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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인가 영화 <이방인>을 보러 갔다가 플로피 디스켓을 하나 주웠다. 집에 와서 내용을 보니 '이건 그냥 버릴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디스켓에 김기덕 감독의 <파란대문> 대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플로피 디스켓 안의 아래한글 문서를 전부 뒤지다가 김기덕 감독의 호출번호를 발견하고 전화를 했다. 내가 플로피 디스켓을 주웠는데 그냥 버릴 수가 없는 내용들이라 연락을 했다고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영화 <파란대문>의 한 장면
 영화 <파란대문>의 한 장면
ⓒ 부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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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집으로 전화가 왔다. 김기덕 감독 본인이라고, 꼭 플로피 디스켓을 돌려받고 싶으니 어디서 만나면 좋을지 물었다. 당시 서울 봉천동에 살던 때라 필요하면 갖다드리겠다고 했더니, 집근처로 찾아오겠다고 하였다.

저녁에 만나서 집앞 찻집에 갔다. 원래는 주운 플로피 디스켓이라서 그냥 포맷해서 쓸까 하다가 내용이 너무 중한 듯해 연락을 드린 거라 하였다. 약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생각했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 등등. 습득한 걸 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신의 영화도 좀 봐달라는 부탁을 들었다.

당시 비주류 감독이었던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찾아서 봤지만 난해하기가 그지 없었다. 하지만 한 편 두 편 보면서 나름 긍정하는 면도 생겼고, 김기덕 감독 영화에 자주 출연한 조재현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당시 조재현 배우도 힘들게 배우생활을 하고 있었고,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세계만을 고집했기에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자를 좀 비하하는 표현이 가득한 그들의 세계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고, 꺼려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후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다니고, 조재현이라는 배우도 많이 알려져 TV에서 보일 때마다 내가 그들의 성공에 한몫한 듯한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마나님에게도 우스갯소리로 "내가 저 대본을 찾아주었기에 저 사람들이 대성할 수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작금에는 허탈함으로 내 자신이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미투운동으로 김기덕 감독과 배우 조재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담긴 주장이 나와서다. 오랜 시간 그들을 한편으로 응원했던 내가 마치 한통속이라도 된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하였다.

 MBC < PD수첩 >이 공개한 김기덕 감독의 행각은 사뭇 충격적이다.
 MBC < PD수첩 >이 공개한 김기덕 감독의 행각은 사뭇 충격적이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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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투 운동으로 자신의 과오가 드러난 것을 두고 "재수없다"라던가, "지금의 상황만 벗어나면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 오산이다.

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발정이 왔을 때 대처하는 자세라고 알고 있다. 동물은 발정기가 오면 자신을 주체할 수 없기에 그것을 본능적으로 갈구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어떤 충동이 올 때 그것을 억누르거나 그것을 다른 식으로 발산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인간인 거다. 그것을 단순히 본능적으로 행동한다면 동물과 뭐가 다른가.

자신들이 존경하고 잘 알고,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의 배신은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것처럼 아프다. 진정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진정 인간이라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알지 못하던 행동들은 아는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듯 합니다.



태그:#미투, #김기덕, #조재현, #안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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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마나님과 4마리의 냥냥이를 보필하면서 사는 한남자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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