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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학살> 파블로 피카소, 1951. 이 작품은 한국전쟁 당시 1951년 신천학살을 고발한다.
▲ <한국에서의 학살> 파블로 피카소, 1951. 이 작품은 한국전쟁 당시 1951년 신천학살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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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는 학살사건 자체보다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더 유명한 것 같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한국전쟁 당시 1951년 신천 학살을 고발한 <한국에서의 전쟁>과 함께 전쟁과 학살의 비극을 고발하는 대표적 정치예술 작품으로,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1. 폭격과 학살

1937년 4월 26일 오후 독일공군(Lufwaffe)과 이탈리아 공군(Aviazione Legionaria)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3시간 동안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통상적인 장날에 모여있던 게르니카 주민은 독일군의 폭격 앞에 무방비로 노출됐고, 바스크 공식통계에 따르면 1654명이 사망했다. 성인남성이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는 주로 민간인 여성과 노약자들이었다.

영화 '게르니카' 2016, 감독 Koldo Serra
▲ 영화 '게르니카' 2016, 감독 Koldo Se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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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군의 하인켈 폭격기는 수백 톤의 폭탄과 소이탄을 끊임없이 퍼부었고, 융커 전투기는 도망치는 민간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기총소사를 가했다. 게르니카 폭격은 <더 타임스>의 기자 조지 스티어의 현장 보도로 그해 4월 28일 <더타임즈>와 <뉴욕타임즈>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영화 <게르니카>(2016년, 감독 콜도 세라)는 이 폭격의 참상을 실감 나게 표현한 작품이다.

2. 학살의 의도

게르니카 학살은 극단의 시대를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이었다. 스페인 프랑코의 요청으로 폭격을 가한 나치 공군은 게르니카를 전격전(Blitzkrieg)의 첫 전술적 시험무대로 삼아, 독일공군 최첨단 기종의 성능을 실험했다.

게르니카는 인구 5천 명의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고, 그 어떤 군사적 공격대상도 없었다. 여러 가지 전쟁물자를 조달하는 마을 외곽의 군수공장 외에는 어떠한 군사시설도 없었다. 더욱이 이 공장은 공격을 받지도 않았다. 폭격의 동기는 오로지 적에 대한 위협뿐이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군사 전술적이 아니라 공화파 지역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 민중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민간인 사망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아니라, 전술적 목표였다.

3. 스페인 내전과 학살

군부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1936-39)은 외형상 공화정부 진영과 국민/파시스트 진영(민족주의 진영) 간의 내전이지만, 사실 교회와 군대, 극우세력이 합법적 공화정부를 타도하려고 시도한 반란이었다.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불간섭협정이란 핑계로 공화정부 지원요청을 거부한 가운데,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 소련과 코민테른이 공화정부와 함께 싸웠던 국제전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2차 세계대전의 축소판이라 할 만했다.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 당시 사진
▲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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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반란이 실패하고 장기 내전으로 바뀌면서, 공화 진영과 파쇼 진영의 군사적 대결 외에도 각각의 점령지역에서 적색테러와 백색테러가 일어났다. 공화 진영의 테러가 자연발생적인 양상이고 수적으로 제한적이었던 반면, 국민 진영의 백색테러는 공화파와 좌파의 말살을 목적으로 민간인에 대한 조직적인 테러와 탄압으로 진행됐다.

3년에 걸친 내전으로 40만 명이 사망했고, 60만 명이 상처를 입었다. 50만 명은 탄압과 보복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다. 내전에서 승리한 파시스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전통과 종교의 기치 아래 36년 동안 스페인을 지배했다.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1937.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고발한다.
▲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1937.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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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피카소의 <게르니카>

1937년 4월 파리에서 살던 피카소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국제 엑스포의 스페인 전시관을 장식할 작품을 의뢰받은 상태였다. 게르니카 학살을 접한 피카소는 원래의 구상을 접고, 게르니카 학살을 다룬 대작(7.7mX3.49m)을 파리의 자택 화실에서 완성했다.

'황소'와 '말', '화염'으로 구성된 게르니카는 초현실주의와 후기 입체주의가 혼합된 독특한 모더니즘 양식의 작품이다. 파리 엑스포 국제관에서 전시됐고, 이후 순회전시를 통해 스페인 구호기금을 모으는 데 기여했다.

당시 한 독일 장교는 독일 점령 하의 파리에서 피카소의 아파트에 걸린 게르니카 사진을 보면서 "당신 작품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때 피카소는 "아니오, 당신들의 작품이지"라고 답했다.

5. 다시 게르니카 

게르니카 폭격은 정규군이 민간인을 직접적 공격대상으로 자행한 20세기 최초의 학살이었다. 또한 군사적 목적이나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해 적에게 최대한의 공포를 주입하려는 가장 악질적인 형태의 학살이었다. 대량살상무기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가테러리즘의 극치였다.

극단의 시대 20세기, 종교와 전통, 사유재산의 이름 아래 반공주의와 국가테러리즘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났다. 특히 게르니카는 2차대전과 냉전 시대에 무수하게 자행된 국가폭력과 민간인 학살의 첫 사례였다. 언제나, 국가테러리즘과 극우 파시즘의 무차별 폭력 앞에서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은 실종되기 마련이다. 그때,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들은 가장 먼저 피해자가 된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쓴 원영수씨는 국제포럼 운영위원이며 사회실천연구소 회원입니다. 이 글은 제주4.3 범국민위의 <4370신문> 3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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