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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아. 이 책 <마쿠라노소시> 제목이 좀 생소하지 않니? 고전이라고 하면 제목은 들어봤는데 실제로는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고 정의 해도 많이 틀리지는 않잖아? 그런데 이 책은 제목조차도 처음 들어봤을 거야.

우선 제목에 관해 설명을 좀 해줘야 하겠구나. '마쿠라'는 몸 가까이 은밀히 지니는 것을 의미하고, '소시'는 묶은 책을 의미한다는구나. '베갯머리 서책' 정도로 번역이 된단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사상이나 역사 혹은 권력 암투에 관한 책이 아니란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일본의 고위 궁녀 세이쇼나곤이 천황비인 데이시 중궁의 후궁에서 일어난 일상과 연중행사,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등에 대해서 쓴 수필집 정도라고 보면 돼. 세이쇼나곤이 비록 궁녀라고는 하지만 유명한 가인을 여럿 배출한 중류 귀족 출신인 데다 한시를 짓는 재능을 인정받아 발탁되었기 때문에 <마쿠라노소시>의 뛰어난 문학성은 우연이 아니란다.

무려 천년 전에 일본 후궁이 쓴 수필집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너에게 소개하려는지 궁금하지 않니? <마쿠라노소시>는 우선 세이쇼나곤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감성과 높은 학식을 만끽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발랄한 문체가 압권이란다. 너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장황하거나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고 계절의 변화, 생활 속 에피소드, 당시 풍습 등에 관한 짤막한 생각이 대부분이야.

무엇보다 천년 전 사람이 쓴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발랄하고 기발한 문체가 매력적이란다. 한마디로 천년 전 블로그 글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요즘 애들 블로그에 일부를 붙여넣기 해도 천 년 전 사람이 쓴 글이라고 눈치채지 못할 정도란다.

스님이 되는 길
애지중지하던 아이를 절의 스님으로 보내는 것은 매우 안타깝다. 스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마치 나뭇조각인 양 하찮게 여겨질 뿐더러, 공양 음식 같이 맛없는 것만 먹게 되고, 앉아서 조는 것도 비난을 받는다. 젊었을 때는 이런저런 호기심도 있을 텐데 여자가 있는 곳은 마치 싫은 듯이 잠시라도 곁눈질해서는 안 된다. 잠깐 보는 것쯤은 괜찮을 법한데 그것도 못 하게 비난을 한다. 더구나 수도승이라도 될라치면 매우 심하다. 피곤해서 앉아서 졸기라도 하면 "졸기만 하고 독경은 제대로 하지도 않아" 하며 투덜거린다. 마음 편할 새도 없이 얼마나 괴로울까. 하지만 이런 것도 옛말인 것 같다. 요즘은 너무 편해 보인다. - 20쪽

도윤아. 가끔 텔레비전에서 일찌감치 머리를 깎고 동자승이 된 아이들을 보잖아? 그 아이들을 보면서 넌 어떤 생각을 하니? 큰 스님한테 꾸지람을 듣고 꾸벅꾸벅 졸면서 목탁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애잔하지 않니? 물론 아빠도 그래. 성인이 스스로 승려가 되려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니까 가타부타할 말이 없지만 이제 겨우 코흘리개가 뭘 안다고 승려가 되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면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단다.

아마 도윤이 너도 나와 생각이 다르진 않을 거야. 만약 도윤이 너에게 텔레비전에 나오는 동자승을 보고 느낀 점을 적으라고 한다면 위에 나오는 세이쇼나곤이 쓴 글과 다르게 적을 수 있을까? 물론 세부적인 글 내용이야 다르겠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아마도 다르지 않을 거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부녀가 동자승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무려 천년 전 그것도 황궁에 사는 궁녀가 똑같이 느끼고 기술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니?

더 놀라운 것은 저 감성적인 글을 세이쇼나곤이 노년 때 쓴 글이라는 거란다. 마지막 문장에서 말하는 '요즘'이 바로 세이쇼나곤이 노년이 된 때를 말하는 것이고 그 앞에 나오는 '옛말'은 젊은 시절을 의미하는 거야.

