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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벌이고 있는 탁수정씨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벌이고 있는 탁수정씨
ⓒ 연남동곰발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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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고발에서 시작한 '미투'의 불길은 연극연출가 이윤택씨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면서 연극, 영화계는 물론 사회 전반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유명인 중에는 여론에 밀려 공개사과를 하거나 자신의 위치에서 물러난 이들도 있다. 그런데 가해자의 사회적 명예가 실추되는 것만으로 미투 운동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까? 가해자를 단죄하기 바쁜 여론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 근거 없는 소문으로 인해 '2차 가해'에 시달렸다. 커뮤니티에 성폭행 피해 사실을 고발했던 '한샘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는 "꽃뱀"이라는 말을 듣는 등 모욕적인 악플을 견뎌야만 했다. "더 자세한 걸 이야기해달라"며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언론들의 취재 경쟁도 도마 위에 올랐다.

미투 운동의 시초격이었던 2016년 10월 '문단 내 성폭력' 운동 당시엔, 가해 지목인이 표면적으로는 사과를 하고, 뒤에서는 명예훼손 고소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피해자들은 명예훼손이나 무고죄 고소에 큰 압박을 느껴야만 했다. 성폭력 피해로 직장을 다니지 못하게 됐음에도, 보상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라는 낙인에 고통받았다.

2014년 쌤앤파커스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이자 고발자였고, '책은탁'이라는 계정을 통해 문단 내 성폭력 폭로에 앞장섰던 탁수정(34)씨는 "가해자 끌어내기보다 더 중요한 건 피해자의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가 설 자리가 없다"며 문화계 내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이들이 겪는 상황에 대해 전했다. 탁씨 또한 2014년 이후 4번의 명예훼손 고소와 1번의 민사소송을 당했으며, 수없이 많은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 정신적으로도 힘든 상황이 많이 찾아와 꾸준히 상담과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그에게 성폭력 고발 이후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구체적인 어려움과,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난 22일 만나 들어보았다. 

미투 운동 이후에 찾아오는 것들... 고소·악플·2차가해

문단 내 성폭력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를 묶은 책 <참고문헌없음>
 문단 내 성폭력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를 묶은 책 <참고문헌없음>
ⓒ 참고문헌없음 준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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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회사의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두 명에게 피해를 입고 회사에서도 잘렸어요. 유서를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리고 자살을 기도했는데, 살아나서 보니까 (회사 측에서) 유서를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한 거예요. 재판은 이겼지만 그 친구는 업계에서 일 안 해요. 더 이상 못 하겠대요."

탁씨는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해소되지 않았다. '일자리를 잃는다 → 고발을 하지만 SNS에서의 비난 여론이 길게 가지 못한다 → 성폭력 피해를 입었음에도 오히려 법적인 '가해자'로 재판을 시작한다 →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 피해자들은 잊힌다.' 이런 일이 반복됐다.

피해자들은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탁씨 또한 문단 내 성폭력 운동을 하면서 지난해 정신과 폐쇄병동에 30여일 동안 입원하는 등 힘든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묻혀만 갔다.

"경찰에서 문단 내 성폭력 운동에 관련된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날이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응급실 갔다가 그대로 폐쇄병동에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그때 저는 정말 지독하게 이 일을 했어요. 폐쇄병동 외출 끊고 인터뷰하고 그랬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가해자에 대한 폭로가 묻혔어요. 오죽하면 당시 한 언론사에서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들을 다룬 카드뉴스 제목이 '최순실이 고마운 사람들'이었다니까요."

그는 언론의 관심이 줄어들고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해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여성 문인들과 함께 '참고문헌없음'이라는 책으로 피해자 및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묶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지금 미투 운동 피해자가 또 없냐고 물어보는 언론들이 야속한 면이 있단다.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을 찾으시는데, 여긴 이미 쑥대밭이에요. 우리는 이제 없어요. 기자님들은 쉽게 연결해달라고 저에게 요청하는데, 저는 인터뷰해달라고 부탁할 때도 너무 마음이 아파요. 1년 전에만 왔어도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쑥대밭'이라고 표현했는지 되물었다. 탁씨는 "우리끼리 죽을 만큼 열심히 했는데 '(사회가) 방관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문화계의 성폭력 폭로를 시도한 사람들은 다시 원래의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며 "피해자들 중에는 자신의 인생을 또다시 수렁으로 몰아가지 않기 위해 언론과의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운동의 전면에 나선 탁씨는 상시적으로 명예훼손 고소의 압박과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 악플은 보지 않지만 이미 악플의 양에서 압도된다고 한다. "성추행할만한 얼굴이냐" 식의 2차가해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사실 관계가 틀린 소문이 퍼지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그에게 SNS는 활동 공간인 동시에 '지뢰밭'이다.

