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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위한 의미있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계간지 <딴짓>의 발행인인 프로딴짓러가 소소하고 쓸데없는 딴짓의 세계를 보여드립니다. "쫄지 말고 딴짓해!" 밥벌이에 지친 당신을 응원합니다. [편집자말]
서른 살. 통장에 오십만 원이 남았다. 자취방 보증금을 제외한 돈이었다. 이 돈으로 이번 달 월세와 전기세를 내고 밥을 먹어야 하는구나. 가능하려나? 참, 이번 달에 동아리 선배가 결혼한다고 했지. 축의금 5만 원 빼고 45만 원이네. 그러고 보니 핸드폰비랑 보험료도 내야지. 보험은 왜 들어가지고 이 고생일까.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책상에 앉아 계산기를 두드리다 픽 웃음이 났다. 회사에 다닐 때는 상상도 못한 통장 잔고였다. 연봉이 높기로 손에 꼽히는 회사에 다닐 때 50만 원은 피부과 치료비로 혹은 요가 수강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돈이었다.

부양가족이 없는 싱글인 탓일까. 씀씀이가 헤펐다. 별생각 없이 옆자리에 앉은 대리가 추천해주는 비싼 화장품을 같이 샀다. 회사 동기들과 종종 10만 원이 넘는 마사지를 받으러 가기도 했다. 통장에 50만 원이 남으니 새삼 그 돈이 아까웠다. 그때 잘 좀 아낄 걸.

6년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딴짓'을 하는 삶을 선택한 후로 통장잔고는 시계처럼 매일 확인하는 지침이었다. 3년 전, 안정적이기로 소문난 회사를 그만두고 사람들에게 딴짓을 권하는 <딴짓 매거진>을 만들었다. 마음 맞는 두 여자와 함께였다.

밥벌이에만 매몰되지 말고 스스로를 위한 무엇을 하며 살자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러나 출판인과 프리랜서 수입으로 생계를 잇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통장잔고 50만원
 통장잔고 50만원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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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도 한다. 특히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볼 때 그랬다. 회사를 그만둘까 말까 고민했을 때도 나를 가장 괴롭히던 걱정은 이것이었다.

"이러다 정말 거지처럼 사는 거 아닐까?"

자발적 거지가 되어도 비자발적 시간 거지로 사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즈음 사표를 냈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독립서점 사장님이 '자발적 거지 모임'을 열었다.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정말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가난하다는 건 그냥 돈이 없다는 것뿐만은 아니었다. 요즘 가난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 내 삶의 대부분은 회사를 위한 시간이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회사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거나, 회사에서 돌아오거나, 회사 사람들과 회식을 하거나, 회사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수업을 듣거나, 일을 할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멍하니 티비에 앉아있는 시간이었다. 정작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나는 시간 거지였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벌면 다시 시간이 없었고, 시간을 사기 위해 또 돈을 썼다. 시시포스가 된 것만 같았다. 퇴사 후 시간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통장 잔고는 꾸준히 줄었다. 솔직히 이런 궁금증도 일었다. 통장 잔고가 어느 정도까지 바닥을 쳐야 이런 삶을 선택한 것이 후회될까?

시간 거지 VS 돈 거지
 시간 거지 VS 돈 거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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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잔고가 50만 원이 남았을 때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50만 원이면 월세와 공과금을 위해 당장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이래도 돈 거지에, 시간 부자가 된 게 괜찮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결론은 '그렇다'였다. 50만 원을 보고도 마음이 평온했다. 까짓거 하면 되는 거지. 시간이 많잖아.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 정도 마음가짐이라면 이렇게 사는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석 달 정도의 생활비는 언제든 꺼내쓸 수도록 통장에 넣어두고 있다. 그 정도는 있어야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번 돈으로 온전히 나를 책임지며 살자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나는 얼마가 있어야 불안하지 않지? 나는 한 달에 얼마를 써야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내게 불필요한 돈은 무엇이고 꼭 필요한 돈은 무엇일까?

월급이 당연하게 들어오던 시절에는 돈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경제관념이 없다시피 했다. 회사에 나가는 게 학교에 나가는 것처럼 당연했다. 돈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들어왔다가 카드회사에서 자연스럽게 빼내 가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프리랜서로 살게 되면서 나는 '돈'에 대해 보다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다. 몇 줄의 글을 써야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나는 몇 살까지 살게 될 것인지, 그렇다면 대략 어느 정도의 돈을 미래를 위해 저금하는 것이 좋은지, 미래와 현재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지 매일 고민하게 되었다. 그건 보험회사가 말하는 100세 인생 대비처럼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만 살 것처럼 저축을 안 하지도 않는다. 돈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교환 가치였다.

회사를 다니던 때 내 통장에는 월에 단 한 번의 입금과 수없이 많은 출금이 있었다. 이런저런 딴짓으로 생계를 잇는 지금은 여러 번의 입금과 또 여러 번의 출금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안정해 보일지 모르는 이 재무포트폴리오가 내게는 더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거대한 거인의 어깨에 매달리지 않고도 근근히 살아갈 수 있어 행복하다.

가끔 퇴사에 대한 고민을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섣불리 나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고작 50만 원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내가 가진 여러 행운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취방 보증금이 있었고, 부양가족이 없었고, 젊고 건강했다. 특유의 낙천성도 있었다. 그러나 젊음은 사그라들 것이고 건강이 안 좋아질수록 독립적으로 살고 싶은 의지 역시 줄어들지 모른다. 아마 그렇게 되면 그 사이에서 조금씩 또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며 살 것이다.


태그:#회사, #퇴사 , #딴짓, #자발적거지, #딴짓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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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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