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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는 이제 봄의 초입에 들어선 것 같은데 제주도 날씨는 이미 초여름 날씨에 근접해 있었다. 이맘때쯤에서 가을까지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하는 제주도의 자연은 이미 한국인들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지금 보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도시 속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의 귀촌을 한 번쯤 꿈꿀 정도의 매력 있는 공간이지만 불과 7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도는 척박하고 식량이 부족한 곳이었다. 

제주도는 올해를 제주방문의 해로 선포하고 다양한 이미지 굳히기에 나서고 있다. 그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4.3사건을 다 함께하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올해는 4.3사건이 발생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로 제주도민들에게는 의미 있는 한해이기도 하다.

4.3
▲ 제주 조천 북촌마을 4.3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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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대표적인 올레길이면서 4.3길인 제주 조촌 북촌마을 걸어보기를 먼저 시작했다. 3월 초인에도 불구하고 날이 더워서 마치 초여름의 날씨를 연상케 하였다. 풍광은 정말 아름다웠으나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밝혀진 4.3 희생자는 총 1만4231명으로 북제주군에 9359명, 남제주군에 4740명, 도외 66명으로 유독 북제주군에 희생자가 많이 몰려 있다.

해안길
▲ 아름다운 해안길 해안길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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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기 시작하는 3월의 제주도 해안 길을 걷다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아름다운 바다를 두고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일제가 물러간 이후에도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으며 제대로 된 현대사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날의 일은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제주도 사람들은 알아도 모르는 채 살아야 했었다.

북촌리 서모봉 진지
▲ 일제 동굴진지 북촌리 서모봉 진지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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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4.3사건이 일제와 완전히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즈음 서모봉 중간에 일제의 흔적을 발견했다. 북촌리 서모봉 일제 동굴 진지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에 일본 해군이 갑7호 작전에 의거 연합군 함대에 대해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이곳에 동굴 진지를 포함하여 특공 기지 중 가장 큰 규모로 이곳에 구축했다.

일본군
▲ 동굴진지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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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0여 m쯤 내려갔을까 수풀을 해치고 만들어진 길로 내려가 보니 동굴 진지가 나왔다. 마치 영화 속에서 일본군이 결전을 다지고 만들어놓은 그 동굴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해 보였다. 이곳에서도 4.3사건때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내부
▲ 동굴내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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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올레길을 걷는 이들도 일제 동굴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는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스산하기만 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동굴 진지는 옆의 동굴 진지와 이어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가는길
▲ 4.3평화 기념공원으로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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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길을 1시간여 걷고 나서 70주년을 맞아 새 단장을 했다는 4.3 평화기념공원을 보기 위해 이동하였다. 서모봉 위에 올라가서 보는 제주의 풍광은 감탄 그 자체였다.

70주년
▲ 4.3 70주년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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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잘못 끼워진 단추로 시작된 정부는 처음부터 삐걱 삐걱댔다. 그리고 좌익과 우익이라던가 이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제주도민들은 양측 세력에 의해 이용되었는데 그러다가 광기가 극에 달하게 된 때는 1948년 10월 17일로 이때 강력한 토벌이 이루어지면서부터다.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겠다."  - 토벌 사령관 9연대장 송요찬

기념관
▲ 새단장한 기념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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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960년대에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부터 1970년대에 4.3 논의의 물꼬를 튼 <순이삼촌>과 민주화 열기 속에 진실 찾기를 시작한 사람들의 발걸음과 그동안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의 기록과 실제 역사에 대한 논의가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4월 3일은 비로소 2000년에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된다.

비극
▲ 다랑쉬굴의 비극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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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은 1관 역사의 동굴, 2관 흔들리는 섬, 3관 바람 타는 섬, 4관 불타는 섬, 5관 평화의 섬, 6관 새로운 시작으로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둘러봐도 좋지만 이 비극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만나보고 싶다면 특별전시관인 다랑쉬 굴을 가보길 권하고 싶다. 진퇴가 모두 막히고 오직 죽음뿐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보겠다고 조그마한 굴에 들어갔던 양민들이 수없이 많았던 당시 제주도에 있는 수많은 굴에서는 많은 희생이 있었다.

비극의상징
▲ 다랑쉬굴 비극의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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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의 유해는 발견 당시부터 4.3 참극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저항도 못 하는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초토화 작전이 이 굴의 발견으로 인해 진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무려 40여 년 만에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굴내부
▲ 재현 굴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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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8일 제7연대 제2대대는 다람쉬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쳤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굴속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시켜 모두 죽인다.

희생자
▲ 희생자들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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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냥 굴속에서 사는 삶 자체가 얼마나 비극적이었을지 체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겨우 살아난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와도 과거처럼 무조건 죽이지는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백기를 들고 산에서 내려왔지만, 이들 대부분은 길고 비참한 집단수용을 당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죽기도 하고 평생 낙인이 찍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희생
▲ 희생된 사람들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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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보면 대한민국의 축소된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동백은 강렬한 붉은 꽃잎이 흰 눈과 극명한 대비가 되어 보인다. 동백꽃은 현재 4.3의 상징꽃이 되었는데 추운 겨울날 눈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피를 동백꽃에 비유하면서 그 이미지로 굳혀졌다.



태그:#4.3 , #70주년, #제주방문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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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쓰는 남자입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하며, 역사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열심이 사는 사람입니다. 소설 사형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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