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두 장 넘기다 그냥 빠져든다. 다짜고짜 치부 까발림으로 집필 동기를 밝힌 서문이 흡입력 있다. 본문은 더 매혹적이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의 저자 제사 크리스핀은 그의 자살 충동을 막아주는 죽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현장감 넘치는 세계 인식을 날 것으로 드러낸다. 자기검열에 익숙한 내겐 낯선 글쓰기 방식이다. 그렇기에 언젠가 흉내내고프다.

책표지
 책표지
ⓒ 김유경

관련사진보기


저자는 유럽의 뭇 도시로 옮겨 다니며 두어 달 머물다 떠나곤 한다. 현지 공기를 마시며 거기에 살았던, 혹은 머물던 방황하는 영혼들과 마주하기 위함이다. 예술가(작가들과 화가들과 작곡가들)와 도시를 짝지어 그의 캐릭터가 해당 도시의 특성과 오버랩 되게끔 잡아챈 글쓰기가 걸작이다.

그 느낌이 걸쭉한 건 저자가 자기답게 책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와 도시의 특성으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두 대상에 걸맞게 자기 삶을 버무려 펼치는 주객관성은 까칠하지만 설득력 있다.

내가 아파서 아픈 너를(곳을) 찾아가다
: 윌리암 제임스와 베를린, 노라 바너클과 이자벨 버턴과 트리에스테, 리베카 웨스트와 사라예보

저자는 아프다. 영혼이 늘 편치 않다. 그래서 떠남은 이판사판이지만, 이열치열하게 지평을 넓히며 글쓰는 삶을 꾸려간다. 덕분에 나는 유럽 국가들의 정황 맥락을 귀동냥하고, 익히 알았던 예술가의 전혀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덩달아 나를 돌아보고 들여다본다.

저자는 낙오자들이 몰리는 베를린에서 "바닥까지 몰락"한 체험에 뿌리를 둔 철학을 완성한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인생을 바꾸는 법을 엿본다. 제임스는 자유의지로써 아버지의 억압을 딛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그와 달리 노라 바너클과 이자벨 버턴은 자신의 운명을 남자에게 맡기는 아내 되기를 택한다. 그녀들처럼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여 국명이 여러 번 바뀐 도시 트리에스테의 고요가 저자에게는 지루하다.

저자는 자기다움 대신 야망을 선택해 아들에게조차 비난 받은 리베카 웨스트의 역할을 인정한다. 리베카의 대표작 <검은 양과 회색 매>에는 여자들의 "이름이 있고, 생각과 인생과 욕망이 있"어서다. "세월이 흘러도 폭력의 기미는 여전한" 사라예보에서 먹잇감이기 쉬운 여자의 대답, "계속 걸으면서 어쩌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있어요"에 공감해서다. 주어진 "삶을 버티는 것이야말로 영웅적 행위"니까 그렇다.

출생과 사망 사이에 비상하게 날아오른 사람들
: 마거릿 앤더슨과 남프랑스, 모드 곤과 골웨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로잔

내처 걷기가 주어진 배역에 충실한 삶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서" 주역을 따내는 건 시대에 불복종하는 삶이다.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예술계에 연줄 하나 없었지만", 마거릿 앤더슨은 예술문학잡지 <리틀 리뷰>의 창립자이자 발행인이 된다. T. S. 엘리엇과 제임스 조이스 등 20세기 뛰어난 작가들이 그래서 빛을 본다.

마거릿은 "사회적 용인과 배척을 중심으로 한" 시대의 틀에서는 "원하는 것에 접근을 허가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녀가 미국을 떠나 변방 "남프랑스에서 문학의 마님으로 죽"은 배경이다. 그러나 저자는 "세 권에 달하는 회고록에서 단 한 번도 술에 취해 바닥에서 흐느끼지 않는" 그녀의 회고록을 "정신 나간" 것으로 평가한다. 예술의 가치를 추구하는 출판인이기보다 퀴어로서 사는 생을 택한 그녀에게 맘이 떠서다.

영국 출신의 아일랜드 혁명가 모드 곤은 흑마술사다. 영국군 아버지와 대치되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인생의 통제권을 거머쥔다. 그리곤 무장 투쟁 대신 "오랫동안 아일랜드인의 무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던 무기력과 학습된 무력감의 이야기를 대체할" 새로운 이야기를 윌리엄 예이츠에게서 얻어 "의인화된 아일랜드 또는 위대한 여신이나 여걸로서" 무대에 선다.

그러나 여권이 부재하는 "막달레나 세탁소"가 법치에 속하는 아일랜드의 남성 중심 사회에서 모드는 "아일랜드의 잔다르크"가 될 수도, 아일랜드에서 서사의 변화를 이룰 수도 없다. 예이츠의 "뮤즈가 되기엔 너무 능동적"인 모드가 아일랜드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되 소유물은 프랑스에 두는 삶을 산 이유다.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서사를 위해 주문(呪文)이 필요한 아일랜드에서 저자 또한 서둘러 철수한다.

