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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나를 절대 믿지 않는다. 기억력은 더욱 그렇다. 엊그제 일은 고사하고 조금 전 일도 깜빡하기 일쑤다. 며칠 전 명함까지 주고받고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말을 하다 할 말을 까먹고 상대방에게 되묻는 일도 적지 않다. 수십 번 되뇌며 올랐던 산 정상 이름은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오래된 일은 기억나는 게 다행이다. 그러니 소소한 일상에서 위대한 역사의 순간까지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거나 심하게 왜곡되기 일쑤이다.

정글에도 나의 발목을 잡는 복병이 있으니, 그건 바로 늪.
 정글에도 나의 발목을 잡는 복병이 있으니, 그건 바로 늪.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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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는 나를 키워주는 자양분이다.
 메모는 나를 키워주는 자양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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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사라질 수 있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그래서 나는 메모를 한다. 책상 위에도, 스마트폰에도, 가방 속에도, 양복 안주머니에도 온통 메모지와 수첩이 가득하다. 메모는 공짜다. 메모에 조금만 품을 들이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난다. 나는 나의 삶을 사랑했고 그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메모는 나의 일상이고 습관이 되었다. 내가 기록한 단어 하나하나는 엄청난 에너지로 되살아났고, 다음 목표를 실행하는 동력이 되었다.

레이스를 기록하는 까닭

15년 넘게 사막과 오지를 달리고 있지만 더 고단한 건 그 여정을 기록에 남기는 작업이다. 레이스는 보통 5박 7일 동안 광야와 협곡, 사막과 밀림, 산 능선과 강줄기를 따라 250km의 거리를 달려야 한다. 더 먼 거리도 다반사다. 물론 제한시간 안에 들어와야 한다.

레이스가 시작되면 얼마 못 가 어깨가 무너져 내리고, 발바닥은 물집이 잡혀 만신창이가 된다. 낮과 밤의 기온 차도 전력을 떨어뜨리는 복병이다. 그러니 누구든 갈 수 있지만 준비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사막이고 오지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늘 기록을 한다. 지금 아니면 그 감정과 느낌을 다시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작장애인 이용술님과 함께한 고비사막 253km 레이스
 시작장애인 이용술님과 함께한 고비사막 253km 레이스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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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장애인 이용술님과 함께한 아타카마사막 250km 레이스
 시작장애인 이용술님과 함께한 아타카마사막 250km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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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장애인 송경태님과 함께한 나미브사막 260km 레이스
 시작장애인 송경태님과 함께한 나미브사막 260km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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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극한의 상황에서 누군가를 온전히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때는 더 가혹하다. 2009년에 나는 시각장애인 송경태씨와 남아프리카 나미브 사막 260km를 함께 달렸다. 시각장애인 이용술씨와는 2005년과 2006년에 고비사막 253km와 아타카마 사막 250km를, 그리고 2013년에 캄보디아 정글을 함께 달렸다.

음습한 밀림에는 사막과 다른 복병들이 도사리고 있다. 캄보디아 북서부 숲에서 시작된 레이스는 5박 6일 동안 쁘레아칸 Preah Khan 사원과 벵메알레아 Beng Mealea 사원 그리고 크메르 왕조의 성지인 꿀렌(Kulen) 산을 넘어 나무뿌리를 피해 진흙탕을 첨벙이며 씨엠립 (Siem Reap)의 앙코르와트까지 220km를 함께 달렸다.

주로를 예측할 수 없는 정글은 모두를 곤혹스럽게 한다. 그곳에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엄격히 적용되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 날짐승들의 목숨을 건 혈투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정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갈색에서 녹색 옷으로 갈아입은 전갈도 봤다.

레이스가 계속될수록 이용술씨의 발바닥 물집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지만 멈추지 않는 그의 투지는 꺾을 수 없었다. 지옥의 레이스를 마치고 캠프에 들어오면, 저녁 식사와 장비 정비를 마치고 나는 매일 밤 수첩을 꺼내 들었다. 모두가 잠든 텐트에서 복기하듯 '오늘 새벽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기억들을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끄집어냈다.

시작장애인 이용술님과 함께한 캄보디아 정글 220km 레이스
 시작장애인 이용술님과 함께한 캄보디아 정글 220km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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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정글에는 녹색 전갈이 있다!
 캄보디아 정글에는 녹색 전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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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의 힘. 청백봉사상 수상!
 메모의 힘. 청백봉사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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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바꾼 나의 삶

내 삶의 변화는 늘 작은 기록에서 시작됐다. 30년 공직생활 동안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과를 메모했다. 그 기록은 위대한 업무실적이 되어 2007년에 정부가 공직자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청백봉사상'이라는 큰 상을 받았다. 동료 선후배와의 차이는... 나는 그저 기록을 했을 뿐이다.

피눈물 나는 이용술씨의 투혼도, 더불어 나의 헌신도 기억해 줄 이는 아무도 없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당시 여정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는 건 그때 끄적거린 한 권의 수첩 덕분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더 유심히 살피고, 과거를 더듬어 남긴 메모 조각들은 칼럼으로 새로 태어나 4년 넘게 문화예술 월간지 <아츠앤컬쳐>에 연재되고 있다.

사막과 오지에서의 체험은 <경수와 함께 떠나는 울트라마라톤 여행기>(2005년),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후회 없는 인생이다>(2013년), <내 인생의 사막을 달리다>(2017년)로 출간됐다.

책이 나온 후 간혹 독자들의 의구심 섞인 말이 들려왔다. 레이스 중에 겪은 에피소드가 혹시 지어낸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고심 끝에 현지에서 기록한 수첩 몇 권을 펼쳐 찍은 사진에 설명을 보태 SNS에 올렸다. 그 후로 이의가 없는 걸 보면 독자들의 의구심은 해소된 듯하다.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나를 글로 남기는 것이다.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정글에서도 일상에서도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정글에서도 일상에서도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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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지옥의 레이스를 마친 후 격정의 포옹.
 캄보디아 지옥의 레이스를 마친 후 격정의 포옹.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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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수히 보고 듣고 체험한다. 그러니 주변의 모든 것이 이야깃거리다. 글은 단 몇 줄만으로 과거의 경험과 진지하게 대면할 수 있다. 물론 한 자, 한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몇 날 며칠 머릿속에 맴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기록은 몸을 들인 작업이라 쉽게 잊히지 않는다. 더불어 기록이 지속되면 삶에 진한 영향을 준다. 비단의 수명은 오백 년, 한지는 천년을 간다지만 기록은 유구한 역사로 남는다.

과거의 역사가 내일을 만들듯 기록된 자료를 보존하고 전달해서 잘 활용하면 이보다 유익할 수 없다. 기록은 나를 더 나답게 만들었다. 기록은 내가 갈 길의 방향을 제시했다. 실제로 기록은 나의 삶을 변화시켰고, 기적을 만들어 냈다. 기록은 내게 힘과 용기까지 덤으로 주었다. 찰나의 순간이든 소소한 경험이든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기록되어야 한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나를 믿지 않지만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이 찰나의 순간 이후 선수들은 모두 CP에 드러누웠다.
 이 찰나의 순간 이후 선수들은 모두 CP에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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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기 볼리비아 우유니사막 한가운데서 맞은 아침 햇살
 건기 볼리비아 우유니사막 한가운데서 맞은 아침 햇살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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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캄보디아, #적자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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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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