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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요셉 보이스전 전시에 앞서 열린 국제세미나 발표자들. 왼쪽부터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인 '그레고르 얀센(Dr. Gregor Jansen)'박사, 하우 아트뮤지엄 윤재갑 관장, 백남준 이론가, 평론가 '김남수', 하우 아트뮤지엄 한국어 담당큐레이터 서천의
 백남준·요셉 보이스전 전시에 앞서 열린 국제세미나 발표자들. 왼쪽부터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인 '그레고르 얀센(Dr. Gregor Jansen)'박사, 하우 아트뮤지엄 윤재갑 관장, 백남준 이론가, 평론가 '김남수', 하우 아트뮤지엄 한국어 담당큐레이터 서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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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요셉 보이스전 견자적 서신(LETTRES DU VOYANT: Joseph Beuys×Nam June Paik(见者的书信:约瑟夫·博伊斯×白南准]전'이 중국 상하이 광동구 원홈 아트호텔이 운영하는 '하우 아트뮤지엄(HOW Art Museum 관장: 윤재갑)'에서 5월 13일까지 열린다. 상하이 주재 독일총영사관과 상하이 주재 한국문화원도 후원했다.

이번 전시제목은 프랑스 시인 '랭보'가 예술가를 가리켜 한 말 '견자·선견자(Voyant)'가 선정되었다. 윤재갑 관장의 아이디어다. 그는 백남준과 보이스(1921~1986)를 20세기 문명사를 깨고 21세기를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예언자(visionary)로 봤기 때문이리라.

백남준전은 하우 아트뮤지엄 1층에서 열리고, 요셉 보이스전은 2층에서 열린다. 1층 전시는 현대무용과 미술을 평론하는 예술이론가 '김남수'가 맡았고, 2층 전시는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인 '그레고르 얀센(Dr. Gregor Jansen)'박사가 맡았다.

이번에 상하이 하우 아트뮤지엄이 주관 하에 난이도 높은 백남준·보이스전시가 열린 건 고무적인 일이다. 이번 전시가 중국·독일뿐만 아니라 한중미술의 교류에도 기여할 것이다. 13억이 인구가 사는 중국에 백남준이 접수되었으니 그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세미나, 개막식 성황리에 열리다

중국 상하이 광동구 하우 아트뮤지엄에서 열린 백남준·요셉 보이스전' 개막식(2018년 1월 19일)에 몰려든 관객들
 중국 상하이 광동구 하우 아트뮤지엄에서 열린 백남준·요셉 보이스전' 개막식(2018년 1월 19일)에 몰려든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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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베이징 '카파CAFA) 아트뮤지엄'에서 '문인희(Iris Moon)' 재미큐레이터의 기획으로 백남준 개인전이 열린 적이 있다. 당시로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9년이 지난 이번 상하이전은 그 규모나 내용에서 많은 진전을 보였다.

개막식 전, 기자간담회와 함께 '국제세미나'도 열렸다. 13명의 한국·중국·독일의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전문가, 교수, 전시기획자, 큐레이터 등이 참가했다. 발표 후 질의응답 시간도 있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윤재갑 관장, 큐레이터 김남수 선생, 그레고르 얀센 박사, 백남준 연구의 선구자인 이용우 교수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가했다.

개막행사에는 상하이에 있는 미술관 관장 30여명을 비롯해 상하이 문화계인사가 대거 참가했다. 독일 총영사관과 한국영사관직원도 나와 축사를 했다. 작년 '사드' 문제로 일정이 꼬여 전시순서가 바꿨으나 한중관계가 풀리면서 준비할 시간을 더 벌었다. 백남준은 언제 어디서나 축제를 일으키면서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백남준 전시는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인 요셉 보이스의 전시가 함께 열려 그 의미가 더 크다. 이번에 소개되는 보이스 작품이 다 이 미술관 소장품이라니 놀랍다.

백남준이 60년대 독일유학 때 지도교수 '포르트너로'부터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평을 들었는데 이번 전시로 백남준이 여기서도 독일처럼 그런 현상을 일으킬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런데 이번 개막식이 끝나기도 전에 그날 중국석간에 벌써 백남준 전시가 대서특필되었다고 윤재갑 관장이 알려준다. 여기서 백남준 인지도 확실히 높아질 것 같다.

