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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거 재밌어요."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제규가 책을 권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목은 <십 대 밑바닥 노동>, 부제는 '야/너로 불리는 이들의 수상한 노동 세계'. '부려먹기 쉽고 말 잘 듣는' 청소년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 하고 일하는 내용이었다. 제규는 책의 어떤 부분에 끌렸을까. 나는 묻지 못 했다. 끝까지 읽는 게 힘들었으니까.

고등학교 2학년 여름, 1년 넘게 식구들 저녁밥을 짓고서 맞는 방학. 제규는 뜻밖의 포부를 밝혔다. 식당에 가서 직접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늦잠도 자고, 게임도 실컷 하라고 설득했다. 제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논쟁을 지켜보던 남편이 중재안을 냈다.

"요리학원에 가서 배우면 되지."

학원에 다닌 제규는 한식, 일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고3 여름방학 때부터부터 시작한 알바.
제규는 일 하는 거 재밌다고 했다.
 고3 여름방학 때부터부터 시작한 알바. 제규는 일 하는 거 재밌다고 했다.
ⓒ 고영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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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고등학교 3학년인 제규는 "알바 구했어요"라고 통보만 했다. 우리 식구들은 가지 않는 대형마트의 푸드 코트에서 일한다고 했다. 김밥을 말고, 떡볶이와 우동을 만들고, 순대를 써는 일이 재미있나? 물어보면 대답은 똑같았다. "일 하는 거 좋아요." 하지만 사장님한테 혼났다고 시무룩해서 돌아오는 밤도 있었다.   

개학하고도 알바는 계속 했다. 학교 끝나면 장을 보고 (친구들이랑) 집으로 와서 음식을 해먹던 일상은 달라졌다. 정규수업 끝나고는 바로 일터로 갔다. 일주일에 나흘, 오후 6시에서 10시까지 일을 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하는 친구한테 사정이 생기면 '대타'를 뛰러 갔다. 어떤 때는 너무 고단한지 주말 내내 잠만 잤다.  

"으하하하! 엄마, 월급 받으니까 엄청 좋아. 최저시급이 6470원(2017년 최저임금)이거든요. 나는 7000원 받아요. 일이 빡센 데는 원래 사장님들이 조금씩 더 줘요."

나는 쓸 데 없는 걱정을 했다. '첫 월급 탔다고 우리 아들이 빨간 내복 사오면 어떡하지?' 제규는 동생 꽃차남에게 큐브를 선물해 주었다. 마침 생일을 맞은 아빠한테는 속옷 몇 장. 나한테는 "엄마도 두 달 뒤에 생신이니까 기대하세요" 하고 끝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20만 원짜리 레고를 샀다. 오호라, 인생을 아는 남자일세!

평생 육체노동자로 산 우리 엄마는 "출근한다"는 말을 쓴 적 없다. "일 간다"고 했다. 제규도 알바 갈 때는 "일 가요"라고 말한다.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 보내라고 하고 밤에 올 때는 이것저것 사왔다. 가끔씩은 사장님이 싸준 떡볶이와 순대를 가져왔다. 식탁 위에 캔 맥주까지 차려놓고는 "엄마!" 하고 불렀다. 안 먹을 거라고 하던 나는 굴복했다.

"엄마, 봉투에 못 넣어서 미안해요. 추석 때 돈 많이 들잖아요. 이거 보태 쓰세요."

명절 하루 전날 밤, 제규는 돈 5만 원을 줬다. 남편한테도 똑같이 줬다. 10만 원은 제규가 14시간 30분간 일해야 버는 돈이었다. 요리대회 재료 값 30만 원도 스스로 번 돈으로 냈다. 제규와 친구 준혁이는 대회 나간다고 우리 집에서 며칠 밤을 샌 적 있다. 밤새 음식 만들고, 치우는 게 뭐가 그리 재밌나. 아이들이 킥킥킥 웃는 소리가 안방까지 들렸다.

제규 친구 준혁. 우리 집에 와서 요리대회 준비를 했다. 밤새 만들고 먹고 치우는 게 뭐가 그리 재밌을까. 안방에서 자다가 아이들이 웃는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 준혁 제규 친구 준혁. 우리 집에 와서 요리대회 준비를 했다. 밤새 만들고 먹고 치우는 게 뭐가 그리 재밌을까. 안방에서 자다가 아이들이 웃는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 강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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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밤, 제규는 길에서 중학교 때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키가 훌쩍 자란 제규를 못 알아봤다. 둘은 중학교 때 어울려 놀던 추억을 소환했다. 그때처럼 놀아볼까. 선배와 제규, 또 다른 친구는 대학입시 끝나고 오사카와 교토 여행을 가기로 했다. 왕복 항공권을 예약하고 도심에서 7.2km 떨어진 곳에 숙소도 정했다.   

