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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으로 기억한다. 친한 후배와 만나는 자리에서 우연히 그의 지인들 몇몇과 합석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 무척 데면데면했지만, 그렇다고 핑곗거리를 둘러대고 빠져나오기도 조금은 뭣한 자리였다.

고등학교 동창생 모임이었는데,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모두가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인 듯했다. 그들은 두 시간이 다 되도록 돌아가며 자녀의 학교생활 이야기만 했다.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서로의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법 하건만, 약속이라도 한 듯 단 한 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선지 동창생 모임이라기보다 언뜻 자녀를 같은 학교에 보낸 학부모들 같았다. 자녀의 성적과 진로에 대한 이야기에서 보내는 학원과 과목, 수강료에 이르기까지 온갖 '현안'이 다뤄졌다. 대학입시 등 교육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옆집 엄마'로부터 얻게 된다는 풍설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녀 교육법에서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교사 뒷담화'로 수렴되어 갔다. 자녀의 오르지 않는 성적도, 소원한 친구 관계도, 심지어 잘못된 식습관까지도 죄다 교사의 책임인 양 몰아갔다. 금쪽같은 아이들의 미래를 맡기기에는 요즘 교사들의 자질과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선 모두가 맞장구를 쳤다.

대화가 무르익어갈수록 무능에 부패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실력 없는 교사가 명품만 밝힌다거나, 은연중에 촌지를 요구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등 교사에 대한 불만을 앞 다퉈 쏟아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하도 민망해, '철밥통'이라는 조롱쯤은 외려 칭찬처럼 들릴 정도였다.

아이가 볼모로 잡혀있는 한 서슬 퍼런 '김영란법'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촌지를 건네면 순간 당황하는 기색은 보여도 막상 거부하지는 않더라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촌지를 건넨 전후로 등교할 때 자녀의 얼굴이 환해졌다면서 촌지의 위력을 장담하기도 했다.

급기야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학종)도 무능하고 돈 밝히는 교사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튀어나왔다. 자녀의 학교생활기록부 '품질'이 오롯이 담임교사에 달려 있으니, 학종에서 교사는 '갑'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기실 '깜깜이 전형'이라는 학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교사에 대한 불신이 기저에 깔려 있는 듯했다.

얼굴이 화끈거려 차마 더는 듣지 못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나중에 후배로부터 들으니, 내가 교사인지 모르고 무례를 범한 거라면서 대신 사과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하더란다. 그의 전언에 헛웃음만 나왔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서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만 오갔을 것 아닌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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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리에서 교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날 이후 낯선 자리에서는 웬만하면 교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서로 통성명을 하다보면 흔히 직업을 묻곤 하는데, 그럴 때에도 그럭저럭 먹고 산다며 눙칠 때가 많다. 경험상 술자리에서조차 교사가 끼면 서로 말 꺼내기 부담스러워하니, 애초 밝히지 않는 게 피차 편하다.

교사를 향한 국민적 불신은 어느덧 '놀이'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교사는 부도덕하고 무능한 집단으로 낙인찍힌 채 온갖 조롱을 감내해야 하는 직업으로 전락했다. 종종 언론에 등장하는 미담 사례조차 교사와 관련된 것이라면 폄훼되기 일쑤고, 처우를 문제 삼으며 아예 급여를 깎자거나 교직을 비정규직화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촌지나 밝히는 무능한 교사'라는 뿌리 깊은 불신은 교사 스스로 자초한 것일지도 모른다. 헌법이 보장한 대로 정치적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전문성을 살려 교육의 주체로 나서본 경험이 거의 없다. '모난 돌이 정 맞는' 현실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것이다. 상명하달의 권위주의와 관료문화에 젖어 '스승'으로서의 소명의식조차 희미해지며 시나브로 자존감을 잃어갔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정권은 수십 년 동안 교사 집단을 수족처럼 부렸고, 이에 맞서는 교사들에게는 해직이라는 철퇴를 가했다. 아이들에게 정의를 가르쳐야 할 교사들에게 승진과 수당을 미끼로 침묵을 강요했고, 온존한 학벌구조는 아이들과 학교를 줄 세우며 교사 집단을 더욱 파편화시켰다. 기나긴 굴종의 세월을 보내며 많은 교사들이 '물라면 무는' 존재로 자존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학교에는 촌지라는 단어조차 어색해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교사가 훨씬 많다.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기레기' 언론들의 자극적인 기사로 부각된 것일 뿐, 묵묵히 아이들 곁에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대다수라고 감히 단언한다. 교사가 많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 1순위인 건, 그저 안정적인 직업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전국 초중고 교사 수는 얼추 40만 명에 이른다. 그들 중엔 아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인군자 같은 분들도 있을 테지만, 반대로 온갖 반교육적 기행을 일삼는 '양아치' 같은 교사도 없진 않을 것이다. 교사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일부의 행태를 문제 삼아 교사 집단 전체를 싸잡아 매도하고 부화뇌동하는 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다.

