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상인이 솔로몬을 살펴보고 있다.

노예상인이 솔로몬을 살펴보고 있다. ⓒ 판씨네마㈜


<노예 12년>은 자유민이었던 한 흑인이 예기치 않게 노예가 된 뒤 자유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서사를 담고 있다. 19세기 중반 뉴욕에 살던 음악가 솔로몬(치에텔 에지오포)은 어느 날 유인 납치를 당해 남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로 팔려가게 된다.

영화는 1863년, 노예 해방령이 공표되기 20여 년 전인 1840년대에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비인간적인 노예 반입은 금지됐지만, 여전히 노예 거래가 가능한 주와 금지된 주가 존재했다. 남부에선 노예 노동에 기댄 노동집약적인 농장제가 존속됐고, 이로 인해 자유주에서 흑인을 납치해와 노예주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가 횡행했다고 한다.

솔로몬은 12년의 노예생활 동안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오직 '생존'만이 중요한 삶을 살게 된다. 그 삶 속엔 굴종과 폭력, 모순, 종교 뒤에 숨은 백인들의 '위선'만이 존재한다. 

캐릭터의 힘으로 굴러가는 줄거리

영화에선 자유민으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흑인과 처음부터 남부 노예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노예를 대비해 보여준다. 또 자유민 출신 흑인 중에도 두려워하며 '안 될 것'이라고 자포자기하는 흑인과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 '대항해보자'고 설득하는 흑인을 비교해 보여준다. 이러한 내러티브 속에서 감상하는 관객은 타고난 본성과 환경 중 어떤 것이 인간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 둘의 상호작용은 어떤 것인지 등을 자연스럽게 생각해보게 된다.   

솔로몬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는, 교육받은 흑인으로 묘사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 신분으로 떨어지자, 원래부터 노예로 나고 자란 흑인들보다 상황을 더 예민하고 고통스럽게 느끼는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영화는 가혹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가진 지성과 재능이 오히려 그를 더 괴롭게 하고, 위험하게 만들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보통 시나리오 작가들은 등장인물의 '성격화(characterization)'가 가장 중요하고 성격화가 완성되면 스토리는 힘을 얻어 스스로 굴러간다고 말하곤 한다.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작가들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각 등장인물의 성격화가 잘 구축돼 있고, 캐릭터를 잘 해석해낸 쟁쟁한 배우들의 호연을 볼 수 있다. 캐릭터 자체의 힘이 대단하기 때문에 이들의 성격에 따라 스토리가 막힘없이 저 스스로 굴러간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스토리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몰입을 돕는다.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들도 다차원적이고 입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악인인 농장주 엡스(마이클 패스밴더)조차도 충분히 그런 느낌을 준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솔로몬과 우정을 나누는 동료 팻시.

영화 속에서 주인공 솔로몬과 우정을 나누는 동료 팻시. ⓒ 판씨네마㈜


솔로몬은 자유를 박탈당한 12년간의 여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가 처음 팔려간 농장주 포드(베네딕 컴버배치)는 기독교를 믿는 선한 사람이고 사적으론 자기 노예들에게 동정심도 갖지만 그렇다고 궁극적인 정의와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솔로몬이 자유민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간단히 외면해버리고, 자기의 곤란함을 당장 해소하기 위해 악명 높은 농장주 엡스에게 빚 대신 솔로몬을 넘겨버린다.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캐릭터는 솔로몬과 우정을 나누는 동료 노예인 팻시(루피타 니옹)다. 팻시 역의 니옹은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엡스가 팻시에게 보이는 태도를 "광적인 사랑"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보다는 광적인 '집착'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엡스는 팻시가 잠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그녀를 다그치고 괴롭힌다. 아내의 질투로부터도 전혀 보호하지 않고 심지어 채찍질도 서슴지 않는다. 팻시가 자기 아이를 낳았음에도 목화밭 일에서 제외해 주지도 않는다. 영화는 주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는 여자 노예들이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자유민과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팻시는 끝내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렇듯 집착과 애정은 전혀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착이 애정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전체는 아니다. 집착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감정이라면, 애정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상대의 행복을 내 행복과 동일시하는 행위 등을 포함한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떠돌이 노동자 베스는 백인 캐릭터 중 유일하게 자기 신념을 삶에서도 실천하는 인물로 표현됐다. 베스는 현실로 존재하기엔 너무 이상적인 사람이지만,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은 그런 인물들 덕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노예제 다룬 수많은 영화와 구별되는 작품

 농장주의 목화밭에서 노예들이 목화를 따는 노동을 하고 있다. 솔로몬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유인 납치당한 자유민임을 알리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할수록 위험에 빠질 뿐이다.

농장주의 목화밭에서 노예들이 목화를 따는 노동을 하고 있다. 솔로몬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유인 납치당한 자유민임을 알리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할수록 위험에 빠질 뿐이다. ⓒ 판씨네마㈜


주인공 솔로몬은 머리가 좋고 가혹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사람으로 묘사됐기에 감상자에게 '호감'을 준다. 다른 시공간에 내던져진 인물이지만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이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오늘날의 한국인은 노예 상태에 있지 않나, 영화 속에 나오는 노예들과 그들을 착취하는 농장주가 현대사회와 다를 게 무엇인가' 라는 자조섞인 자문을 하게 만드는 면도 있다. 이 영화가 2014년 국내 개봉 당시 50만 명이라는 근래 보기 드문 관객수를 기록한 것도 그만큼 공감이 주는 흥행요소가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미국 남부의 대자연을 묘사하는 것에도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 너른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는 흑인들의 노예 노동, 늪지대, 들판과 숲, 강 등이 매 컷마다 아름답게 펼쳐진다.

맥퀸 감독은 원래 자유민이었지만 노예가 된 주인공을 통해 실존했던 노예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는데, 이를 통해 영화는 노예제를 다룬 그간의 수많은 영화와 구별되는 나름의 독창적인 지위를 얻게 됐다.

덧붙이는 글 없음.
노예제도 솔로몬 농장주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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