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네이션스 리그 한국-중국 경기 모습 (2018.5.17)

2018 네이션스 리그 한국-중국 경기 모습 (2018.5.17) ⓒ 국제배구연맹


과연 이런 경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한국 여자배구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명경기가 탄생했다.

17일 중국 닝보에서 벌어진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VNL, 아래 네이션스 리그)에서 한국은 세계랭킹 1위 중국에 세트 스코어 3-0(25-15, 25-15, 25-13)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김연경과 이재영이 양 팀 통틀어 최다인 16득점을 올렸다. 이어 김희진이 10득점으로 힘을 보탰다. 반면 중국은 기대했던 리잉잉이 5득점에 그치며 부진했다. 오히려 센터인 위안신웨가 12득점으로 중국 내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승리였다. 그것도 중국 홈구장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을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무너뜨렸다.

대한민국배구협회 자료에 따르면, 197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중국 여자배구 성인 국가대표팀이 맞대결한 전적은 87전 14승 73패로 나타났다. 한국이 절대적 열세였다. 승리한 적도 드물 뿐만 아니라, 세트 스코어 3-0으로 완승을 거둔 것도 6번에 불과하다.

특히 한국 여자배구가 중국 홈구장에서 중국 성인 대표팀에게 승리한 것은 이번이 사상 처음이다. 3세트 모두 큰 점수 차이로 압승을 거둔 것도 사실상 처음이다. 한국 여자배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중국에게는 국내 TV 중계진의 표현대로 '닝보의 참사'라고 할 만하다.

사실 경기 직전까지만 해도 1세트라도 따내면 성공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앞선 경기들의 흐름을 감안하면, 승리는 고사하고 선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한국은 15일 벨기에와 대결에서 상대의 빠른 배구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손발도 맞지 않고, 경기력과 수비 조직력도 자주 흔들렸다. 다음 날 도미니카전도 승리는 했지만, 5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가까스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여전히 경기력과 조직력이 완성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중국은 세계 최강의 위용을 뽐냈다. 도미니카와 벨기에를 상대로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았다. 한국에게 완패를 안긴 벨기에마저 압도했다.

'대체 불가능' 존재감... 누가 '김연경 전성기'를 의심하는가

그러나 17일 한국-중국전은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다. 한국은 '다 되는' 날이었고, 중국은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한국의 기세에 당황한 중국은 시종일관 끌려다녔다. 반면 한국은 빈틈이 없는 완벽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주전 선수 전원이 각자 위치에서 최상의 역할을 해냈다. 

특히 세계 최고 완성형 공격수로서 김연경(192cm)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일각의 '기량 하향세'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공격에서 강력한 파워와 예리한 각도, 고비 때마다 어려운 볼 처리 능력까지. 세계 최정상급 기량 그대로였다.

서브 리시브와 디그 등 수비에서도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날 중국은 거의 모든 서브를 김연경에게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김연경의 공격력을 봉쇄하면 쉽게 이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랑핑 중국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의 이 '당연한 전술'은 실패로 끝났다. 김연경의 수비 능력을 의심한 게 패착이었다.

김연경은 서브 리시브를 거의 완벽하게 받아냈다. 중국의 까다로운 서브를 세터가 토스하기 좋게 보내주는 '택배 리시브'를 선보였다. 중국의 강한 공격을 걷어내는 디그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했다. 세터 못지않은 2단 연결 토스로 이재영과 김희진의 공격까지 뒷받침해 주었다.

그렇게 수비에서 살림꾼 역할을 하면서도 공격에서 팀 내 최다 득점을 올렸다. 왜 김연경이 세계 최고 완성형 공격수인지를 다시 한 번 만천하에 증명해 보인 것이다. 공격과 수비에서 최고의 활약을 해주고, 동료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십까지 갖춘 완성형 공격수. 그런 선수가 팀에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준 교본이었다.

물론 역설적인 면도 있다. '김연경 없는 한국 배구'가 얼마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실감케 했다. 전 세계 여자배구 선수 누구도 김연경의 역할과 능력은 대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재영·이효희 '만점 활약'... 김희진·임명옥 부활도 소득

 2018 네이션스 리그 한국-중국 경기... 한국이 세크 스코어 3-0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2018 네이션스 리그 한국-중국 경기... 한국이 세크 스코어 3-0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 국제배구연맹


그러나 천하의 김연경도 팀 스포츠인 배구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세계 최강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다른 주전 선수 모두가 자기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레프트 이재영(178cm)의 맹활약과 이효희(173cm) 세터의 볼 배급은 환상적이었다. 이재영은 자신의 국제대회 '인생 경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효희는 완벽하고 다양한 토스워크를 선보였다. 이날 만큼은 세계 정상급 세터인 중국 딩샤(180cm)보다 경기 운영 능력이 좋았다.

