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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피해자인가?"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순결한 피해자인가?"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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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평범하기만 한 여성의 극적인 변신. 영화에서는 이러한 환상이 어렵지 않게 실현된다(팀 버튼이 창조한 캣우먼이나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루시를 떠올려보라). 영화 속 여성은 중대한 사건을 계기로 아름답고 사악하고 지능적으로 변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대한 사건은 치명적인 사고나 강간으로 한정된다. 여성에게 있어서 몸이 훼손되는 일은 그가 행하는 극적인 변신과 복수에 무조건적인 설득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남성은 그가 속한 조직이나 가문이 몰락하거나 명예와 지위를 잃었을 때, 혹은 부모나 연인, 동료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한다. 영화상의 설정에 불과하더라도 이러한 차이는 분명, 성별에 따라서 중요시해야 할 것이 다르다는 사회적 통념을 반영한다.

미투의 확산과 파생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여성의 몸'에 대해 골몰했다. 역사상 여성의 몸은 다양한 억압과 혐오의 진원이었다. 성폭력 이슈에 있어서도 대중은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성의 몸을 주시한다. 그것이 아니면 성폭력 2차 가해의 복잡한 성격과 모순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한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성폭력 피해자가 증언을 시작하면 대중은 마치 집단적으로, 버튼이라도 눌린 것마냥 반응한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보가 주어지는 즉시 대중은 피해자가 아니라 '성폭력'에 방점을 찍는다.

피해를 입은 사람보다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가운데 모든 관심과 질문이 '폭력'이 아닌 '성'을 향한다. 이는 결국 화간의 가능성에 집착하는 양상으로 귀결된다. 한 사람의 인권이 짓밟히고 그로 인해 고통받은 사실보다 몸이 훼손된 여자, 혹은 섹스한 여자를 떠올리기에 바쁘다.

이렇게 버튼이 눌리는 현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언론이다. 언론은 대중이 무엇에 반응하고 관심을 보이는지 가장 잘 알고 있다. 지난 2월 공연계 미투 증언이 이어질 무렵 언론은 앞장서서 피해를 증언한 여성들, 직업이 배우인 이들의 사진을 공개하며 피해자가 어떤 여성인지 상세히 보도했다. 그들이 몇 살이고 어떤 작품에 출연했는지를 알 권리라는 미명 아래 거리낌 없이 파헤친 것이다.

정확히는 피해자가 얼마나 젊고 매력적인 여성인지 궁금한, 대중의 저열한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보도 행태는 성폭력 증언이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지만 지금까지도 개선은 요원하다.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의심과 질문 공세

보도를 접한 대중은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 사건의 정황을 파악해낸다.
 보도를 접한 대중은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 사건의 정황을 파악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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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를 접한 대중은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 사건의 정황을 파악해낸다. 본질은 성폭력이나 다름없는, 아니 그보다 더 악랄한 2차 가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 이 무렵이다. 2차 가해의 양상은 다양하다. 개중에서 피해자가 단호하게 거절했는지 여부를 따지거나 권력관계에 의한 성폭력이 발생했다면 당장 일을 그만둬야 했다는 주장, 그러면서 성폭력의 지속 기간과 횟수를 따지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가해 양상이다.

2차 가해의 주체는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여성이 생계나 직업인으로서의 능력, 성취와 책임감을 모두 제쳐두고 몸을 우선시해야 떳떳할 수 있다는 후진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의심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폭력에 불과하다.

의심과 질문 공세를 퍼붓는 다수의 2차 가해자는 성폭력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죄의식을 심어준다. 게다가 이들은 피해자를 심판하겠다는 욕망이 앞선 나머지 논리의 일관성도 확보하지 못한다. 여성이라면 몸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피해 여성이 처음부터 얼마나 순결했는가를 검열하는 행태의 모순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다수에게 피해 사실을 인정받을 만큼 순결한가, 순결하지 못한 여성으로부터 속고 있는 게 아닌가 등등의 터무니 없는 의심은 피해자를 고통으로 밀어 넣고 여성 일반이 몸조심을 강요받는 분위기를 조장한다.

실제로 성폭력 2차 가해에 가장 취약한 대상은 고령의 여성이나 기혼 여성, 이주 여성, 성노동자 등이다. 이들은 2차 가해자의 주체로부터 피해 사실을 부정당하고 공개적으로 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그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증언한 류여해 전 의원을 공개적으로 조롱한 일이 있다. 홍준표 대표는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희롱 할 사람을 성희롱해야지'라는 발언을 했고 그 말을 들은 기자들이 일제히 웃음으로써 피해자를 조롱했다.

문제는 2차 가해의 양상이 점점 더 다양해져서 가해자들이 마치 수사권이라도 가진 것처럼 피해자의 신상 정보를 파헤치고 허위 정보를 가공, 유통하며 여론몰이까지 한다는 점이다. SNS와 커뮤니티 게시판, 카카오톡 단체 메시지방과 같은 은밀한 공간에는 이들이 만들어 낸 허위 정보가 넘쳐난다. 이러한 현상은 가해자의 유명세와 피해자의 신상 공개가 맞물리면 더욱 심각해진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사건 고발 이후 피해자의 나이, 학력, 결혼 여부에 관한 카더라식의 허위 정보가 떠돈다. 여기서도 피해자의 사진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이 연출해낸, 피해자라는 편견에 부합하지 않는 이미지가 허위 정보의 신빙성을 보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허위 정보를 전송하고 퍼뜨리기만 하는 것 또한 법률에 명시된 불법행위이며 처벌의 대상이다.

우리의 불편함 위에서 가능한 당신의 편안함

그렇다면 2차 가해의 심각성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투의 확산은 세계적인 현상이고 여성들은 더이상 성폭력을 수치스러워하거나 숨기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는 문명만큼이나 오래된 성폭력의 역사에서 무력한 피해자에 머물던 여성들이 남성중심의 강간문화에 반격을 가한, 새로운 현상이다. 그리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고발이 터져 나오는 이 초유의 사태는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동반한다.

문화비평가 리베카 솔닛은 저서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The mother of all questions)'에서 '피해자를 믿는다는 건 곧 세상의 바탕에 깔린 가정을 의심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편안함이 지켜져야 할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 편안함이 남들의 고통과 침묵 위에 세워졌을 때조차, 아니 그럴 때일수록 더욱더.'

따라서 지금의 꽃뱀설, 공작설보다 더한 여론몰이와 순결 검증, 피해자 조롱하기 등의 2차 가해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펜스룰로 상징되는 고의적인 따돌림과 배제의 방식도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의도와 실체가 드러난 위협을 진정으로 두려워 하겠는가. 앞으로 2차 가해가 기존의 것과 다른 새로운 양상을 띠더라도 결국에는 여성의 몸이 모든 성폭력의 원흉이며 죄, 그 자체라는 뒤틀린 가치관에서 비롯된 폭력일 뿐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성이 아닌 폭력에 집중하고 피해자를 하나의 여체가 아니라 인격과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하루라도 빨리, 낡고 부도덕한 편안함을 포기해야 할 때를 맞았다.


태그:#미투운동, #2차 가해, #여성, #페미니즘, #반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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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한겨레ESC '오늘하루운동', 오마이뉴스 '한 솔로', 여성신문 '운동사이' 연재 중입니다. 노는 거 다음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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