전시장 입구에 중국관객에게 독일만화가 '블뢰스(Willi Blöss), 윙거(Bernd Jünger)'가 그린 자료를 나눠주고 있었다. 두 작가의 예술세계를 만화로 푼 중국어판 책자다. 관객에게 소중한 가이드가 되리라. 백남준을 그린 '빌리 블뢰스'는 백남준이 예기치 않게 당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 오히려 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고 그를 높이 치켜세운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백남준과 보이스의 연표와 역대 전시도록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백남준과 보이스의 연표와 역대 전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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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에 미술관 측에서 상단에는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의 시대별 활동을 도표화해놓았다. 그래서 두 작가의 변천사를 한눈에 다 읽어볼 수 있다. 하단에는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의 과거도록도 함께 전시하고 있어 이들의 지난 발자취도 쉽게 더듬어 볼 수 있다.

백남준이 보는 자연과 테크놀로지의 연관성, 플럭서스 활동과 스승인 존 케이지와 관계, 한국 샤머니즘과 색동의 전자화, 모바일과 퍼포먼스 등이 소개된다. 또한 전자미디어의 본령을 보여준 백남준의 위성아트와 거기에 담긴 정신과 예술혼을 즐길 수 있게 했다.

김남수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가 중국미술에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될 것 같다고 평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큰 영향을 줄 거라고 뜻인가 보다. 또 그는 백남준의 첫 전시가 '빅뱅'이었다면 이 전시는 '스몰뱅'이 될 거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설치는 1988년부터 백남준과 같이 일해 온 '이정성' 전자기술자가 맡았다. 그는 한국에서는 설치시간을 너무 짧게 줘 밤샘작업이 많았는데 이번엔 미술관 측 배려로 전시 보름 전에 미리 초대를 해줘 작품을 보다 완벽하게 설치할 수 있어 만족해했다.

나는 서울에서 떠나기 전부터 백남준과 상하이 어떤 인연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이정성 선생을 만나면서 그 답이 풀렸다. 백남준 선생 돌아가기 2년 전부터 상하이전시를 꼭 해보고 싶었단다. 백남준 사후 12년 만에 그의 꿈이 이곳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기가 일제강점기 땐 '상해(상하이)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백남준은 경기중학교 다니다 홍콩의 영국계 학교로 전학했다. 그때 중국어를 배운 것 같다. 그 당시 그가 가장 동경한 중국도시는 상하이가 아닌가 싶다. 여기 와보니 사람들 친절하고 상냥하고 우호적이다. 또 농산물, 해산물이 두루 풍부해 요리천국이기도 하다.

이곳 관장 중 외국인이 10%가 넘는다고 하니 이 도시는 외국인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세계비엔날레 회장이면서 오래 백남준과 함께 활동했던 이용우 선생도 여기 히말라야 미술관 관장이면서 상하이대학 교수이다. 이런 면모가 확실히 상하이를 매력 있게 만든다.

서양미술사를 제로점으로 새로 쓰다

백남준의 '탑(Tower)' 2001년 작품 [위], 보이스의 현무암으로 만든 '20세기의 종말'의 초기버전 1983-1985년 작품 [아래]. 예술이 선사시대 같은 원시상태로 돌아가야 진정 본연의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백남준의 '탑(Tower)' 2001년 작품 [위], 보이스의 현무암으로 만든 '20세기의 종말'의 초기버전 1983-1985년 작품 [아래]. 예술이 선사시대 같은 원시상태로 돌아가야 진정 본연의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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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장에 들어서니 백남준의 '탑(Tower)'과 보이스의 선사시대 '고인돌'을 연상시키는 오브제 작품이 보인다. 하나는 서 있고 또 하나는 누워있어 대조미를 이룬다. 보이스는 이런 작품을 제작할 때 현무암을 주로 사용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노동과 테크놀로지, 물질주의, 정치이념, 산업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라는 미명 하에 인간이 취해온 폭력적으로 황폐화시키는 과정에서 벗어나 재생의 과정을 제대로 실현할 때이다. 자연 뿐만 아니라 생태적 관점에서도 생명을 되살리는 '사회적 유기체'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서 난 이런 현무암이 필요했다"

'뒤샹'과 '워홀'과 함께 백남준과 보이스는 20세기 후반기 가장 중요한 작가다.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중에서도 첨단이었다. 이들은 모더니즘의 순수혈통주의를 넘어 예술에서 '미추'의 구분을 없앴다.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이 기존의 것과 다른 점을 "만약 현대예술이 고등사기라면, 비디오는 5차원의 사기다"라는 말로 유머러스하게 풀이했다.

