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KBO리그에는 어느 해처럼 많은 신인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프로 무대를 밟았다. 그 중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됐다가 SK와이번스에 입단한 군산상고 출신의 좌완 이승호와 '정민철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한화 이글스에 입성한 천안북일고 에이스 조규수는 야구 팬들 사이에서 단연 주목 받는 루키였다.

두 선수는 입단 첫 해부터 팀의 주력 투수로 활약하며 나란히 두 자리 승수를 따냈다. 신인왕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팀 최다승(10승)과 최다 세이브(9개)를 동시에 기록한 이승호의 차지였지만 두 선수가 훗날 KBO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1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두 선수는 이미 현역 생활을 마감해 야구팬들에게는 추억 속 이름이 된 지 오래다.

2000년의 고졸신인들은 1981년생으로 올해를 기준으로 하면 38세의 노장이 됐다. 투수라면 구속이 떨어지고 타자라면 배트 스피드가 느려지는 게 당연한 시기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선수는 38세 시즌에 오히려 생애 최고의 성적을 기록할 기세로 무시무시한 초반을 보내고 있다. 리그에서 가장 타율이 높고 가장 많은 안타를 치고 있는 kt위즈의 유한준이 그 주인공이다.

'FA 대박' 후에도 3할 타율 놓치지 않은 꾸준함의 대명사

 28일 KIA 팻딘을 상대로 결승홈런을 터뜨린 kt 유한준

28일 KIA 팻딘을 상대로 결승홈런을 터뜨린 kt 유한준 ⓒ kt위즈


유신고 시절 3루수와 유격수를 오가던 대형 내야수 유망주였던 유한준은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라운드(전체20순위)로 현대 유니콘스에 지명됐다. 꽤 높은 순번의 지명이었지만 유한준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동국대로 진학했고 대학을 졸업한 후 2004년부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유한준은 프로 입단 후에도 백업 외야수 신세를 면치 못하던 그저 그런 1.5군 선수에 불과했다.

2007 시즌이 끝나고 상무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친 유한준은 2010년 타율 .291, 2011년 타율 .289를 기록하며 넥센 히어로즈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박병호(미네소타 트윈스)가 홈런왕에 등극하고 강정호(피츠버그 파이어리츠)가 특급 유격수로 떠오른 2012년과 2013년, 유한준은 팔꿈치와 무릎 부상으로 고전하면서 넥센의 창단 첫 가을야구 진출에 큰 힘을 보태지 못했다.

현대 유니콘스의 몰락과 히어로즈의 암흑기를 몸소 체험한 유한준은 2014 시즌을 앞두고 장타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근육량을 부쩍 키웠다. 그 결과 2014 시즌 122경기에 출전해 타율 .316 20홈런91타점을 기록하며 프로 데뷔 11년 만에 전성기를 맞았다. 유한준은 생애 처음 출전한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6경기에서 타율 .333 2홈런5타점의 호성적으로 부진했던 박병호(타율 .143 1홈런1타점) 대신 넥센 타선을 이끌었다.

2014년 유한준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했을 때 대부분의 야구팬들은 '우연'이라며 유한준의 기량과 가치를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유한준은 2015년 타율 .362 23홈런116타점으로 자신의 베스트 시즌을 또 한 번 갈아 치웠고 188안타를 때려내며 생애 첫 타이틀(최다안타왕)과 100타점,100득점 클럽에 가입했다. 2015시즌이 끝난 후 kt와 4년 60억 원에 대형 FA 계약을 체결한 유한준은 현대의 해체와 함께 떠난 수원에 8년 만에 컴백했다.

유한준은 kt에서도 2년 연속 3할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 60개 이상의 타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다. 2014년부터 작년까지 리그에서 4년 연속 3할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 60개 이상의 타점을 동시에 기록한 35세 이상의 선수는 김태균(한화)과 최형우(KIA 타이거즈), 그리고 유한준 밖에 없다. 하지만 나이를 잊은 듯한 유한준의 대활약은 창단 후 3년 연속 최하위라는 kt의 부진한 성적에 묻히고 말았다.

38세 시즌에 타격 4개 부문 1위 질주하는 '조용하지 않은 강자'

유한준은 넥센 시절부터 '조용한 강자'로 불렸다. 이는 보이지 않게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는 칭찬의 의미도 있지만 팀을 이끌 정도로 돋보이는 성적을 올리는 선수는 아니라는 뜻도 있다. 실제로 유한준은 넥센 시절 박병호나 강정호(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같은 역대급 강타자들과 함께 하며 크게 빛을 보지 못했고 kt 이적 후에도 간판 타자 자리를 윤석민이나 외국인 타자 멜 로하스 주니어에게 양보(?)했다.

올 시즌 유한준의 입지는 더욱 작아지는 듯했다. kt가 탈꼴찌를 위해 무려 88억 원을 투자해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머신' 황재균을 영입했고 역대급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 받는 '슈퍼루키' 강백호까지 가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재균은 새해가 되면서 한국 나이로 38세가 됐다. 실제로 김진욱 감독은 로하스와 윤석민, 황재균으로 중심 타선을 꾸리고 유한준에게는 6,7번 타순 정도에서의 활약을 기대했다.

하지만 시즌 개막 후 31경기를 치른 현재 kt에서, 아니 KBO리그 전체에서 가장 돋보이는 타자는 바로 38세의 노장 유한준이다. 유한준은 올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타율 .447 46안타 9홈런 29타점 21득점 OPS(출루율+장타율) 1.248, 득점권 타율 .429를 기록하고 있다. 유한준은 공식 시상 기록을 기준으로 무려 4개 부문(타율, 최다안타, 출루율, 장타율)에서 리그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6년 연속 150안타, 5년 연속 .320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박용택(LG트윈스)처럼 나이가 들어도 노련함을 바탕으로 높은 타율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유한준은 올 시즌 홈런 공동4위뿐 아니라 장타율 부문에서도 홈런왕을 다투는 SK의 '쌍포' 제이미 로맥과 최정을 제치고 전체 1위(.757)에 올라 있다. 유한준의 장타율이 kt 이적 후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놀라운 반등이 아닐 수 없다.

1994년의 이종범을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4할 타율에 도전했지만 프로 원년의 백인천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4할에 도달하지 못했다. 유한준 역시 지금의 비현실적인 타율이 시즌 말미까지 이어질 확률은 썩 높지 않다. 하지만 강백호의 성장통이 시작됐고 로하스도 부침을 겪고 있는 시즌 초반 kt 타선을 지탱하고 있는 선수는 다름 아닌 38세의 노장 유한준이다. 그리고 이제 리그 최고의 타자로 활약하는 유한준을 '조용한 강자'라고 낮춰(?) 부르는 것은 큰 실례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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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KT 위즈 유한준 조용한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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