간 해마다 미국에선 필립 로스의 수상을 점쳤으나 번번이 수상에 실패했다. 그가 언젠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리라는 독자들의 기대가 이뤄지지 못하고 이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은 지난달 울혈성심부전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 전쟁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미군 병사

 마커스는 학구파 모범생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불안과 강박을 느끼며 행동을 제어하려 한다.

마커스는 학구파 모범생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불안과 강박을 느끼며 행동을 제어하려 한다. ⓒ 콘텐츠판다


필립 로스의 작품들은 특히 할리우드에서 많이 영화화됐다. <안녕 콜럼버스> <휴먼 스테인> <미국의 목가> <울분> 등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필자가 그의 소설 중 가장 재밌게 읽은 것이 바로 2008년에 발표된 <울분>(원제 Indignation)이다. 국내엔 2011년 문학동네에서 출판됐다. 그래서 <울분>이 <인디그네이션>이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3월 국내 개봉했을 때 반가운 마음이 컸다. 사실 소설 자체는 영화화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기에 어떻게 스크린에 옮겨졌을지 궁금했다. <울분>은 주인공의 1인칭 독백이 실린 강렬하고 간결한 문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내려갈 정도로 흡인력이 크다.

보통 관객들은 영화가 소설 원작과 너무 다르면 실망하곤 한다. 소설과 영화는 같은 '이야기 예술'이지만 두 매체는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소설의 사건들을 똑같이 스크린으로 옮기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소설은 묘사와 설명을 동원해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영화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가 꼭 같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원작과 영화는 모두 6.25 전쟁에 참가한 한 미군 병사가 전투 중 사망에 이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이등병으로 징집된 유대계 미국인 마커스 메스너(로건 레먼)로,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첫 아이였다. 메스너는 모범생으로 학업에 대한 열정이 컸고, 대학 졸업 후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겠다는 현실적인 목표 아래 매진했다. 영화는 그런 그가 어쩌다 열아홉의 나이에 안락한 집과 보장된 미래에서 밀려나 태평양 건너편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로 왔는지 추적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메스너와 그의 아버지의 성격 묘사가 상당히 개성 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자, 갑자기 아들이 다치거나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강박에 사로잡히고 만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저항하지만 어느덧 자신도 아버지가 느꼈던 불안에 잠식당한다. 영화도 인물의 이러한 심리 묘사에 공을 들인다. 

운이 나빠서 파멸에 이르렀던 젊은 마커스

 영화 <인디그네이션> 스틸 컷. 마커스와 코드웰 학장은 논쟁을 벌인다.

영화 <인디그네이션> 스틸 컷. 마커스와 코드웰 학장은 논쟁을 벌인다. ⓒ 콘텐츠판다


당시 미국 정부는 대학생을 징집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메스너는 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학에 꼭 적을 둬야 했다. 소설은 대학을 졸업하고 정보장교로 입대하면 후방에 배치되기 때문에 사병으로 입대해 전선에 배치받는 것보다 생존 확률이 크게 증가한다고 설명한다. 6.25가 우리에게 큰 상처를 안겼지만 멀리 미국인에게도 외부의 큰 '공포'와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필립 로스는 뚜렷이 가르쳐준다. 

이렇듯 학교에의 적응은 그에게 생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마커스는 올리비아(사라 가돈)라는 신경쇠약을 앓는 아름다운 여학생을 만나면서 연속된 불운에 빠진다. 당시 사회가 이들을 대하는 보수적이고 꽉막힌 태도는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것이기에 더 부조리하다.

인간의 미래는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이 쌓여 만들어진다. 때로는 작고 사소한 결정이 크나큰 파국을 몰고 온다. 필립 로스는 청춘의 미숙함과 치기가 불러온 작은 실수들이 삶을 불가해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 마커스는 자신의 분노와 격정이 자기파괴를 불러올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마커스는 똑똑하고 재능이 있었지만 너무 약했고, 단지 운이 나빴기에 파멸했다.

결국 노벨상 받지 못하고 타계한 필립 로스

 마커스는 올리비아를 보고 첫눈에 반해 데이트를 신청한다.

마커스는 올리비아를 보고 첫눈에 반해 데이트를 신청한다. ⓒ 콘텐츠판다


<인디그네이션>은 원작 소설보다 사건이 좀 더 선명하고, 인과성이 뚜렷했다. 인물들 간의 갈등과 상호작용도 보다 두드러졌다. 사건들은 축약되거나 생략됐고 주인공의 연애 사건의 비중이 커졌다. 소설을 읽으면 다양한 감정과 사유가 자연스럽게 촉발되지만 영화는 연애 사건으로 단순화됐다. 소설의 주제의식을 영화가 이어받아 구현하려 애썼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문학적인 격이 있는 작품이었지만 다소 아쉬웠다.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필립 로스는 주로 유대인 주인공을 내세워 미국의 유대인 공동체와 그들의 정체성을 그렸다. 유대인 사회의 특수성을 그리지만 그것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운명과 부조리로 점철된 미국인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소설들은 주로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개인의 운명을 다루고 있고 그들에 대한 측은함이 강하게 드러난다. 통찰력 넘치는 아름답고 간결한 문체도 강점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 노벨문학상을 받은 버트런드 러셀을 인용하고 있는데, 마커스는 학장과의 논쟁 중 러셀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책상을 내리친다. 그런 걸 보면 이 괴물 같은 재능을 지닌 작가는 자신이 노벨상을 원한다는 걸 숨기지 않는 솔직함도 지녔던 것 같다. 그가 바라던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타계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필립 로스 인디그네이션 울분 전쟁 징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