백남준의 경우를 보자. 그는 자신의 음악적인 미술에 전자체계를 도입했고, 바보상자인 TV도 예술화했다. 또한 기술을 인간화하고 구체적 공간을 추상적 시간으로 바꿨다. 미술의 축을 또한 유럽에서 유라시아까지 넓혔다. 지식과 이성보다는 오감과 영성을 중시하는 샤머니즘을 도입해 선사시대와 첨단의 기술문명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노크하다

백남준 I '푸른 부다(Blue Buddha)' 1992-1998. 전자아트로 재해석한 '붓다'
 백남준 I '푸른 부다(Blue Buddha)' 1992-1998. 전자아트로 재해석한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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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늘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노크한 예술가였다. 그래서 '임의성, 유희성, 우연성, 변통성'을 중시했다. 그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려고 했다. 그런 고심 끝에 나온 것이 비디오아트다. 즉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TV모니터를 캔버스로 삼아 전자붓으로 그리는 방식이다. '전자붓다'도 그런 방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두 예술가는 예술의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했다. 백남준에게는 음악이나 미술이라는 구분조차 없었다. 공간을 채우는 예술보다는 시간 속에 흐르는 예술을 원했다. 그래서 몸으로 하는 퍼포먼스, 이벤트, 해프닝을 중시했다. 고체(hardware)가 액체(software)가 되는 예술을 하려고 했다. 하긴 이게 플럭서스 운동의 근간이 되는 모토이기도 하다.

그리고 백남준은 또한 인간의 영역도 확장했다. 자연도 로봇도 악기도 TV도 다 인간으로 본 것이다. 이번에 선보인 '휴먼첼로'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래서 서구인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예술경전도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래서 선사시대 원점으로 돌아가 서구미술판을 새로 짜려고 했다. 그래야 30세기를 내다보는 미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둘은 똑같이 '문화 민주주의자'였다. 보이스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했고,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관객이 전시의 주인'이라고 선언했다. 보이스는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사회적 조각(Social Sculpture)'을 착안했고, 반면 백남준은 1인 미디어시대와 디지털시대를 내다보면서 쌍방형 '사회적 미디어(SNS, Social Media)'도 고안했다.

이들 예술관은 '무용행(無償行)'이다. 즉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무목적적인 예술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예술을 무한대로 창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음조를 해체한 '쇤베르크'의 '무음악(a-music)'을 좋아했고 '필름을 위한 선' 같은 화면은 있는데 대상이 없는 '무영화(a-cinema)'도 만들었다. 여기서 선(禪)은 무(無)를 뜻한다.

백남준과 보이스 같으면서 다르다

2층 요셉 보이스 전시장 여러 요셉 보이스 초상화 사진(Portrait of Joseph Beuys) 중 하나. 이 사진에 적힌 문장 '그는 은행털이 갱 중의 갱이다(He was the gangsters' gangster DILLINGER)'라는 글귀가 흥미롭다
 2층 요셉 보이스 전시장 여러 요셉 보이스 초상화 사진(Portrait of Joseph Beuys) 중 하나. 이 사진에 적힌 문장 '그는 은행털이 갱 중의 갱이다(He was the gangsters' gangster DILLINGER)'라는 글귀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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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은 '마치우나스'가 창안한 '플럭서스' 회원이었다. 흐른다는 뜻이 있는 플럭서스를 중국어로는 '격류파(激流派)'라고 번역했다. 이들은 기존의 미술을 해체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동서예술가가 같이 참여한 최초의 글로벌 미술운동이다.

2층에 올라가면 '보이스는 플럭서스의 영혼(soul),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마음(heart)'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두 사람이 이 운동에서 큰 몫을 했다는 소리다. 이 선언문에는 "부르주아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시 말해 고급과 저급 따지는 문화 엘리트주의와 그런 속물근성을 없애려 한 것이다.

하여간 백남준과 보이스는 서로 다르면서 같았다. 우선 별명이 닮았다. 독일에서 백남준의 별명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였다면, 보이스는 '서구 미술판을 깨는 문화깡패'였다. 백남준은 서구인이 성상 같은 바이올린을 개처럼 질질 끌고 다녔다. 또한 서구인이 고급문화의 상징으로 여기는 피아노를 불태우거나 때려 부쉈다.

보이스도 마찬가지다. 백남준과 상통했던 그는 백남준 첫 전시장에 와서 피아노를 도끼로 부셔버렸다. 백남준은 그 전시에서 서양미술의 상징인 뮤즈를 욕조에 처박아 살해했다. 이들은 서구문명을 살해하려고 결심한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보이스의 상징은 '도끼'다. 서구인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이곳 평론가로부터 '신야만인'이라고 불렸다.

