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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간첩 피해자들 대부분은 공통적인 경험이 있다. 그것은 수사기관에서 고문을 당해 자신의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억울함을 판사 앞에 호소해보지만 인정받지 못했다는 경험이다.판사는 고문피해자들의 주장에 대해 "고문의 흔적"을 입증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이런 젠장!

판사는 아무것도 모른다. 폭력이 진행되는 프로세스를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폭력의 프로세스 1 - 은밀성

고문은 지하 독방과 같은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된다. 물고문, 전기고문에 무슨 흔적이 있겠는가? 행여 구타가 있더라도 가슴이나 머리 등 보이지 않는 곳을 가격해 보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피해자의 몸에 구타로 인한 멍 자국이 남는다 하더라도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처는 생쇠고기 포를 떠서 붙이면 되고, 멍자국은 안티푸라민 왕창 푼 뜨끈한 물에 서너 시간 담그고 나면 다음 날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런들 어떻게 고문을 입증하겠는가.

폭력의 프로세스 2 - 고립된 피해자

고문피해자가 잡혀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폭행 당하는 것, 그 상황은 민주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상식 밖의 사건이다. 특히 언제나 법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던 정상적(?) 시민이라면 가지게 되는 '안전'에 대한 기대를 가지며 살았던 보통의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갑작스런 폭력과의 마주침은 자아가 분열되는 혼돈의 상태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선하게(?) 생긴 수사관 하나가 들어와 위로한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의 뒷담화(?)를 하며, 피해자를 이해한다고 한다. 그리고는 '널 이해해. 네가 더 큰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 고문수사관이 요구하는 대로 적당히 둘러대고 법정에 가서 호소해. 그럼 판사가 들어줄 거야. 이건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달콤한 말을 던지고 나간다.

결국 이곳에서 호소할 곳은 없구나. 조금 더 참았다가 검사, 판사에게 호소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조작된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만다.

폭력의 프로세스 3 - 내탓? 네탓!

결국 그렇게 조작된 범죄사실로 인해 십수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십수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출옥해서도 자신을 고문한 수사관과 국가 때문에 피해를 당했다기보다 자신의 능력과 환경을 탓하며 자책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이웃은 그가 이유없이 범죄자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뭔가 잘못했겠지. 그러니 감옥간 거 아니겠어?', '아버지가 간첩이 돼버리는 바람에 내 인생도 망쳤어'

피해자의 삶이 망가진 건 그에게 폭력을 가한 국가가 아닌 행실에 문제가 있었던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다.

폭력의 프로세스 4 - 돈 때문 아냐?

국가폭력피해자가 어렵게 그들을 돕는 조력자를 만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법정 싸움을 할 때, 일각에서 그들의 재심 투쟁을 이렇게 이야기 하기도 한다.

'무죄 받아 보상금이라도 좀 타려는 거 아냐?'

아무도 자신의 아픔을 대중 앞에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알몸으로 수십 일을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고, 심지어는 성기 고문을 당했던 그 치욕스런 개인의 아픔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알리바이 문제나 증거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은밀한 피해자는 여전히 은밀한 폭력을 입증할 방법을 찾지 못해 자신의 허물을 탓하며 자책하며 살아야 한다
 알리바이 문제나 증거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은밀한 피해자는 여전히 은밀한 폭력을 입증할 방법을 찾지 못해 자신의 허물을 탓하며 자책하며 살아야 한다
ⓒ pex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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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최근 #미투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조금씩 미묘해지고 있다.

특히나 "경험"만으로 "증거 없이 폭로를 이어가는" #미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으며, 오히려 폭로를 이어간 여성들을 처벌하자는 주장이 일고 있다.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알리바이", "증거", "증인"과 같은 것들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밀한 공간에서 권력의 우위를 가진 두 사람 사이 일어난 범행에 증거, 알리바이와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과연 합리적인 걸까.

뜻밖의 성폭력은 뜻밖의 납치, 고문 피해와 다르지 않다. 은밀한 시간과 공간에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야기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고문피해자들의 진술. 이는 은밀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오랫 동안 숨죽여 오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폭로를 이어가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진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장의 진위도 몹시 중요하다. 그러나 피해자의 피해를 귀담아 듣고 그 사실을 입증하려는 노력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기사 전달의 미흡함으로 합리적 이해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알리바이 문제나 증거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은밀한 피해자는 여전히 은밀한 폭력을 입증할 방법을 찾지 못해 자신의 허물을 탓하며 자책하며 살아야 한다.

만에 하나 피해자의 주장이 잘못된 주장이거나 허위의 주장이라면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론의 처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지켜왔던 가치, 즉 민주절차에 의한 처벌이면 족할 것이다.

피해 사실을 주장하는 데 혹여 일반 개인에게 피해 받은 피해자와 재벌·정치인에게 피해 받은 이들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진보의 가치를 지녔다고 해서 그들에게 피해 받은 피해자들에게 더욱 더 엄격한 검증과 증거, 증인들을 요구한다면, 그리고 그 폭로의 의도를 의심한다면 결국 이 미투 운동 역시 권력의 프레임에 가둬지고 말 것이다.

권력과 기득권 세력이라면 그 증거 싸움은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이다. 피해자는 개인이며, 권력은 수많은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이 형성한 구조이다. 이 싸움이 공정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면 그것 자체가 부당한 싸움을 방조하는 것일 수 있다.

권위주의 정권은 고문 피해자들의 피해사실 자체를 희석시키거나 진실을 폄훼하기 위해 그들을 빨갱이, 종북, 투사 등으로 이념등치 하며 진실을 왜곡시키려 노력했다. 마찬가지로  #미투 피해자들을 더 이상 권력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길 바랄뿐이다.

개인의 일상에 처해지는 폭력은 그 자체가 권력과 구조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다. 성폭력 문제가 광범위하게 일상화되고, 그 문화가 당연시 되어 어느 곳에 하소연해도 들어줄 곳 없던 지난 시간을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상처에는 좋은 상처, 나쁜 상처, 합리적인 상처나 불합리한 상처가 없다.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 그 상처를 치유로 바라보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변상철 시민기자는 국가폭력피해자 지원단체인 '지금여기에' 사무국장입니다.



태그:#미투, #조작간첩, #고문피해자,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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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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