중립국 스위스는 "언제든지 바깥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요새다. 마녀사냥으로 유럽에서 마지막 사형수를 낼 만큼 폐쇄적이기도 하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프랑스에서 요새로 넘어온다. 그 덕에 자신을 발탁해 스타로 만든 세르게이 댜길례프에게서도 벗어난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서도 "제약의 무게 아래에서 번성"한다.

스트라빈스키는 근처에 있던 악기와 사람을 이용하면서도 한계를 무너뜨리며 스스로를 확장시킨다. 스위스 로잔에서 "그의 가장 성공적이고 대중적인 작품 <병사 이야기>를" 선보인다. <피아노를 위한 가장조 세레나데>는 당시 디스크 녹음의 한계를 고려해 재즈 리듬과 구조를 차용해 변화한 새로운 곡이다. 스위스에서 그는 자기 자신으로 산 셈이다.

중요한 건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 서머싯 몸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진 리스와 런던, 클로드 카엉과 저지 섬

저자에게 동성애자 서머싯 몸만큼 부부의 역학 관계에 대해 회의적으로 접근한 사람은 없다. "사랑받지 못하는 절망을 다스리려면 서머싯 몸이 가이드로 제격이다." 서머싯은 시리와 결혼한 해에 스파이 임무를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자연적인 인구 이동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다. 표트르 대제의 "영역 표시를 위한" 결정과 정신에 토대해선지 지금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부부의 동거가 의무적인 사회규범 하에서 천성을 따르는 동성애는 비정상이다. 게이 서머싯이 이성애자 시리와 결혼한 것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위적이다. 그래서 뿌리가 얕은 결혼생활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곳에서 저자는 몸의 책 <해링턴 씨의 세탁물> 등을 통해 그의 인생을 알아가며, "누구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사랑을 하게 되는 건 아님을 배운다." 그의 실패한 사랑과 인생이 저자의 외로움에는 약이 된다.

저자는 도미니카 연방 출신인 진 리스의 소설을 사랑했다. 하지만 진 리스가 여학생 시절을 보낸 런던에서 그녀의 평전을 읽으며 그녀를 역겨워한다. 진 리스가 병리적 젠더여서 그녀의 여주인공들 또한 수동성과 피해의식과 자기합리화에 골몰해서다. 소설을 포함해 진 리스의 삶 자체가 "길을 잃은 (척 하는) 여자"의 서사라는 신랄한 지적이다. 약한 척 하는 여자들이 직접적으로 가부장제를 공고히 한다는 손가락질이다.

그 반대급부로 저자는 싫어했던 런던을 좋아하게 된다.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도시에서도 개개인의 관점에 따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을 수 있다 여겨서다. 각종 미디어들이 양산하는 도시 괴담에 히스테릭하게 조종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한다는 역설이다. 모험 없이 진짜배기를 겪을 수 없다는 견해에 나도 한 표 던진다.

프랑스 사진가이자 작가인 클로드 카엉은 마르셀 무어와 의붓자매이자 협업자이자 연인이다, 레즈비언 예술가인 두 사람은 초현실주의자들과 아방가르드의 파리를 떠나 저지 섬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독일군을 직접 쫓아내려 점령군의 주머니에 선전물을 집어넣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한다. 그리고 체포당해 사형을 선고받는다.

옆집 숟가락 수까지 아는 타인들로 구성된 작은 공간에 산다는 건, 외부 침입자들을 막는 선택지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이다. 저지 섬에서 유일하게 가시적 저항을 한 두 퀴어 예술가들은 섬 주민들의 입맛에 끼워 맞춘 역사에서 사라진다. 카엉은 사후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괴짜인 셈이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영혼들을 품지 않아 다종생물군을 배양 않는 공동체에서 '나'로서 살아가는 해법을 찾기는 어렵다.

그 해법을 찾아 저자는 모험으로써 삶을 확장한다. 자기답게 맘 편히 살 수 있는 어딘가에 있을 집을 찾으러 늘 나선다.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고 여길 때마다 스스로 움직이며 공포를 쫓아낸다. 결코 타인에 의지해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녀의 동선을 따르며 <죽은 숙녀들의 사회>는 예술가들이 천성대로 못 살도록 한 사회의 정상이 비정상임을 설명한다.

그러나 한편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귀환을 기다리는 페넬로페 서사를 교정하고프면서도 연인을 기다리는 아바타가 필요하다는 양가감정에 휘둘린다. 매번 불시착하는 고통스런 연애 때문이다. 갈등과 클라이맥스까지 갖춰 소설처럼 드러난 그녀의 연애담은, 지금 여기에서 여성으로 사는 게 힘들다는 역설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한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에서 "죽은 숙녀"는 가부장제에 순응해 수동태로 사는 누구나의 삶을 은유한다. 그래서 자기만의 서사를 만드느라 방황하는 영혼들의 "아름다운 실패"를 부각시킨다. 길들여짐이 자신을 갉아먹는다고 여기는 저자의 각진 언행이 내겐 눈부시다. 삶이 곧 글쓰기일 때, 동사(動詞)로 사는 그녀는 내가 취하고픈 덕목이다. 그녀의 외로움이 결코 남 일 같지 않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 - 유럽에서 만난 예술가들

제사 크리스핀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2018)


태그:#죽은 숙녀들의 사회, #제사 크리스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온갖 종류의 책과 영화를 즐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