보이스의 또 다른 상징은 도끼와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토끼다. 그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온순한 토끼와 가까운 친구처럼 소통했다. 보이스는 "완고한 이성주의로 무장한 인간보다 토끼가 현대미술을 더 잘 이해한다"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하지만 우리는 토끼 하면 달이 떠오른다.

2층 요셉 보이스 전시장 여러 요셉 보이스 초상화 사진(무제) 중 하나. 20세기 서구문명의 파괴자로 자처한 그가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2층 요셉 보이스 전시장 여러 요셉 보이스 초상화 사진(무제) 중 하나. 20세기 서구문명의 파괴자로 자처한 그가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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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독일에서 앞뒤가 꽉 막힌 합리주의에 구멍을 내고 다녔다. 그는 서양인이 떨치기 힘든 최고 가치인 이성주의를 가치 없이 파괴했다. 그런 행위가 독일인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신선한 해방감도 주었다. 왜냐하면 독일인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여러 모로 그들의 문화에 대해 성찰하게 했다.

그는 이렇게 엄청난 파괴자였지만 왜 위대한 작가가 되었을까? 파괴 없이 창조 없다고 그가 그냥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을 부수기만 한 게 아니다.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가 그렇게 많은 걸 파괴한 건 결국 비디오아트의 확장인 인터넷을 고안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류는 모두가 백남준의 은하계(Galaxy) 속에 살고 있다.

백남준과 보이스가 이렇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만행을 봤기 때문이다. 보이스는 이런 서구문명의 과오에 대해 처절하게 고해성사했다. 윤재갑 관장은 개막식 전에 열린 세미나에서 요셉 보이스는 서구예술가 중에서 가장 양심적인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보이스가 진지한 편이었다면 백남준은 유머의 귀재였다. 그는 주변 독일인을 잘 웃겼다. 그의 천진한 미소는 그들을 사로잡았다. 백남준의 예술동료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그에 대해 "우린 젊어서 만났다. 그는 대단한 철학자, 음악가, 사상가, 예술가, 행위예술가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1960년대 '장 피에르 빌헬름'은 독일의 전위미술계에서 존경 받는 멘토였다. 그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백남준의 첫 전시에 대해 글을 썼다. 그 서문에서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라는 인상적 문구를 남겼다. 그는 백남준을 음악과 미술마저도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융합시키는 총체예술가로 본 것이다.

여기서 화제를 좀 바꿔보자. 이들을 더 유명하게 한 건 동서를 넘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꽃 피웠기 때문이다. 우연이었지만 그 자체가 예술이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휴먼네트워크'였다. 백남준은 보이스 사후에도 그런 우정을 살려내기 위해 1990년 서울 현대갤러리 뒤뜰에서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을 벌렸다. 이번에 그 사진들도 소개된다.

현대문명의 구원을 샤머니즘에서 찾다

보이스의 퍼포먼스 "나는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절연시켜 코요테 외에는 미국에 관한 어떤 것도 보지 않기를 원했다(1974)"를 재구성한 사진이다
 보이스의 퍼포먼스 "나는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절연시켜 코요테 외에는 미국에 관한 어떤 것도 보지 않기를 원했다(1974)"를 재구성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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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서구 속 비서구였던 보이스는 서구의 야만문명을 치유하려고 스스로 야생늑대가 된다. 그는 인간이 야생동물과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선견자(voyant)'였다. 이런 점에서 "무릇 늑대의 세계에서 더 진보한 게 별로 없다"고 한 백남준 말이 납득이 된다.

이런 주제로 퍼포먼스를 선보인 사람이 바로 보이스다. 그는 1974년 뉴욕에 있는 '르네 블록' 갤러리에서 3일간 늑대와 먹고 싸고 자면서 한판 굿판을 벌린다. 이것은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한 '야생적 사고'를 말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낸 것이다.

이들은 이렇듯 현대문명의 구원을 샤머니즘에서 찾았다. 좀 어리석게 보이나 그 놀라운 생명력이 합리성에 미쳐버린 서구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철학자 'J. 하버마스'가 제창한 '공론장이론(public sphere)'도 결국 소통이 인류의 난제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셔먼은 죽은 자마저도 산 자와 소통하게 하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보이스가 샤머니즘에 빠진 건 남다른 체험 때문이다. 2차 대전 중 독일공군으로 출전했다 전투 중 타타르족이 사는 부락에 추락했다. 이 사람들은 샤먼의 전통치료법으로 그를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이후 보이스도 펠트나 기름덩어리 등을 활용하는 '온기조각'을 창출하게 된다. 그는 샤머니즘을 죽어가는 것도 살려내는 살림과 부활의 예술로 본 것이다.