양효진(190cm)과 김수지(188cm)의 센터진도 중요할 때마다 자기 몫을 톡톡히 해냈다. 앞선 2경기에서 부진했던 라이트 김희진(185cm)과 리베로 임명옥(175cm)도 언제 그랬냐는듯 승리에 보탬이 됐다.

교체 멤버로 들어간 박정아(187cm)와 이나연(173cm)도 훌륭한 조커였다. 박정아는 공격과 수비에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했다. 이나연도 재치 있는 토스와 날카로운 서브로 기대감을 높였다.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은 한국 선수 전원이 서브가 너무 잘 들어갔다는 점이다. 목적타 서브도 효율적이었다. 중국 수비진의 리시브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춤을 췄다. 리잉잉의 공격력을 초반에 꺾어 놓은 것도 쉽게 풀어간 요인이다. 감독의 교체 타이밍도 잘 맞아떨어졌다.

이날 중국전은 한국 여자배구가 잘만 풀리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국도 2020년 도쿄 올림픽 메달을 지상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 리우 올림픽 금메달 팀을 완파했다는 건 상당한 청신호이다. 또한 올해 가장 중요한 국제대회인 세계선수권(9.29~10.20, 일본)과 내년 도쿄 올림픽 세계예선전을 앞두고 큰 자신감을 얻었다

잘나가던 리잉잉, 쓰라린 패배... 그래도 '장신 유망주'로 간다

물론 이번 승리로 지나친 환상은 금물이다. 그런 경기력이 계속 나온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중국이 세계 정상급 공격수인 주팅(25세·198cm), 장창닝(24세·193cm), 쩡춘레이(30세·187cm) 등을 휴식 제공과 부상 관리 차원에서 제외시켰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승리는 한국 여자배구에게 많은 소득을 안겨 주었다. 중국은 핵심 주전 일부가 빠지긴 했지만, 센터·세터진 등 다른 포지션은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그대로 출전했다.

특히 위안신웨(23세·201cm)는 세계 최고 센터다운 기량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중앙과 이동 속공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력하고 빨랐다. 라이트 궁샹위(22세·186cm)와 양팡쉬(25세·190cm), 레프트 류샤오퉁(29세·188cm)도 주전급에 해당하는 선수다.

다만, '괴물 신인' 리잉잉(19세·192cm)의 부진이 중국으로선 뼈아픈 대목이다. 지난 시즌 중국 리그를 평정하며 주팅의 뒤를 이을 차세대 주 공격수로 평가받아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미키나, 벨기에전에서는 17득점, 14득점을 올리며 팀 승리의 주역이었다.

랑핑 감독은 지난 15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리잉잉의 성장을 도울 것"이라며 "(주변에서) 너무 많은 압박감을 주지 말고, 그녀가 이번 대회에서 많이 배우고 경험을 쌓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전 패배 직후에도 "리잉잉은 신인이고 성장하는 과정"이라며 "2013년 주팅도 그랬다.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다독였다.

김연경 전성기일 때, '김연경 이후' 준비 서둘러야

비록 한국에게 완패하며 자존심을 구겼지만, 중국 여자배구의 미래가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중국 대표팀은 이미 정해 놓은 로드맵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어린 장신 유망주들을 주요 국제대회에서 주전 멤버로 끊임없이 기용하면서 육성하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월드그랑프리에서도 초반에 주팅·장창닝·쩡춘레이 등을 빼고, 유망주들을 많이 기용했다. 그 결과 1그룹 예선 라운드에서 5승 4패로 7위에 그쳤다. 그러나 주팅 등 주전 멤버가 총출동한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2017.9.5~10)에서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5전 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중국은 올해도 초점을 9월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에 맞춰 대표팀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네이션스 리그 1주차 대회가 자국에서 열리는 데도, 경기 출전 엔트리(14명)에 어린 장신 유망주들을 대거 발탁하고 실제로 주전으로 투입했다. 성적과 상관없이 국제대회 경험을 쌓게 하고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한국 여자배구도 김연경이 전성기일 때 '김연경 이후'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오히려 김연경이 차지하는 존재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장신 유망주 발탁과 육성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김연경의 공백을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다. 김연경도 기회 있을 때마다 대표팀의 유망주 육성을 환영하고 강조해 왔다.

이제 여자배구는 승리의 감격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22~24일부터 수원 실내체육관에서 세계 강호인 독일(22일), 러시아(23일), 이탈리아(24일)와 차례로 맞대결한다. 김연경과 여자배구 대표팀이 올해 국제대회 중 유일하게 국내에서 경기를 펼치는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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