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유튜버 양예원씨가 피팅 모델 사진촬영 과정에서 성추행과 강제촬영이 이뤄졌다고 폭로한 뒤, 추가 피해자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경찰이 파악한 피해자는 25일까지 모두 여섯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초 폭로자인 양씨에 따르면, 성추행이 이뤄진 공간은 사진 스튜디오였고, 카메라를 든 사람은 이른바 '프로' 사진가가 아닌 사회생활을 하는 평범한 남성들이었다. 이들은 양씨에게 포르노에 나올 법한 의상과 선정적인 포즈를 주문했고, 혹시라도 이를 거부하면 욕설을 퍼부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들이 왜 이런 사진을 찍으려 했을까? 양씨는 이렇게 적었다.

"이 사진들을 어떤 용도에 쓰려고 하는 거냐 물어보면 하나같이 입을 맞춘 듯 이렇게 말합니다. '소장용' 이라고."

유튜버 양예원씨의 사례는 '미투'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양씨가 스튜디오 사장 A씨와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이 일부 언론에 공개되며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강제촬영과 성추행 의혹을 덮을 수는 없다. 용기를 내준 양씨에게 지지와 연대의 뜻을 표한다. 그런데 난 양씨가 당한 일을 '사진'이란 관점에서 조명해 보고 싶다.

카메라 장비의 진화와 소셜 미디어 덕분에 지금은 누구나 작품 사진을 찍고 공유할 수 있다. 사진을 '업'으로 하지 않아도,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에 몇 년 동안 매달리는 생활 사진가도 제법 많다. 그러나 양씨의 폭로는 아마추어 사진가 일부의 의식 수준을 폭로했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벤 스틸러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2013년작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원제: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가 떠오른다. 난 이 영화를 2013년 첫 개봉 때와 2017년 12월 재개봉 했을 때 이렇게 두 번 봤다. 그러다 양예원씨 폭로 때문에 DVD로 한 번 더 보게 됐는데, 다시 보니 더욱 진한 여운이 남는다.

소심쟁이 월터, 실은 굉장한 능력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마지막 장면은 포토 저널리즘에 바치는 헌정사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마지막 장면은 포토 저널리즘에 바치는 헌정사다. ⓒ 글뫼


이 작품은 먼저 시대 변화에서도 따스한 인간적 감성은 잃어선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 주인공 월터 미티(벤 스틸러)는 <라이프>지에서 16년간 네거티브 필름을 관리하는 일을 해왔다. 잡지에 실린 모든 사진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 갔다고 보아도 좋다. 영화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가 <라이프>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굉장하다. 

<라이프>는 포토저널리즘이란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잡지다. 종군기자의 대명사 로버트 카파가 찍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영국 출신 사진가 래리 버로우즈가 담은 베트남전의 실상 등 보도사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걸작들 대부분은 이 잡지를 통해 발표됐다.

이 잡지에 실린 사진들은 할리우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로버트 카파가 찍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을 보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을 구상했고 래리 버로우즈의 베트남전 사진은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에 영감을 불어 넣었다. 주인공 월터는 이렇게 세계 최고 수준의 사진을 다루며 어떤 사진을 어떤 방식으로 지면에 반영할지 결정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사진과 편집자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적어야겠다. 사진은 사진가가 찍지만 화룡점정은 편집자의 몫이다. 지면을 구성하는 편집자의 예리한 눈매가 사진가의 의도를 살려낸다는 말이다. 사진가 가운데에 편집자를 잘 만나 성공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전설적인 잡지 디자이너인 <하퍼스 바자>의 알렉세이 브로드비치는 사진가들에겐 마이더스의 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서 깊은 잡지도 시대변화의 파고 앞에 휘청거렸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예고되고 월터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실제 <라이프>지는 2007년 공식 폐간을 선언했고, 지금은 웹사이트로 명맥만 이어오고 있다.

더구나 월터에겐 설상가상의 위기가 닥친다. 전속 사진가 숀 오코넬(숀 팬)이 마지막 호 표지사진을 월터에게 건넸는데, 이게 그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사진을 찾기 위해 숀 오코넬을 찾고자 먼 여정을 떠난다.

다소 지루하게 흐르던 영화는 이때부터 활기를 띤다.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기 전 월터는 소심하기 그지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온갖 전표를 받아들며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는가 하면, 직장 동료 셰릴 멜호프(크리스틴 위그)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어떻게 마음을 드러낼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그저 상상만으로 그녀에게 다가갈 뿐이다. 

반면 숀을 찾아 나선 여정은 모험 그 자체다. 그린란드에서 취객과 시비가 붙는가 하면,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상어밥 신세가 될 뻔했다. 아이슬랜드에서는 화산폭발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현지 호텔 주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는 갖가지 모험을 거치면서 소심함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화면 중간 중간 <라이프>지가 그동안 발표해 온 보도사진의 명작들을 연도순으로 감상하는 묘미도 빼놓을 수 없다. 

"좋은 순간을 보면 머물고 싶어져"

우여곡절 끝에 월터는 숀과 상봉한다. 처음 사진에 입문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라면 숀과 월터와 만남, 그리고 숀의 작가정신에 주목해 주었으면 좋겠다.

숀은 히말라야 만년설 어딘가에 틀어박혀 나올 줄 모른다. 그가 이렇게 혹한의 추위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히말라야에만 산다는 눈표범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숀은 이 주제에 너무 몰두했는지 목숨 걸고 자신을 찾아온 월터마저 알아보지 못한다.

 사진가 숀은 그토록 자신이 담고 싶어 했던 눈표범이 나타났음에도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사진가 숀은 그토록 자신이 담고 싶어 했던 눈표범이 나타났음에도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 글뫼


월터와 숀은 정겨운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숀이 그토록 담고 싶어 했던 눈표범이 카메라 안으로 빨려 들어온다. 더욱 놀라운 건 숀이다. 숀은 그저 눈표범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월터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왜 눈표범을 안 찍냐고 따져 묻는다. 아래 인용할 숀의 대답은 사진가가 자신이 천착하는 주제에 어떤 태도를 갖고 접근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안 찍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좋은 순간을 보면 때론 그 순간에 머물고 싶어지거든."   

한국 사진의 현실은 어떤가. 저명 사진작가란 사람이 사진 한 컷을 찍기 위해 수령 220년 된 금강송을 베어내는가 하면, 생태 사진가를 자처하면서 새끼 새를 포획해 어미 새를 유인한 다음 이 장면을 찍고 이 사진으로 버젓이 전시회까지 여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유튜버 양예원씨의 피해사례에 비하면 이건 애교수준이다. 그것은 카메라를 성범죄 도구로 사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카메라를 다루는 기술만 배웠을 뿐 자신이 어떤 주제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천착하는 주제에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익히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무리들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숀이 눈표범을 찍지 않은 의도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월터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문제의 사진을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딱 한 번 보여준다. 이 사진은 디지털의 거센 파고에 밀려 뒤안길로 사라진 아날로그적 감성에 바치는 헌정시다. 또 카메라를 들기 전 이 도구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일깨워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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