샤머니즘의 꽃은 '굿'이다. 백남준의 굿에서는 '칼·방울·청동거울' 대신에' TV·피아노'가 들어간다. 전통굿과 다른 '전자굿'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같다. 마을의 공동악인 귀신을 쫓아내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불러오는 제례다. 마을을 확대하면 지구촌이 되고, 굿은 현대화하면 지구촌 축제가 된다. 그런 면에서 굿은 올림픽정신의 기조와 너무 닮았다.

백남준의 이상향, 공존을 통한 세계평화

2015년 가고시안 갤러리(홍콩)에서 낸 백남준 도록에 들어 있는 그의 사진. 80년대 백남준 모습(Nam June Paik 'The Late Style' Catalogue 2015 ⓒ Gagosian Gallery: Hong Kong
 2015년 가고시안 갤러리(홍콩)에서 낸 백남준 도록에 들어 있는 그의 사진. 80년대 백남준 모습(Nam June Paik 'The Late Style' Catalogue 2015 ⓒ Gagosian Gallery: Hong 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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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이상향은 뭔가? 그건 공존을 통해 평화세상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소통이야말로 전쟁을 막는 지름길로 봤다. 이런 걸 '로제타스톤'을 새기듯 5개 국어로 정리한 게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1995)'이다. 여기에 "난 내 핏속에 흐르는 시베리아-몽골리안 요소를 좋아한다"라는 글귀도 나온다. 그의 샤먼적 이상주의를 엿볼 수 있다.

백남준은 소통을 중시한 작가이기에 6개 국어를 배웠다. 그런 지성으로 그는 우리의 문화코드를 찾아 나섰다. 말 타는 습관으로 봐 3천 년 전엔 우리가 '네팔, 만주, 몽골, 터키, 헝가리, 핀란드' 등과도 한 혈통이라고 봤다. 나중에는 페루도 포함시킨다. 결국 백남준은 인류는 하나이며 소통을 통해 화합과 평화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걸 실현하려면 꼭 필요한 게 '네트워킹'이다. 그래서 고민한 점이 바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빠르게 연결시키는 길은 없는가'였다. 바로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서로 연결시키는 '인터미디어'라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70년대부터 여러 나라의 문화콘텐츠를 비디오아트에 담아 전 지구인에게 보여주려 했다. 서로 알고 이해하는 만큼 소통이 잘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참된 소통은 쌍방적이어야 하기에 참여를 필수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아무리 발달해도 집단지성 같은 참여가 없으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온 작품이 '비디오코뮌(1970)'이다. 전자미디어로 위계 없는 코뮌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이다. 이를 더 업그레이드시킨 작품이 '환희에 넘치는 전 지구적 축제'라는 뜻이 담긴 '글로벌 그루브'다. 즉 전 인류가 하나 되어 평화축제를 벌이자는 제안이다.

백남준 I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 1984년 작품. 국경과 경계를 넘어 온 인류는 하나임을 보여준다
 백남준 I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 1984년 작품. 국경과 경계를 넘어 온 인류는 하나임을 보여준다
ⓒ 김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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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백남준은 1984년 전 세계 2500만 명의 시청자를 깜짝 놀라게 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선보였다. 뉴욕과 파리와 서울을 위성을 하나로 연결해 보여준 우주오페라였다. 모두가 한 마을사람이라는 맥루언의 '지구촌'개념을 위성아트로 실현한 셈이다. 이 작품으로 백남준은 대성공을 거둔다. 바로 여기서 인터미디어 즉 '인터넷'개념이 나온다.

그렇게 본다면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에 시작한다"는 그의 선언은 타당하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탈영토제국주의'를 주창했다. 넓은 땅을 차지하거나 다른 나라를 지배하지 않고도 가장 빠른 정보기술(IT)로 최고수준의 지식을 유통시켜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고 또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새천년 첫날에 우리를 격려하듯 비전을 제시한 '호랑이는 살아있다(2000)'를 발표하기도 했다.

결론으로 이번 전시로 한중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백남준이 바라는 '공존을 통한 인류평화'의 정신도 더 진전되었다. 우리가 지금 비록 전쟁과 핵 위험이 가장 높은 분단국에 살고 있지만, 백남준이 이번 전시에서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촛불에서 그랬듯 남북평화와 전 세계 비핵화운동에서도 더 많은 리더십을 발휘해달라는 주문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 하우 아트 뮤지엄(HOW Art Museum) 홈페이지 http://www.howartmuseum.org/
본문 내용에 없는 관련 사진은 슬라이드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태그:#백남준, # 요셉 보이스, # 윤재갑, #그레고르 얀센, #김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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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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