"제규야, 다 해서 얼마 나왔어? 네 계좌로 보내줄게."
"나도 돈 버는데 왜 엄마 돈을 받아요?"

제규는 수능 끝나고 학교에 안 나갔다. 알바 쉬는 날에는 밤새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봤다. 필요한 돈은 벌어서 쓰고, 밥을 차려서 식구들까지 다 먹이고, 아빠가 바쁘다고 집 청소도 맡아했다. 동생 꽃차남을 데리고 동네 햄버거 집이나 장난감 가게에도 갔다. "내일 학교 가려면 일찍 자라"는 내 잔소리가 빠진 집안은 평온했다.

맛있는 음식 먹어보는 게 공부인 아이들. 엄마가 사주는 게 당연한데 신세 많이진 사람한테 하는 것처럼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지 좀 말자.
 맛있는 음식 먹어보는 게 공부인 아이들. 엄마가 사주는 게 당연한데 신세 많이진 사람한테 하는 것처럼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지 좀 말자.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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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와 준혁이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공부.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전에 있는 레스토랑 '뉴욕부엌'에 갔다. 오너 셰프 김인혜씨는 대학 4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10년간 요리를 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먹기 힘든 미국음식을 만든다. 언젠가 자기 음식점을 갖고 싶은 제규와 준혁이는 공손한 태도로 레스토랑의 주방을 구경했다.

밥 먹고 군산으로 돌아오는 길. 제규와 준혁이는 신세진 사람처럼 내게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울컥했다. 돈 귀한 줄 아는 아이들은 돈을 쓸 줄도 안다. 크리스마스라고, 준혁이는 2만4000원짜리 아이스크림 케이크 4개를 제규와 친구들한테 보냈다. 참아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말라는 잔소리를 했다. '쓰려고 돈을 번다'는 아이들은 말했다.

"근데 스무 살 되니까 보호막이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일본 미식 여행을 간 제규가 보내온 사진. 주방에서 혼자 일하는 주방장 사진을 두 장 보내왔다. 우리 아들의 미래일 수도 있겠지.
 일본 미식 여행을 간 제규가 보내온 사진. 주방에서 혼자 일하는 주방장 사진을 두 장 보내왔다. 우리 아들의 미래일 수도 있겠지.
ⓒ 강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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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제규는 예정대로 오사카로 갔다. "사진 좀 보내." 나는 독촉했다. 시장에 진열된 생선과 야채, 음식점들, 도로를 지나는 사람들 사진이 날아왔다. 사진 속 제규는 하얀 비닐봉지 하나를 덜렁거리면서 이국의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가늠해본 건가. 주방에서 혼자 일하는 요리사의 등 사진은 두 장을 보내왔다.  

일본에 같이 갔던 제규의 선배와 친구는 엿새 뒤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교토에 혼자 남은 제규. 도쿄로 올라가서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교토에서 도쿄 가는 버스비는 약 5만 원, 신칸센은 약 12만 원. 7만 원 차이였다. 제규의 선택은 빤했다. 싼 게 좋겠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신칸센 타. 엄마가 돈 줄게"라고 매달렸다. 

스무 살 청년에게도 사치의 기준이 있다. 몇 십만 원이 넘는 피규어를 사고, 어떤 브랜드의 오리지널 운동화와 청바지는 사도, 고속열차는 못 탄다. 비싸니까. 나는 플랜 B를 제시했다. 도쿄로 가는 비행기는 8만 원이라고. 그날 밤, 제규는 도쿄의 나리타 공항에 내렸다. 저녁을 먹고는 캡슐호텔이 있는 2터미널로 갈 거라고 했다.

캡슐호텔은 예약제. 무턱대고 찾아간 제규는 묵을 수 없었다. "노숙 해보고 싶었는데 잘 됐어요. 돈도 아끼고요." 애 타는 사람이 방책을 마련한다. 나는 공항에서 1.4km 떨어진 호텔방을 예약했다. "제규야, 못 물러. 엄마는 취소하는 방법을 몰라." 부모 말을 안 듣도록 설계된 아들은 자정 직전에 트렁크를 끌고 호텔까지 걸어갔다. 택시비가 아까우니까.

"엄마! 얼마짜리 방이에요? 너무 좋아. 침대도 두 개야. 근데 돈 아깝게 왜 그랬어요?"   