피해자를 둘러싼 악조건들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벌이고 있는 탁수정씨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벌이고 있는 탁수정씨
ⓒ 연남동곰발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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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내 성폭력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드러나지 않은 사실도 많이 있고,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들이 계속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심지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일도 가능한 것 같다"는 게 탁씨의 주장이다. 지금처럼 피해자에 대한 무관심 혹은 '낙인찍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미투 운동의 온전한 성공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쟤 원래 이상했잖아"라는 반격은 여지없이 먹혀들고, 집단 안에서 피해자를 배척하는 논리가 된다. 또한 "미투가 정권을 음해하려는 시도로 작동한다"는 식의 음모론 역시 등장했다. 금전적이든, 정치적이든 성폭력 고발에 '또 다른 목적'이 숨어있다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투 운동에서 누구 하나가 실수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 미워할 준비가 되어있는 집단이 존재하는 거죠."

"서지현 검사를 문재인 정권 힘 빼려고 나온 거로 보는 음모론이 있었어요. 성폭력 폭로에 대해선 언제나 저 뒤에 뭐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혹이 제기돼요. 사람들이 그걸 재미있어하는 것 같고요."

'피해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 또한 오히려 피해자들을 옥죄는 부분이다. 대중의 인식에서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완벽해야 하며 즐거워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인식은 피해자를 의심하고 공격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며, 성폭력 피해 사실을 부정하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또한 성폭력 피해를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가정하며 피해의 회복을 가로막는다.

"저 트위터에도 가끔 실수해요. 운전할 때 속도 위반도 하고 고양이한테 소리도 질러요. 그런 사람도 미투 운동을 해요. 사회에 기여를 하고 옳은 일도 해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만 미투 운동을 해야하나요? 유명해지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며 비난하는데, 유명해져야 싸울 때도 유리한 것 아닌가요?"

상황이 이러한데 정작 성폭력 범죄를 담당하는 검찰과 사법부는 피해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 피해자들은 2차 가해를 버젓이 저지르는 검사의 태도에 한 번 상처받고, 사법부의 남성중심적 판결문에 또 한 번 상처받는다.

"KBS <마녀의 법정>을 뒤늦게 봤어요. 이 드라마가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렇게 열심히 성범죄 수사를 하는 검사를 본 적이 없어요. 성로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당시 성 노동자 중 에이즈 환자가 있었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에이즈 키트로 숨어서 검사하는 권력자들을 파파라치처럼 숨어 있다가 카메라에 담아 증거로 쓰는 거예요. 판타지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성폭력 사건을 이기고 싶어 하는 검사가 늘어났으면..."

성범죄는 '입증'이 어렵다. 그러나 명예훼손은 '입증'이 쉽다. 피해자가 명예훼손을 당하고, 성범죄를 입증하지 못해 가해자가 '혐의 없음' 처분을 받으면 무고죄 소송으로 이어진다. 문단 내 성폭력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재판 당일 법정에서 '방청운동'을 하며 재판부를 압박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피해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감시해야"

연극뮤지컬 관객들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연극뮤지컬 관객 #위드유 집회>에서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고백에 대한 지지'와 '공연계 성폭력 OUT' 등을 촉구하고 있다.
▲ '#미투 #위드유 집회' 연극뮤지컬 관객들 화났다! 연극뮤지컬 관객들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연극뮤지컬 관객 #위드유 집회>에서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고백에 대한 지지'와 '공연계 성폭력 OUT' 등을 촉구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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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미투 운동에 바라는 점을 묻자 탁씨는 "가해자 처벌까지는 제대로 안 되더라도, 피해자가 보호되고 설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라서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상황을 막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보다는 피해자가 잘 사는 게 중요해요. '피해자'이기 때문에 자리를 더 보장받아야 하죠. 이를테면 미술계 내 성폭력 고발로 고생한 사람들은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강의 자리를 하나라도 더 주면 좋겠어요. 성폭력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살인'이에요. 저도 5년 동안 피해자로서 경제 활동을 하기 힘들었어요."

"지금 폭로하는 분들도 너무 힘들 것 같아요. 폭로한 집단 내에서 싸우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저처럼 경제적인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고, 그 직업을 유지할 수 있거나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국가가 피해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미투 이후에도 피해자의 삶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했다. 피해자가 피해자라는 이유로 문화계 내에서 부당한 평가를 받지 않는지, 일자리를 빼앗기지는 않는지, 좌천되지는 않는지 감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에 대해서도 배려해줄 것을 당부했다.

"저는 올해 정신적인 치료를 끝내는 게 목표예요. 저를 파괴하고자 하는 저에게서 멀어지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있어요."

성폭력 고발자로서, 또 문단 내 성폭력의 활동가로서 현재 미투를 외치고 있는 여성들에게 탁씨는 격려의 말을 남겼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거예요. 아마 미투가 조금 잠잠해질 때쯤 더 외로워질 거예요. 그때 피해자들이 서로 잘 챙겨줬으면 좋겠어요. 위협을 느끼는 만큼 똘똘 뭉쳐있었으면 해요. 그리고 저는 단 한 명이라도 외로움을 안 느낄 수 있도록, 덜어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태그:#미투, #탁수정, #문단_내_성폭력, #책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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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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