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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벽화는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강렬하면서도 세속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정복한 지역의 문화를 관대하게 포용하고 흡수하는 데 능했던 로마는 규범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능했다. 고대 로마의 벽화에는 인간의 모습과 자연의 모습이 다른 듯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1909년 폼페이의 'Villa of the Mysteries'에서 세 개의 벽면을 둘러싼 붉은 배경의 실사 크기의 인물화가 발견되자 이는 곧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내 폼페이의 아이콘이 됐다.

중앙에 디오니소스가 자리하고 그 주변을 여인들이 둘러싼 채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듯한데 이밖에는 모든 것들이 미스터리할 뿐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림이 위치한 방은 어떠한 용도였는지, 그림 속의 다양한 인물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온갖 추측만이 난무하고 신비로운 요소가 가득하다. 이로 인해 그림이 발견된 빌라의 이름까지 '신비의 저택'으로 불리게 됐다.

폼페이 벽화 Source: Wikimedia Commons
▲ Dionysian Scene, Villa of the Mysteries, AD 79 이전 폼페이 벽화 Source: Wikimedia Commons
ⓒ Villa of the Myst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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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위치한 디오니소스와 여사제로 보이는 인물이 춤을 추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듯한 모습, 벌거벗은 어린 아이가 무언가를 읽고 있는 모습에서 가장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의식과 관련된 그림일 것이라는 추정이다.

한편으로는 그림이 그려진 방이 보통 의식을 치르는 장소처럼 성스럽고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라 마치 음식을 먹고 즐기는 곳처럼 개방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디오니소스와 그의 아내 아리아드네가 결혼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듯도 하다. 이에 따라 가장 왼쪽에 위치한 베일을 쓴 여자 또는 오른쪽에 빗질을 하며 단정하게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을 신부로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어찌됐든 폼페이의 벽화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신비로운 요소들로 가득하며 붉은 색의 바탕과 다양한 포즈의 인물들, 각자의 역할과 관심에 충실한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화려하고 흥미롭다. 그 와중에 쟁반을 들고 있는 여인이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은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하고 다양한 군상의 모습에 압도되고 흥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심지어 알 수 없는 비밀로 가득한, 영원히 알 수 없음에 분명한, 추측으로만 가능할 뿐인 비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공간의 한 가운데 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잠시 그 흥분에 휩싸인 채 감탄하는 것일 뿐이리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비밀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일 것인데 그 방을 나오는 순간 비로소 잠에서 깬 듯한 가벼운 각성과 함께 여전히 머리를 맴돌고 있는 잔상과 여운에 마음을 뺏길 것이 분명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미스터리가 불러일으키는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개운치만은 않은 느낌은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 앞에서 일종의 치유라고도 할 수 있는 정화된 느낌을 받는 것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내 리비아가 로마 외곽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 다이닝룸에 의뢰해 그린 벽화는 별장의 용도와 더불어 의뢰인이 추구하고자 한 것이 무언인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웅장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형태와 특징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개별적으로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이는 분명 숲 속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수종을 직접 골라 심고 가꾼 정원의 모습이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자신 또한 자연의 한 부분이면서 마치 감상자이기라도 한 듯이 여유롭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리비아 벽화 Source: Wikimedia Commons
▲ Painted Garden, Villa of Livia, BC 30-20 리비아 벽화 Source: Wikimedia Commons
ⓒ National Roma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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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자연의 모습은 다소 인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그 분위기가 결코 가볍거나 초라하지 않다. 특히 배경을 온통 완벽한 초록으로 처리함으로써 전면에 위치한 나무와 꽃과 새는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보는 이들을 자연 속으로 깊이 인도하는 듯한 안내자처럼 여겨진다.

그림을 보며 자연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은 폼페이 벽화가 주는 '흥분을 일으키는 신비로움'이 아니라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신비로움'에 가깝다. 그림 저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무장해제돼 더 들어가고 싶게끔 만드는 강한 흡인력을 갖추고 있다. 이는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하는 마음에 더 다가가 이내 그림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듯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모습이든 자연의 모습이든 로마인들은 그림을 통해 일종의 신비로움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나 환경에서 벗어나 흥분이나 차분함을 느끼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진다.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무언가를 느끼도록 하고 더 나아가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듯한 로마인들의 그림에서 퇴폐적 향락이나 현실의 고단함을 짐작하는 것은 감상일 뿐이다. 오히려 그들의 진솔한 속내를 발견하는 일은 자유롭고 신선하기까지 하다.

인간의 욕구를 그림을 통해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한 로마인들의 벽화를 통해 비로소 그림은 욕망의 표현이자 알 수 없는 신비로 이끄는 힘을 가진 강력한 세속적 수단이 됐다.


태그:#폼페이, #리비아, #벽화,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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