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 포스터 이미지

▲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 포스터 이미지 ⓒ Reconsider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해묵은 분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이 불씨가 됐다. 예루살렘은 두 나라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자국 영토이자 종교의 성지로서 중시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런 곳에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두겠다는 것은 해당 문제에서 앞으로 미국이 이스라엘 입장을 지지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가뜩이나 수세에 놓인 팔레스타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다.

2016년 제작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Disturbing the Peace, 스티브 앱콘, 앤드루 영 감독)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오래된 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미국 출신 제작진이 합작한 결과물이다.

이 분쟁의 기원부터 지금까지 양측이 서로를 불구대천 원수로 인식하게 된 과정, 그로 인해 끝날 기미 없이 지속되고 있는 폭력의 악순환 양상 등을 단출하지만 효과적인 구성으로 엮어냈다. 영화는 그 속에서 비록 소수이지만 비폭력 저항을 수단으로 삼아, 두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중심 줄거리로 내세웠다.

이들은 스스로 '평화의 전사들(Combatants for Peace)'이라고 부른다. 2005년 처음 만난 후 의기투합하게 됐으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각각에 국적을 두고 있는 남성과 여성들로 구성됐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사람들의 전력이다. 이스라엘 회원들은 주로 팔레스타인 분쟁 관련 병역을 거부하는 예비역 군인들로 구성됐으며, 팔레스타인 회원들 역시 인티파다(봉기)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한때 무력으로 서로 죽이고 다치게 하는 일에 직접 관여했던 당사자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2005년 2차 인티파다가 진행되던 시기, 이들이 처음 만나던 순간을 묘사한 대목은 긴장감이 넘친다. 재연 장면 위로 '보이스 오버'되는 당시 회합 구성원들의 인터뷰 내용이 그만큼 생생하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경험이 이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역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우리를 체포하거나 죽일 수 있었습니다"라거나 "화가 많이 났어요.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했죠"와 같은 이스라엘 쪽 참가자들 발언, "덫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어요. 납치되거나 살해될 수도 있으니까요", "죽이고 싶었어요. 이들이 누구죠? 가족과 친척을 죽인 자들이죠" 등의 팔레스타인 쪽 참가자들 발언이 교차된다.

만나기 전의 불안과 처음 만났을 때의 당혹이 물씬 묻어나는 이 장면의 분위기는, 박찬욱 감독이 연출했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과 북의 젊은 병사들이 처음 모임을 갖던 순간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해당 장면을 보지 않고도 그 순간 오고 갔을 인물들의 복잡한 심경을 비교적 쉽게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 영화 본편 캡처 이미지

▲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 영화 본편 캡처 이미지 ⓒ Reconsider


영화는 이후 자신들이 행한 폭력을 고백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신뢰를 쌓게 된 이들의 행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하이라이트는 2013년, 이들이 장벽을 사이에 두고 벌인 시위 장면이다. 그 장벽은 점령지를 이스라엘 정착촌과 피점령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로 나누고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서쪽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은 동쪽에서 각각 장벽을 향해 행진을 시작하고, 종국에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게 되는데, 처음 맞는 상황 앞에서 우왕좌왕하던 이스라엘 군인들 모습과 대조적으로 의연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 연대감을 고무하던 시위 참가자들의 모습이 뭉클한 감동을 전해준다.

하지만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는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를 잊지 않는다. 영화는 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해서 병역 거부를 선언했던 예비역 군인들에게 쏟아졌던 배신자라는 비난과 공격이, 2014년 7월 가자 지구에서 시작되어 한 달 넘게 지속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과 이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항전 국면에서 다시 이어지고, 그 거부감이 더욱 첨예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집과 땅을 빼앗기고 점령군 치하에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 입장에서 볼 때, 평화운동은 그 자체로 불평등하고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라는 팔레스타인 주류의 반응과, 이스라엘 군의 압도적인 화력 때문에 막대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 앞에서 이중고를 겪어야 했던 팔레스타인 쪽 '평화의 전사들'의 고뇌도 함께 묘사된다.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일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들의 굳은 의지를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이 '장거리 경주'이며, 개개인의 변화가 결국 사회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거나 '평화의 전사들' 존재 자체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의 태도는 비록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큰 울림이 있다.

특히 전쟁이라는 체제는 불가피하게 상대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만든다거나,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폭력은 반드시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그리고 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기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는 이들의 깨달음이 인상적이다.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는 일찍이 일제강점기를 거쳤고, 한국전쟁을 경험했으며 여전히 휴전 상태에서 남북의 군사적 대치라는 상황을 몸소 살아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큰 공감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영감을 줄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분쟁 상황에 대한 이해 정도를 높이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만하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여타 작품들과 달리 상당 부분 극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련 소재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 보기에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여지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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