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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글이었다. 우리는 '맘충'이 아닙니다, 하고 건조한 제목을 붙였다. 새로 생긴 이 단어를 거절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쓴 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댓글을 받았다. 비난과 분노였다. 꼼꼼하게 읽어 내렸다.

날선 문장들이었지만 크게 상처 받지 않았다. 그저 엄마로서 살고 있는 사람이, 엄마를 비하하는 '맘충'이라는 단어가 싫다고 하는데 다들 왜 이렇게 화를 낼까 궁금했을 뿐이다.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서는, 자존감 좀 키워라'는 문장을 읽기 전에는. 익숙했다. 스스로에게 하던 말이었다. 나는 정말 자존감이 없어 '맘충'이라는 단어가 싫었던 걸까.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존감은 행복한 삶을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존감을 높이라 당부한다. 자존감을 가르치고 또 배운다. 자존감은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수시로 들락거리는 단어가 되었다.

삶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생길 때마다 나는 나의 자존감에 대해 생각했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래,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해야지, 나는 가치 있는 존재야, 나는 이미 충분해. 자존감을 부르는 주문들.

틀리지 않았다. '나'를 되돌아보고 '나'에 집중하니 창 밖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이것 봐, 세상은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야. '나'는 '나'를 인정하고 '나'답게 살기로 했다. 그렇지만 창 밖에 세상으로 나갔을 때, 이 주문들은 금세 힘을 잃어버렸다.  

나는 엄마니까, 엄마들 얘기를 해볼까. 임신으로 생긴 몸의 변화와 한계 때문에 일을 그만 둔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제대로 자란다고 하기에 육아에 집중한다. 돌봄 노동으로 하루 대부분을 쓰고 있지만 '집에서 놀고 먹으면서'라는 수식이 종종 붙는다. 아이가 기관에 다니기 시작하자 다시 일을 해보려 하지만 오후 3시면 돌아오는 아이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다. 가끔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며칠 곁을 지켜야 한다.

오후 3시 이전에 퇴근해야 하고 예고 없이 며칠 휴가를 내야 하는 나를 고용할 곳도 거의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들은 경력이나 적성과 전혀 상관없고 비정규직이며 복지나 급여도 부족하다. 그런 대우 받으면서 그 정도 벌거면 집에서 애 보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충고를 받는다.

창 밖에 세상으로 나갔지만 자리를 찾지 못해 다시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없이 우울하고 무겁다면 눈만 높고 자존감이 낮은 내 잘못일까. 아니, 문제는 '나'에게만 있지 않다. 여성만을 향한 모성애 강요, 육아와 가사는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 육아는 오로지 가정의 책임이라는 인식, 안전한 보육 환경과 제도의 부족, 비정규직 차별이라는 현실이 창 밖 세상으로 나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든다.

나는 엄마로서의 경험이 대부분이기에 엄마의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도 '세상'은 이미 써둔 이야기를 되풀이 한다. 어쩔 수 없이 그 위를 무력하게 돌고 또 돌때,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가혹하게도 "지금 행복하지 않은 자, 모두 유죄"라 선언한다. 

문제는 개인에게 있지 않다, <사라, 버스를 타다>

<사라, 버스를 타다>
 <사라, 버스를 타다>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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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흑인이고 어린이며 여성이다. 그렇지만 빛나는 눈, 선명한 입술, 곧은 어깨가 당당하다. 무엇이 사라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아침마다 사라와 엄마는 버스 뒷자리에 앉는다. 흑인은 백인과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라는 "왜"라고 묻지만 이유는 없다. '늘 그래왔으니까 그런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사라는 버스 앞쪽으로 나간다. 뒤쪽과 앞쪽은 다르지 않았다. 사라는 생각한다.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걸까?' 백인들은 말한다.

"꼬마야 네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사라는 돌아가지 않는다. 계속 나아가 앞쪽 자리에 앉는다. 규칙을 따르라며 성난 충고를 하는 백인들을 앞에 두고 외롭고 무섭다. 그럼에도 '왜"라고 묻는 마음의 울림을 지울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경찰이 사라를 억지로 끌어 내린다.

"법에는 말이다, 너희 같은 사람들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나와 있단다. 그래서 말인데, 법을 어기고 싶지 않다면 네 자리로 돌아가거라."


다음 날, 사라와 사라의 엄마는 차마 버스를 타지 못하고 걷는다. 그런데 사라의 뒤를 사람들이 따라 걷기 시작하고 어떤 흑인도 버스를 타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끝내 법을 바꾼다. 버스의 앞쪽도 뒤쪽도 모두의 자리가 된다.   

<사라, 버스를 타다> 속내지
 <사라, 버스를 타다> 속내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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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든 것은 자존감, 그리고 그 자존감을 지킬 수 있도록 변화한 세상이다. 사라의 시선은 '나'에서 머물지 않고 '늘 그래왔으니까 그런 것'을 향했다. 그리고 나아갔다, 바꿨다. 바꿔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었으므로.

사라의 엄마가 사라를 품에 꼭 안고 한 말을 나도 딸에게 해주고 싶다.

"괜찮다.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넌 세상의 어떤 백인 아이 못지않게 착한 아이란다. 너는 특별한 아이야."
"그런데 왜 나는 버스 앞자리에 타면 안 되나요?"
"법이 그렇기 때문이야. 법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법은 절대 바뀌지 않나요?"
"언젠가는 바뀌겠지."

그리고 덧붙이겠다. "우리가 바꿀 수 있단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더퍼스트미디어>에도 게재됩니다.



사라, 버스를 타다

존 워드 그림, 윌리엄 밀러 글, 박찬석 옮김, 사계절(2004)


태그:#그림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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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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