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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한 지 한 달하고 보름정도 지났다. 그러니까 나는 평생 채식을 해 온 사람도 아니고, 그것이 생활 습관으로 완벽하게 굳은 사람도 아니다. 아직까지 잘 하고는 있지만 언제 결심이 무너질지 몰라 스스로도 못 미더운 햇병아리 채식인이랄까.

겨우 한 달 반을 하고 변화를 말하기엔 너무 이른 듯싶지만, 영화 <슈퍼 사이즈 미>(2004)에 힘입어 나 역시 개인적 체험을 말해볼까 한다(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30일간 햄버거를 먹으며 나타난 급격한 몸의 변화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내겐 놀랄 만큼 급격한 변화는 없었지만 몇 가지 사소한 징후들은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 체험이라는 것을 밝힌다.

채식 한 달 반, 몇 가지 사소한 징후들

죄책감을 느끼면서까지 고기를 먹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먹지 않기로 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까지 고기를 먹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먹지 않기로 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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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떡, 과자 등의 당류 음식을 전보다 많이 먹게 됐다. 처음 몇 주는 그것을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어느 날 평생 거들떠도 보지 않던 초콜릿 바를 우적우적 먹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알게 됐다.

은연중 고기 씹는 감각을 찾는 걸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아닌 듯하고, 뭔가 보상 심리가 발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걸 의식한 뒤로 조심하고 있긴 하지만, 그 때문인지 체중이 조금 늘었다.

또 한 가지 변화는 평소보다 음식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 메뉴를 생각할 정도니 가끔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확한 예는 아니지만, 생각하지 말아야 할 '분홍 코끼리'로 비유하면 어떨까 싶다. 식단에 없던 제한이 생기니, 묘하게 더 집착하게 되는 그런 심리. 다이어트나 약 때문에 식이 제한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느껴봤을지도 모르겠다.

심리적으로 보다 안정적이거나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냐고 묻는 친구가 있었는데, 안타깝지만 그런 변화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전에 없던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 생겼으니, 바로 모임이나 회식에 대한 불편함이다.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은 채식인에게 살기 편한 나라는 아닌 듯하다.

보다 유의미한 시간이 지나면 채식의 장점 역시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뚜렷한 장점을 찾지 못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채식을 할까? 열 가지 단점을 덮어줄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제 그만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제 그만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번쩍' 하는 한 순간은 없었다. 살면서 쌓인 경험들이 시나브로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닭 잡는 것을 봤을 때도, 광우병으로 연일 뉴스를 통해 생전의 형태 그대로의 소를 마주해야 했을 때도, 2년간 해외 체류를 하며 고깃덩어리에서 뼈를 발라내는 것부터, 썰고 자르는 등 고기 손질을 직접 해야 했을 때도, 죄책감은 차곡차곡 적립되어 갔다.

그러다 죄책감을 느끼면서까지 먹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먹지 않기로 했다. 내가 육식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제껏 너무 많은 고기를 먹은 나로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기도 하거니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무엇보다 감수성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선악이나 우열의 개념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길고양이의 처지에 가슴 아파하며 사재를 털어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어떤 이는 지각을 하는 한이 있어도 무거운 짐을 든 어르신을 도와야 마음이 놓인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단체에 정기적인 후원을 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본다. 나와 세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내가 결정한 것은 너무도 간단하다. 내 입에 넣을 음식을 내가 결정하는 것, 그 뿐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 티끌만큼이라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좋겠지만, 우선은 내 마음이 편하고자 선택한 결정이다.

그런데 그 간단한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말에, 지인들은 의아하게 여긴다. 나의 죄의식이 행여 상대를 불편하게 할까봐 말하기 꺼려졌지만, 꼬치꼬치 물을 땐 어쩔 수 없이 답했고, 여지없이 몇 번인가 편치 않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한 번은 그렇게 죄의식을 느낀다면 해산물과 채소는 어떻게 먹느냐고, 그건 생명이라고 생각지 않느냐며, 참 비합리적인 죄의식이라는 비난 섞인 말도 들어야 했다. 나는 그가 반찬을 뒤적여가며 발라낸 대파와 고추에 어떤 불만도 품지 않았는데 왜 그는 나의 섭식에 합리성을 거들먹거리며 불만을 품는 걸까. 폭력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다수라는 이유로 소수를 억압한 일이 나라고 없진 않았을 것이다. 나의 편견을 깨뜨리고 모두의 다름을 마음 깊이 인정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타고난 그릇이 작아 정 그럴 수 없다면, 말이라도 함부로 하지 않으리라.

내 입에 넣을 음식은 내가 결정한다

채식의 첫 번째 도전은 아니다. 적어도 열 번 이상 시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채식의 첫 번째 도전은 아니다. 적어도 열 번 이상 시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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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채식의 첫 번째 도전은 아니다. 적어도 열 번 이상 시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에야 문득 나의 도전이 단지 섭식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변을 돌아보고, 나를 다시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타인지향적인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도처에 널린 폭력성에 분개하면서도, 그것에 저항 한 번 하지 않는 내가 얼마나 비겁했는지도.

나는 내 의견을 주장할 줄 알고,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고,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여자에게 화장은 예의라는 말을 들으며 예의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분첩을 두드려댔다. 노브라로 출근한 사람을 손가락질 하는 동료들을 보며, 내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그 말들이 내포한 억압과 폭력을 지적하기보다, 그 손가락질이 내게 향하지 않도록 애를 쓰는 비겁한 사람. 그게 나였다.

채식을 여러 번 시도하고 중단할 때마다 회식과 모임 때문에, 사람들의 눈 때문에 도저히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매순간 진심이었으나, 어쩌면 이 역시 속 편한 핑계는 아니었을까 자문해 본다. 사안을 최대한 단순화하기로 했다. 나는 단지, 내 입에 넣을 음식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 당연한 것을, 나는 할 수 있어야만 한다.

40년 가까이 고기를 먹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머지않은 날에 나는 친숙한 고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채식을 중단할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그리할지도. 그러나 어찌됐든, 나는 순전히 나의 의지로 나의 섭식을 결정하고 싶다.

그 누구의 강요나 종용도 아닌, 오직 나의 결정에 의해서. 어쩌면 그것은 순도 백퍼센트의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첫 단추가 될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며, 약해져가던 나의 결기를 다진다.


태그:#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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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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