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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명절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여자의 명절’과 ‘남자의 명절’, ‘부부의 명절’ 기획을 통해 어떻게 하면 보다 성평등한 명절을 보낼 수 있을지 모색해 봅니다. [편집자말]
할아버지는 그 시대에 흔치 않은 외동 아들이었다. 유독 자식, 아니 아들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아빠는 7남1녀 중 셋째였고, 엄마는 셋째 며느리가 되었다. 사촌들까지 모두 모이면 북적북적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할아버지는 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좋아해서 명절, 생신, 제사 외에도 가족 여행과 같은 행사를 많이 만들었다. 가족의 우애를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두었고, 가족의 화목을 도모할 수 있는 일에는 돈을 아낌없이 썼다. 또 그렇게 가르쳤다.

엄마는 셋째 며느리지만 명절만큼은 맏며느리 몫을 했다. 첫째 큰아빠는 서울에 살았고, 어차피 성묘를 위해 시골에서 모여야 하니 선산 바로 밑에 있는 우리 집이 명절 집합소가 된거다.

가족애를 강조한 할아버지 교육 덕분인지 내 어릴 적 명절은 축제였다. 명절이 다가오면 늘 설렜다. 아빠의 형제분들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갖가지 장난감이며 여러 가지 맛난 것들이 가득 찬 과자선물세트를 들고 왔고, 용돈도 두둑이 주고 갔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 언니, 오빠들과 신나게 놀았고, 맛난 음식과 새 옷이며 새 장난감이 넘치는 명절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명절이 끝나면 다음 명절이 기다려졌다.

며느리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며느리의 해방을 위해 F급 며느리를 자처하며 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사진은 영화 'B급 며느리' 스틸컷).
 며느리의 해방을 위해 F급 며느리를 자처하며 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사진은 영화 'B급 며느리' 스틸컷).
ⓒ 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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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며느리가 되고 나서야 명절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나는 올해 결혼 7년차가 되었다.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며느리들의 삶을 실감나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가족들의 화목 유지를 위해 여성인 며느리들의 양보와 희생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가족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챙기는 건 내 몫이었고, 연휴가 시작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남편의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는 것으로 명절을 맞이했다. 누군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편 조상님들의 차례상을 차리기 위해 날 낳고 키워주신 우리 친정아빠의 차례상은 차리지 못했다.

엄마와 남동생 단 둘이 쓸쓸한 명절 아침을 보낼 생각을 하면 늘 마음 한편이 쓰렸지만 내가 한 여성에서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참아야 했다. 직접 경험한 며느리의 삶은 슬펐다. 그동안 축제처럼 즐겼던 명절이 불편한 기억으로 바뀌었다.

장난감과 용돈이 주는 기쁨의 대가로 나는 불평등을 학습했다. 며느리는 명절이 되면 당연히 남편의 집에서 남편의 가족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30년에 걸쳐 배운 것이다. 엄마는 몸소 실천했고, 나는 그런 엄마를 통해 세뇌 당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학습된 역할은 쉽게 바뀔 리가 없었다.

내가 명절에 시댁을 안 가고 아빠 차례상을 함께 준비하겠다고 하면 친정엄마조차도 이해를 못하고 호통 쳤다. 말이 안 된다는 거였다. 결혼한 딸이 엄마의 명절 준비를 돕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괜찮다고. 시댁 명절 잘 보내고 천천히 오라고 했다.

나를 낮출 것(잊을 것). 갈등을 유발하지 말 것. 순종할 것. 며느리가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명절은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가부장 문화의 결정판이다. 분명 잘못되었다. 그러나 사소한 성차별에도 분노하며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는 나도 명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양가 어른들, 남편, 아이들이 다 얽혀 있는 문제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똑 부러지게 잘 따질 것 같은데, 왜 못해?"

평소 나의 '전투력'을 잘 아는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명절을 보낼 때마다 사위와 며느리의 간극을 극명하게 느끼며 분노했지만 어디서도 따지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불만의 말들은 돌덩이가 되어 가슴에 쌓였다. 

"도대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어! 짜증나!"

같은 여자면서도 철저하게 남성중심의 사고를 하는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가 안타깝고 답답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이 왜 그러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가부장 사회의 최대 피해자일 뿐이다.

자신을 돌아볼 겨를 없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어머님들. 남편의 가족들을 위해 본인의 가족들은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살아온 어머님들. 남자들의 맛있고 배부른 식사를 차리느라 본인들은 뒤늦게 다 식은 밥을 먹으면서도 괜찮다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어머님들.

여성을 향하는 온갖 차별과 편견을 다 견디며 혹독한 시대를 살아낸 어머님들. 남성에게 유리한 사회를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딸보다 아들이 더 중요하다고, 더 든든하다고 믿으며 남성우월 의식을 떠받치며 살아온 어머님들.