마지막 문장 '요즘은 너무 편해 보인다'는 조금 우습지 않니? 천년 전 사람이 쓴 '요즘'이라는 말 말이다. 기원전 3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아테네 유적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고 하잖니?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서 걱정이다" 자신이 활동하던 젊은 시절과 현재를 비교해서 한탄하는 것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 인지상정 같아.

무안함
-멋쩍은 것
다른 사람 부르는데 자기 부르는 줄 알고 얼굴을 내민 경우, 그쪽에서 뭔가 주려고 했을 때는 더욱이 멋쩍다. 별 뜻 없이 다른 사람 험담을 했는데 아직 뜻도 잘 모르는 어린아이가 그 사람 앞에서 들은 그대로 애기 했을 때. 슬픈 얘기를 듣고 다른 사람들이 다 우는데, 마음속으로는 정말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로 눈물이 안 나올 때도 대단히 멋쩍다. 울상을 짓고 슬픈 표정을 지어봐도 생각만큼 잘 안 되니까 말이다. 그러다 대단히 잘된 일을 보거나 듣거나 했을 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도대체 어인 일이란 말인가. - 262쪽

이런 상황은 텔레비전 시트콤에도 자주 나오고 누구나 살다 보면 한두 번은 꼭 겪는 일이잖아. 아빠도 이런 일을 종종 겪었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아이가 고개를 숙여서 나한테 인사하는 줄 알고 고개를 숙이고 '그래, 잘 지내니'라는 말까지 덧붙였는데 알고 보니까 그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한 거였어.

가끔 슬픈 상황에서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어. 아빠가 코흘리개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그땐 철이 너무 없어서 그저 장례 절차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며느리인 숙모님께서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서럽게 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 생전에 할아버지가 나를 참 귀하게 여기셨는데도 도무지 눈물이 나지 않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고 후회스럽단다. 옛사람들은 상주는 많이 울고 곡을 크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오죽했으면 곡을 대신해주는 사람을 돈을 주고 고용을 했겠니. 본인 일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도 함께 울어주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빠는 이상하게도 작은 일에도 잘 슬퍼하는데 눈물이 잘 나오지 않더라.

큰 게 최고
-클수록 좋은 것
집, 도시락 바구니, 스님, 과일, 소, 소나무, 벼루의 먹, 남자 눈이 가늘면 꼭 여자 같은데 그렇다고 남자 눈이 왕방울만 한 것도 무섭다. 화로. 꽈리, 황매화 꽃. 벚꽃잎. - 414쪽

집은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구나. 이런 운치 있고 재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속내는 다르더라도 예쁜 울타리가 있는 초가 산막을 예찬할 법도 한데 큰 집을 가장 먼저 꼽았어. 하긴 이런 솔직하고 담백한 점이 세이쇼나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해. <마쿠라노소시>를 천년 전 여자가 쓴 블로그 글이라고 비유하는 이유이기도 하잖아.

<마쿠라노소시>를 <베갯머리 서책>이란 제목으로 같은 역자가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냈다.
 <마쿠라노소시>를 <베갯머리 서책>이란 제목으로 같은 역자가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냈다.
ⓒ 지식을만드는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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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대 젊은 처녀가 소박한 집을 꿈꾸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잖아. 도시락 바구니는 커야 한다고 하고 남자 눈에 대한 취향을 말하는 것을 보면 세이쇼나곤은 요즘 여고생이 가지고 있는 감성과 별다르지 않는 것 같아. 어찌 보면 귀엽기도 하고. 이 책이 궁녀의 일상생활을 썼다고 해서 '베갯머리 서책'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아빠가 생각하기에는 베갯머리에 항상 두고 심심할 때 꺼내서 읽는 책인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하나 일러두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절판되었어. 아빠도 이 책의 서지 정보를 조사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희귀본이 되어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구나. 다행스럽게도 <베갯머리 서책>이란 제목으로 같은 역자가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냈어.

굳이 구하기 힘들고 비싼 <마쿠라노소시>를 살 필요는 없고 새로 나온 책으로 읽으면 돼. <마쿠라노소시>라고 하면 도무지 뜻을 짐작할 수 없는데 친절하게도 뜻을 풀이한 제목이라 더 좋구나.


마쿠라노소시 (천줄읽기)

세이쇼나곤 지음, 정순분 옮김,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2012)


태그:#마쿠라노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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