소년 노동자의 장부. 일한 만큼만 받는다. 그러니 나름의 사치와 검소함의 기준이 있고, 별 거 아닌 일에도  "돈 아까워"라는 말을 잘 쓴다.
 소년 노동자의 장부. 일한 만큼만 받는다. 그러니 나름의 사치와 검소함의 기준이 있고, 별 거 아닌 일에도 "돈 아까워"라는 말을 잘 쓴다.
ⓒ 강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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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는 "돈 아까워"라는 말을 잘 한다. 그날그날 일한 시간을 적어놓은 알바 장부를 보면, 아이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일한 만큼만 받는 월급. 가장 많이 받았을 때가 70만 원 대였다. 알바를 해서 학비를 벌려면 엄청나게 일해야 한다면서 "엄마, 대학 등록금이랑 기숙사비 걱정 안 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라고 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8년 올해 최저시급은 7530원. 제규는 7700원을 받는다. 남들보다 조금씩 돈을 더 주는 사장님도 가끔은 '후려치기'를 한다. 손님이 없으면 먼저 들어가라고 한다. 제규는 이해한다. "막상 나도 사장 되면 그럴 지도 몰라요." 하지만 금방 바로잡았다. 자기는 식당을 차려도 테이블 여섯 개만 놓고 혼자 할 거란다. 알바 고용할 걱정은 않는다고 했다.

제규는 6개월간 한 알바, 준혁이는 고등학교 3년 내내 했다. 지금은 소고기 무한리필 집에서 일한다. 평일에는 오후 5시부터 11시 반까지, 주말에는 꼬박 12시간 근무를 한다. 시급은 8000원이다. 조리학과를 졸업하고 가게를 차린 사장님은 준혁이를 총애한다. 퇴근할 때는 집에 태워다주거나 택시비를 따로 준다. 

제규한테 비싼 음식 많이 사먹으랬더니 보내온 사진.
 제규한테 비싼 음식 많이 사먹으랬더니 보내온 사진.
ⓒ 강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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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준혁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여름방학 때처럼, 약속만 잡으면 점심을 같이 먹을 줄 알았다. 웬걸! 준혁은 나중에 스테이크 전문점을 차리고 싶다. 고기 손질을 잘 하고 싶다. 그래서 출근시간보다 일찍 나가서 일을 배운다. 그래도 준혁은 낭만을 아는 청년. 사장님한테 휴가를 받고 친구들과 일본 미식여행을 갔다. 나한테는 카톡으로 답을 해왔다.

"저는 일을 선택할 때 기준이 '하고 싶은가'예요. 일을 하면서 '돈 말고 얻는 게 있는가'도 따지고요. 그렇게 일하니까 힘든 거는 못 느껴요. 요리 대회도 제가 하고 싶은 열정이 있어서 피곤하고 힘든 것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생 신분인데 수입이 있다는 거 자체가 자신감을 줘요. 생활에 안정감도 주고요.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어서 뿌듯함도 느끼고요. 대학은 전액장학금을 받고 갔어요. 교수추천장학금과 국가장학금 합쳐서요."

고등학생 때부터 노동자였던 아이들. 하대하는 사장님을 만난 적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하는 재미를 알고 자부심을 가졌다. 제규는 "일 끝나면 음악 들으면서 걸어와요. 그 시간이 진짜 좋아.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라고 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일은 계속 할 거란다. 부모님한테 용돈 달라고 손 벌리는 일은 좀 부끄러운 것 같다고. 

한 달 전, 아이들과 우연히 들렀던 군산 구시가의 '화교역사박물관'이 생각난다. 원래는 '용문각'이라는 오래된 중국음식점이었다. 주인은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 2세대. 일흔 살이 넘어서 음식점을 그만두었다. 월세를 내놓으면 100만 원도 더 받는 가게를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무료로 개방한다. 아이들에게 중국옷을 입혀주고 중국 장난감을 들려주는 노부부의 웃는 얼굴이 환하고 순했다.

제규와 준혁은 어떤 얼굴의 요리사가 될까. 대학을 졸업하고 식당에 고용된 요리사로 일해도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수십 년간 밥벌이를 해온 나는 체념을 빨리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미래를 말할 때는 기개가 꺾이지 않는다. 많이 웃고, 맛에 대한 호기심이 열려있고, 근육운동을 해서 등도 넓고, 피규어도 사랑하는 성정이 훼손되지 않는 요리사로 살면 좋겠다.

어느새 스무 살 청년. 하얀 비닐 봉지 하나만 들고 다니는 일본 여행. 너무 비싸니까 신칸센은 못 타지만 피규어는 아주 많이 샀다. ㅋㅋ  미식여행이니까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어느새 스무 살 청년. 하얀 비닐 봉지 하나만 들고 다니는 일본 여행. 너무 비싸니까 신칸센은 못 타지만 피규어는 아주 많이 샀다. ㅋㅋ 미식여행이니까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 강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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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최저 시급, #내 가게를 갖는 것이 꿈이오, #일본 미식여행, #여행비는 스스로 번 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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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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