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길 바라> 스틸컷.

<행복하길 바라> 스틸컷.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에서 중국독립영화를 볼 기회는 많지 않다. 중국독립예술영화는 자국에서도 정식 개봉하기가 어렵고, 카페나 갤러리·학교 강의실 등에서 상영된다. 중국독립영화는 보통 국내 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데, 필자도 드문드문 이런 경로로 중국 저예산 독립영화를 접해왔다.   

오는 7일까지 열리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제장편경쟁 부문에 진출한 <행복하길 바라>(2017)는 베이징 후퉁(胡同)에서 살아가는 모녀 이야기를 다룬다. 그간 보아온 중국독립영화의 수작들은 주로 현대 중국의 모순을 다룬 사회성 짙은 픽션·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이들은 고속성장의 그늘에 가린 하층민의 삶이나 빈부격차 등을 주로 다뤄왔다.

오랜만에 접한 중국독립영화인 <행복하길 바라>는 좀 더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을 다룬다. 부족한 예산으로 짧은 시간 내에 만들다 보니 이들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에 원 신 원 컷(one scene one cut, 한 개의 컷이 한 신을 이루는 경우)이 많았는데, 몇년 사이 컷도 제법 나누고 촬영장비와 로케이션, 소품에도 신경 쓰는 등 만듦새가 깔끔해진 것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 같은 극적이고 풍부한 내러티브는 갖추고 있지 않지만, 중국의 첨예한 현실을 대하는 진실함과 성실한 태도가 돋보인다. 캐릭터가 친근하고 현실적이며 대사도 구체적이고 반짝이는 통찰을 담고 있다.

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밥상'을 배경으로 그린 영화

 <행복하길 바라> 스틸컷.

<행복하길 바라> 스틸컷.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행복하길 바라> 역시 친근한 모녀 사이 안에 사소한 디테일이 풍부하게 살아 있고, 현대 중국이 처한 다양한 현실도 자연스럽게 포착해 낸 것으로 느껴졌다. 감독인 양밍밍은 32세의 젊은 여성으로, 각본과 연출을 겸했을 뿐 아니라 딸 역의 주연배우까지 해냈다. 그는 매 컷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한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 알고, 잘 조율할 수 있는 작은 세계를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모녀는 베이징의 뒷골목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고 낡은 집에 세 들어 산다. 딸 우(양밍밍)는 20대 후반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고, 엄마(리근근)는 시집을 출판하고 싶어하는 시인 지망생이다. 우의 애인인 중년 남자는 영화학교 교수다.

감독은 영화의 배경인 후퉁에서 자랐다고 한다. 우의 애인은 실제로도 <푸지안 블루> <먼지 속의 삶>을 제작하고, <무산의 비구름> <여름 궁전> 등에 출연한 중국독립영화계의 PD인 장시엔민 베이징영화학교 교수다. 그는 자국의 독립영화를 들고 지난 2009년 한국을 찾기도 했다.

엄마는 글로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딸을 '무능하다'며 타박한다. 쓰고 있는 항일에 관한 시나리오가 잘 안되면 '시집을 가거나 취직을 하라'고 말한다. 그가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공감을 줄 수 있는 것은 일정 부분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 속에 녹여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야기는 주로 식사시간 밥상머리에서 전개된다. 모녀의 밥상, 엄마가 돌보며 유산을 노리는 먼 친척 노인의 밥상, 싱글맘인 엄마와 '썸남'이 우연히 만나 함께하는 밥상이다. 완전히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영화는 우유, 양고기 전골, 멜론의 3가지 세션으로 나뉘어 각각의 음식을 매개로 모녀의 다양한 감정을 탐구한다.

극 중에서 이들은 서로 싸우고 상처 입히고 원망을 드러낸다. 내내 앙칼진 말과 격한 감정이 오가는데 영화의 원제인 유정사(柔情史), 즉 부드러운 감정사와는 거리가 멀다. 매 컷마다 두 사람이 등장하고 둘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가 흘러가다 보니 스토리가 다소 단선적인 느낌을 준다. 우와 애인·엄마의 인간관계, 우가 하는 일 등으로 더 확장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하지만 그만큼 사소한 일상 속에서 사소한 디테일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묘사해낸 솜씨도 느낄 수 있다.

자본에서 소외당한 이들이 모여드는 도시, '후퉁' 자체가 주인공

 <행복하길 바라> 스틸컷.

<행복하길 바라> 스틸컷.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는 보통 서사의 힘이 가장 중요하고, 장소와 캐릭터(배우)가 서사를 구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 영화에서도 장소가 큰 중요성을 갖고 힘을 발휘한다. 그녀들이 사는 공간은 앞서 밝혔듯, 협소하고 오래된 후퉁이다. 그간 중국의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해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바로 그 공간이다.

영화는 우가 킥보드를 타고 익숙한 후퉁을 헤매고 다니는 모습을 반복해 보여준다. 우는 애인의 쾌적하고 깔끔한 아파트와 지저분한 후퉁 사이를 오간다. 그녀는 내키면 애인에게 가서 며칠씩 머물다 오지만 딸만 바라보며 살아온 나이든 엄마는 갈 곳도 만날 사람도 마땅치 않다. 후퉁은 그들이 싸울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지만 서로가 의지할 유일한 상대라는 것을 증명하며 둘을 결합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양밍밍 감독은 영화 상영 후 가진 GV에서 "공간을 먼저 정한 뒤 그 공간에서 발생할 만한 이야기를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보통 이야기를 구상하고 그에 맞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후퉁 자체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은 중국의 전통과 공동체의 기억을 간직한 장소지만 자본에서 소외당하고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이다. 중국 정부는 그곳을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지만, 계속적으로 철거하면서 면적을 좁혀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속엔 외국인에게도 익숙한 이미지인 톈안먼 광장과 그곳에 걸린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 빨간색 바탕에 흰 글자로 쓰인 공산주의 선전 구호, 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주석의 뉴스도 등장한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영화가 해외 영화제와 해외 관객을 의식하고, 타깃팅했다는 생각도 든다. 외부인이 현대 중국에서 보고 싶어 하는 익숙한 클리셰를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중국의 젊은 세대, 저항의식을 가진 영화 예술가가 권위주의적인 공산당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도 녹아 있다.        

이 영화는 올해 베를린·홍콩·시애틀 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됐다. 특히 홍콩국제영화제에선 국제비평가협회상과 영시네마경쟁 불새상을 수상했다. 또 20주년을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올해 처음 신설한 국제장편경쟁 부문에 진출한 8편의 장편작 중 하나다. 영화제가 외연을 넓힌 만큼 수준 높은 영화들을 많이 만날 수 있고, 이들 8편 중 작품상·감독상·심사위원 특별상을 시상한다. <행복하길 바라>는 오는 4일(월) 오후 5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한 번의 상영이 더 남아 있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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