어쩌면 그들은 애초 교직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교사로서의 소명의식과 자질을 제대로 평가하고 반영하지 못하는 양성 체계와 임용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태도다. 도덕 시험 점수가 높다고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듯, 임용고시 성적과 교사로서의 자질이 정비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삼삼오오 모여 '교사 뒷담화'를 하는 건 쉽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교사들의 자존감에 생채기만 낼 뿐 우리 교육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교대와 사범대의 커리큘럼에 문제는 없는지 관심을 갖고, 임용고시 등의 채용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보는 기회가 늘어난다면 '촌지나 밝히는 무능한' 교사도 시나브로 사라지리라 확신한다.

듣자니까, 촌지를 건네는 문화가 공립학교에 비해 사립학교에 더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립학교법' 개정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교사의 임면이 사립학교 법인 이사장의 고유 권한이다 보니 공적인 견제가 어렵고 촌지에 온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기 십상이다. 거친 비유이지만, 과거 뭉칫돈이 오가며 교사 자리를 매매했던 사립학교라면 촌지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게 빤하잖나.

스승의날, 폐지냐 존속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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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북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스승의 날(5월 15일)'을 폐지해달라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됐다. 공감이 되었기에 서글펐고, 서글픔은 자책으로 남아 내 가슴도 멍들었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동료교사로서 한달음에 달려가 함께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등이라도 토닥이고 싶었다.

굳이 청원에 호응하는 댓글의 수를 따져볼 필요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면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교사들이 정말 많다. '스승의 은혜'를 기억한다는 법정 기념일 제정 당시의 취지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에도 없는 선물에 대한 부담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하루하루 조롱받으며 사는 교사들을 대놓고 욕보이는 날이라며 발끈하는 이도 봤다.

이미 '스승의 날'을 학교장 재량의 임시휴업일로 운영하는 학교도 여럿이고, 등교일이라 해도 강당에 아이들의 모아놓고 진행하는 울며 겨자 먹기 식의 기념식은 대부분 사라졌다. 모르긴 해도, 아이들 중에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아는 경우도 그다지 많지 않을 거라 본다. 애초 함께 불러볼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캔 커피 하나, 카네이션 한 송이도 교사 개인에게 선물해서는 안 된다'는 야박한 법 규정 앞에 아이들도, 학부모도, 교사도 모두 혼란스럽지만, 오랜 촌지 관행이 사라져가는 과도기라고 믿고 싶다. 이번 청원은 교사를 향한 맹목적인 불신을 거두어 달라는 하소연이며, 정부에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폐지'냐 '존속'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끝으로, 이 글을 빌어 학부모들에게 꼭 건네고픈 말이 있다. 촌지의 효과를 무한 신뢰할수록 그 관행에 맞서 달라. 촌지를 건네지 않았다고 아이에게 불이익을 주는 교사가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렇듯 부패한 교사라면 학부모들과 함께 맞서 싸울 이들이 학교에는 결코 적지 않다. '가재는 게 편'이라며 지레짐작하지 말고 부디 용기를 내달라. 


태그:#스승의 날 폐지 청원, #촌지, #사립학교법 개정, #학생부 종합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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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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