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새 영화 <퍼스트 매치>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 새 영화 <퍼스트 매치> 포스터 이미지. ⓒ CreativeBionics


레슬링, 아이스하키, 야구 그리고 역도. 한때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스포츠 종목들이다. 하지만 스포츠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대부분 영역에서 이런 식의 금기 혹은 경계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이나 골프 선수 미셸 위의 경우처럼 성별 구분이 없는 경쟁에 도전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로 데미 무어 주연의 <지.아이. 제인>(G.I. Jane, 1997년작), 가깝게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2016년작)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금녀'의 영역에 도전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여성에 대한 차별을 주요 갈등 요소로 활용했다.

하지만 지난 3월 30일 넷플릭스가 출시한 영화 <퍼스트 매치>(올리비아 뉴먼 감독)는 이와 비슷한 구도의 이야기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사뭇 다른 태도가 느껴지는 영화다. <퍼스트 매치>는 위탁가정을 전전하는 소위 '비행소녀'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 모니크(엘비어 이매뉴얼 분)가 레슬링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의 막을 열기까지 과정을 묘사한 영화다.

영화는 이런 성장 서사를 기본 축으로 모니크와 전직 레슬러였던 아버지의 애증, 모니크가 남자 고등학생 레슬링팀에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상황, 위탁가정 보호자들과 레슬링 코치 등 모니크가 주변 어른들과 맺게 되는 관계 등을 크고 작은 일화들을 통해 솜씨 좋게 엮어냈다.

남자 레슬링팀의 유일한 여성 선수

 영화 <퍼스트 매치> 스틸 이미지

영화 <퍼스트 매치> 스틸 이미지 ⓒ CreativeBionics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요소는 주인공 모니크가 남자 고등학생 레슬링팀 일원으로서 선수 생활을 한다는 설정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다니는 학교에 여자팀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모니크가 여성이라는 점은 설정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국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만 학교 대표 선발전에서 모니크에게 패배한 남학생이 '여자에게 졌다'고 놀림을 당하는 상황이나 "여자를 때리면 죽일 놈이 되는 거고 여자한테 맞으면 등신이 된다"는 모니크 아버지의 발언 등이 나올 뿐이다. 이마저도 작은 해프닝 정도로 언급하고 지나가는 수준이다. 대신 영화는 모니크가 오로지 실력으로써 같은 체급 남학생들을 경기장에서 제압하고 결국 당당한 레슬러이자 팀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영화의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젠더 혹은 성 역할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여성은 남성보다 덩치가 작고 힘이 약한 특성이 있으므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거나, 따라서 여성을 때리는 남성은 사회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등의 '고정관념'을 생각해 보자.

사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 개념이지, 성의 구별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고정관념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약자라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수치에 근거한 것일 뿐, 예외적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평균적인 수치마저 개인의 노력이나 환경 변화에 따라서는 언제든 역전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모니크의 성장 서사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라는 요소를 장애물이나 갈등 요인으로 사용하기보다 남성을 동등한 경쟁 혹은 협력의 대상으로 묘사하려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필자는 제작진의 이런 선택을 두고 구태의연한 젠더 혹은 성 역할에 대한 분명한 거부 표시로 받아들였다.

비행소녀에게 손 내밀어준 사람은

 영화 <퍼스트 매치> 스틸 이미지.

영화 <퍼스트 매치> 스틸 이미지. ⓒ CreativeBionics


이와 함께 <퍼스트 매치>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다. 이 영화에는 당장 돈벌이를 위해 자식의 미래를 망치는 아버지와 보조금에 눈이 먼 위탁가정 수급자 등이 등장하는 한편으로, 조건 없이 호의를 베푸는 위탁가정 보호자와 자신이 맡은 학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관심과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선생님이 나온다. 또한 모니크가 울고 싶을 때 언제든 어깨를 내어주는 친구도 등장한다.

재미있는 건, 후자에 해당하는 좋은 사람들이 모니크의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언제나 모니크에게 손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정작 모니크의 시선은 항상 다른 데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순간 모니크는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절망적인 상황에 몰릴수록 스스로 고립되는 쪽을 택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얘기다. 그만큼 세상에는 나쁜 인간보다 좋은 인간이 많으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서 혈연이라는 건 결코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본 영화 저변에 깊이 깔려 있다. 

<퍼스트 매치>는 결국 레슬링과 위탁 가정이라는 중심 소재를 매개로, 한 소녀가 애정 결핍에 시달렸던 유년기의 상처를 극복하고,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설정에서 쉬이 기대할 법한 전형적인 여성주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지만, 인생에 관한 보편적인 깨달음을 인상적인 방식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한 영화다. "패배는 없다. 다만 승리와 교훈뿐이다"라는 대사에 이 영화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집약돼 있다.

퍼스트 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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