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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십 년 전,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가 동명의 작품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대략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사랑스러운 여인 주인아(손예진 분)와 그녀를 뜨겁게 사랑하는 남자 노덕훈(故 김주혁 분).

인아는 자유연애를 주창하고, 덕훈은 그런 그녀를 속박할 속셈으로 그녀의 연애를 용인하기로 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그러나 웬 걸. 그녀는 덕훈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내가 결혼했다".

극 중 덕훈은 일대일 사랑구도에 익숙한 대다수의 사람을 대변하는 존재일 테다. 그로서는 좀처럼 그녀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니 그녀의 자유연애를 막을 해결책이랍시고 결혼을 제시했을 테다.

당시 그 영화를 본 남성 친구 하나는, 감정 이입이 과하게 되어 화까지 치밀었다고 토로했다. 그에겐 세상 제일 예쁜 손예진이 처음으로 못생겨 보일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심정을 느낀 사람이 그 혼자만은 아니었을 거다.

인아는 폴리아모리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폴리아모리스트는 독점적 사랑만이 옳다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사회적 규범이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폴리아모리, 아직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단어다. 후카미 기쿠에의 <폴리아모리>는,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를 넓힌다.

<폴리아모리> 책표지
 <폴리아모리> 책표지
ⓒ 해피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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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란, 그리스어 접두사 '복수(複数, poly)'와 라틴어 명사 '애(愛, amor)'를 결합한 단어라고 한다. 폴리아모리를 단일하게 규정하긴 힘들며, 정의하기 힘든 것 역시 그 특징이라고 하나, '비독점적 다자간 연애/사랑'으로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다자간의 연애. 얼핏 들으면 무분별한 애정관의 그럴싸한 이름 같을지 모르나, 폴리아모리에는 조건이 있다고 한다.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이들에게 교제 상황을 공개하고, 합의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는 것.

따라서 파트너에게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숨기는 것은 폴리아모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성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스와핑과는 구별되며, 이들이 지향하는 관계는 감정적/정신적으로 소통하는 지속적 관계라고 한다.

그러니 폴리아모리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로, 저자는 '공개', '합의', '책임', '성실', '자유', '협력', '커뮤니케이션', '신뢰', '존경', '감정', '지속적'이 자주 등장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사랑하는 사람 몰래 하는) 바람', '거짓말과 비밀', '속박', '섹스파트너', '일시적인 관계'는 부정적 단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폴리아모리스트가 되는 것일까.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어떤 이는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의지에 따라 사랑하기 위해 폴리아모리를 택했고, 어떤 이는 속박하거나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폴리아모리의 이념에 매력을 느껴 택하기도 한다. 폴리아모리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어렵지만, 폴리아모리 그룹과 폴리아모리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한다.

이들의 사랑은 무분별하지 않다. 폴리아모리라는 관계에 윤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들은 자기 통제를 중요한 과제로 여긴다고 한다. 자기 통제는 폴리아모리라는 공동체를 살아가는 성원들이 자유연애를 실천하기 위해 받아들인 윤리적인 희생, 즉 자유로운 관계에 대한 대가라는 설명이다.

"다수의 사람과 관계를 갖는 폴리아모리스트는 자신이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상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동시에 자각한다. 때문에 그들은 자유로운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내재된 책임에 연연하는 것이다." (p117)


폴리아모리의 윤리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모노가미(일부일처제 혹은 1:1의 성애 관계) 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폴리아모리는 퍽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평생 동안 가족과 사회와 대중매체를 통해 오직 일대일의 사랑만을 접해온 우리로서는 너무 당연한 이질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은 과연 우리와 다르기만 할까. 한 폴리아모리 매뉴얼 북이 제시하는 이들의 이념을 들여다보자.

"① 의사결정은 합의로: 각자가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만남의 조건을 결정하기
 ② 정직하기: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거나 숨기지 말 것. 자신에게도 파트너에게도 정직하기
 ③ 상대를 배려하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항상 배려하기
 ④ 성실할 것: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쌓기. 지킬 수 없다면 약속하지 않기
 ⑤ 개성을 존중하기: 서로 일체감이 생기는 것은 좋지만 한 개인으로서 각자의 욕구를 존중하기" (p107)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랑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저자는 인류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이며, 스스로 폴리아모리스트는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처음 이 연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머리로는 이해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웠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구를 통해, 폴리아모리라는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삶 속에 배치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역자 또한 말한다.

"그렇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가능성의 문제다. 누구나, 생경함을 이겨내면 세계가 넓어진다." (p223)


역자는 우리가 사는 세계 속에서 다음의 세 문장이 끈질기고 강력함을 말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받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한다.'
 '아무리 호소해도 존중받지 못한다.'" (p226)


역자는 비단 폴리아모리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노동자, 인권, 이념, 정치, 공간 등등의 문제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지적한다. 고로 이 책은,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고, 존중할 수 없는 무엇들을 쉽고 편하게 부정하진 말"아야겠다는(p226) 작은 읊조림이며, 노력이라는 것이다.

책은 폴리아모리를 적대적으로 그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우호적이지만도 않다. 단지 누군가 반대하든 말든,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이나 후나, 나 스스로 폴리아모리를 실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삶일 뿐, 나는 다른 사람의 삶과 그들의 사랑을 존중하고 싶다. 타인을 나의 잣대로 재단하는 일은, 타인의 잣대 속에 나를 밀어 넣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니던가.

이 책의 부제는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이다.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다자간 사랑을 알리고 있지만, 넓은 의미의 이웃 사랑과도 연결된다고 보면 나의 무리한 해석일까. 모두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존중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꿔 본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길 원하는 폴리아모리스트의 말을 옮기며 글을 마친다.

"각자 소중한 사람과 함께 살고 있지만, 이웃에 사는 다른 형태의 가족을 받아들이고 돕는 게 가능해진다면 일상은 더 풍요로워질 거야. 또 다른 하나는 가족 안의 타자를 받아들이는 거야. 혈연, 법적 관계의 유무, 동거의 유무, 성적 지향의 차이, 세대 차이와 상관없이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어. 나는 그것이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어." (p204)



폴리아모리 -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

후카미 기쿠에 지음, 곽규환.진효아 옮김, 해피북미디어(2018)


태그:#폴리아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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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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