어머님들을 탓해서 무엇하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적응하며 살아온 분들의 치열했던 삶을 모욕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해방을 위해 F급 며느리를 자처하며 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분들 앞에서 만큼은 겸손해지는 것. 억압받고 차별받으면서도 자식들만 바라보고 모진 시대를 참아낸 어머님들의 삶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시어머니나 친정엄마가 아니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자들끼리 싸우는 건 너무 슬프지 않나.

나의 해방만이 아닌 어머님들의 해방을 돕기로 했다.

혁명보다는 진화

남편의 노력은 견고하던 남성중심 질서에 작은 균열을 내고 있었다
 남편의 노력은 견고하던 남성중심 질서에 작은 균열을 내고 있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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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내가 당신 집에서 손님 대접 받으며 일 안 하는 것보다 어머님의 노동량이 줄어드는 게 중요해. 내가 안 하는 만큼 어머님이 더 하셔야잖아. 어머님의 노동량이 줄어들지 않으면 내 마음은 계속 불편해."

남편을 부추겼다. 명절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성차별적이고 문제가 많은지 끊임없이 말했다. 명절만 되면 내 자존감이 얼마나 낮아지는지 미묘한 불쾌감을 이해시키려 했다. 우리 아이들이 지켜보며 남성 우월 문화를 배우고 있다는 말도 했다. 

부부를 동등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남자 집안을 우선시 하는 것.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해 '서비스' 하는 것. 성역할 고정관념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 이걸 계속 반복하며 남성중심의 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 남편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미안하다며 작은 실천을 약속했다(남편집의 차례를 위해 여자인 내가 친정아빠의 차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나의 답답함과 찝찝함을 무시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남편 입장에서 당연하던 일을 의심하고 질문하기 시작한 인식의 변화는 명절 풍경에 긍정적인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연휴의 시작은 당연히 시댁 먼저 향하여 2박3일을 보낸 후 친정으로 갔는데, 최근 명절에는 형식적으로 단 몇 시간만이라도 친정에 먼저 들렀다. 친정엄마에게 명절 인사를 드리고 아빠 차례상에 필요한 물건을 함께 장보거나 집안 청소를 돕고 난 후에 시댁으로 향했다.

친정에 잠시라도 들렀다 가면서 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고, 아이들의 기억에 '명절=엄마(여자)의 집안이 뒷전이 되는 날'이라는 공식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

새벽에 어머님이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면, 남편이 나갔다. 상을 펴거나 반찬을 나르고, 설거지 하는 일에도 남편이 나섰다. 매 끼니 집에서 챙겨 먹지 않도록 외식을 유도하거나 통닭을 사왔다. 친정 모임에서도 밥을 하거나 요리를 하며 함께 했다. 남편은 여성들끼리 나누던 명절 노동의 총량을 적극적으로 나눴다.

남편의 노동으로 어머님 노동이 줄었고, 내 마음도 편해졌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가족들도 차츰 적응해가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남편의 노력은 견고하던 남성중심 질서에 작은 균열을 내고 있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성장한 우리 아이들은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차례를 없애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각자의 집으로 가서 따로 명절을 보내거나 하는 식으로 혁명적이지는 못해도 우리의 명절은 기존 질서 속에서 아주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그럴수록 내가 느끼던 부당함과 불편함도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 작은 균열은 큰 변화의 시작이 되리라 믿는다.

'모두가' 함께 즐거운 명절

명절은 조상을 기리는 의미도 있지만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각박한 현실에 온기를 회복할 기회이기도 하다. 참 좋은 의미가 있는 날임은 분명하다.

나는 명절을 좋아하고 싶다. 시댁이건 친정이건 자주 만나서 우애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가족공동체가 얼마나 좋은지, 든든한지 경험한 덕에 가족주의를 비판하고 싶지도 않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따뜻하다.

그러나 내가 물려주고 싶은 공동체의 모습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모두 함께 즐거운 모습이지, 남성 중심의 가부장 공동체 문화는 절대로 아니다. 명절이 끝나면 다음 명절을 기다리던 내 어린 시절의 행복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하지만 그 기쁨이 여성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찝찝했던 그 기분은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다.

우리 사회가 상식적이고 평등해지길 바란다면, 일상의 당연해 보이는 모습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백 년 내려온 관습이 하루 아침에 바뀌기는 어렵다. 아주 작은 변화도 큰 갈등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시도하면 좋겠다. 가족들과 즐거운 명절 보내라는 인사에 여성들의 즐거움이 빠지지 않는 명절. 여성들의 희생과 양보를 당연시 하는 문화가 아닌 존중과 배려를 배울 수 있는 명절로 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모두가' 함께 즐거운 명절의 기쁨을 남겨주고 싶다.


태그:#명절, #성차별, #남편, #시어머니,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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