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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검사인 서지현 검사가 방송에서 자신이 피해 입은 성추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후 이재정 국회의원, 임은정 검사가 '#미투(me too)'에 동참하면서 8년, 13년, 15년 전 이야기가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최영미 시인이 카메라 앞에 앉았다. 그녀는 문단 내 만연한 성폭력 문제와 입증할 수 없는 불이익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참에 시인도 검사도 뭐도 아닌 나도 #미투에 동참해 본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미아리 큰외삼촌 댁에서 엄마랑 남동생이랑 며칠 머무르고 있었었는데, 엄마가 동네 피아노 학원에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4호선 미아삼거리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가는 길은 자주 다녀서 어렵지 않았다. 지하철 몇 번째 칸에서 타야 빨리 환승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일은 길이 아닌 사람에게서 생겼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동대문운동장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탔다. '푸시맨'이 있던 시절이고, 환승역이어서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몇 정거장 있다 내려야 하는지 안내 방송에 집중하고 있는데, 옆구리 쪽에 낯선 손이 느껴졌다. 손은 내 청바지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바지 주머니도 아니고 돈도 없는데... 왜 그러지?'

이해할 수 없고 무서웠지만 막았다. 몸을 비틀어 자세를 바꾸고 팔꿈치로 옆구리를 감쌌다. 그리고 다음 역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내렸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웬 아저씨가 의자 옆 계단으로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낯선 손의 주인이 누군지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양복을 입고 뛰어가고 있는 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을 몇 대 보내고 다시 지하철을 탔다. 외삼촌 집에 도착해 엄마에게 말했다.

"그런 거 아냐."

난 당시 그 아저씨가 하려고 했던 행위 의미도 몰랐고, 그냥 무섭기만 했다. 엄마가 말한 '그런 거'가 뭔지 모른 채로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2년 전 어린이 책모임에서 '성추행, 성폭력' 관련 책을 읽고 토론했다. 40대 전후반 주부들 13명 정도가 모인 그날 토론을 하다 누군가 자신이 당한 성추행 경험을 이야기했다. 뒤로 성추행 관련 경험담이 이어졌다. 나도 지하철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말해도 괜찮아> 내지
 <말해도 괜찮아> 내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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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참석 자 중 한 둘을 제외하곤 모두 성추행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동안 당할 '뻔 한' 일이라며 한쪽에 묻어뒀지만 나만의 독특한 경험, 수치스런 경험이라고 생각한 일이 이렇게 일반적인 일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리 주위에 성추행이 만연한데 왜 알려지지 않고 피해자 혼자 숨겨야 할까? 검사처럼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일도, 꽃뱀으로 취급 받을 일도 없는 어린 나이에 성추행 당했는데, 왜 '그런 거 아닌' 일로 묻어야 할까?

여기 1991년에 9살 나이로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백한 소녀 제시가 있다. 다섯 살에 대부인 삼촌에게 성폭력을 당한 제시는 자신의 경험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 <말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냈다.

"삼촌은 내게 무언가를 억지로 하게 했어.
나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어!
내 팔과 다리, 그리고 내 몸의 소중한 부분을 아프게 했어.

나는 "싫어요!"라고 말했어.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대부에게 성폭력 당하고 말하지 말라는 협박을 당한 제시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 부모에게 용기를 내 말했다.

"말을 끝내고 보니,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보였어.
내가 말해 줘서 기쁘다고 하셨어."


 <말해도 괜찮아> 속 내지
 <말해도 괜찮아> 속 내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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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해도 괜찮아> 속 내지
 <말해도 괜찮아> 속 내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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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시는 전문 상담을 받았고 경찰은 대부를 체포했다. 어릴 적 그 일이 아직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극복해 나가는 중이라고 한다. 극복하는 방법을 말해 주며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라고 한다. 도와 줄 거라고, 믿어도 된다고.

이 책은 성폭력 피해를 당하는 과정과 협박 당하는 과정,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때 필요한 용기와 도움이 어린 아이 시선으로 담담히 그려져 있다. 성폭력이나 성추행은 숨길 일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내 도움받고 이야기해야 할 일이라고 제시는 이야기한다.

제시가 용기를 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는 자기처럼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다. 그 아이들에게 '너 혼자만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야'라는 걸 이야기해 줌으로써 성폭력 피해자들이 수치심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다.

성폭력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역학 관계 중 하나가 '비밀'이다. 가해자가 말하지 말 것을 요구하거나, 피해자가 사실을 밝혔을 때 받게 될 사회 시선이 비밀을 만든다. 이러한 고립은 성폭력으로 발생한 고통과 혼란을 악화 시킨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말하고 나니 너도나도 그랬던 일. #미투가 이어지고 있지만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당시 피해자들은 비밀을 지켰고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성범죄를 다룰 때 피해자 중심이다. '안근태 전 검사 성추행 사건'인데 '서지현 검사 성추행 사건'이라고 한다. 피해자만 주목받는 이런 시선이 그들을 더욱 숨게 만든다.

다른 범죄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교육한다. 그런데, 성폭력 예방교육에선 피해자 중심 교육이 이루어진다. 제시는 "싫어요"라고 자기 의사를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가해자는 상대가 거절 의사 표시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을까?

현재 이루어지는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는 피해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친다. 이는 결국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조심하지 않아서 범죄 대상이 됐다고 말하는 꼴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 외에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 구조 문제와 시선에도 맞서야 한다.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사회 구조와 사회 정서로 많은 피해자가 포기하고 비밀을 지킨다. 가해자는 숨고 피해자만 드러나는 성폭력 문제를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검사와 시인이 카메라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꺼내 #미투가 이어지다 보면 <말해도 괜찮아> 제시가 말한 것처럼 '나만 당한 일'이 아니게 된다. 가해자를 드러낼 수는 없어도 피해자에게 "괜찮아"라는 메시지는 전할 수 있다.

일상이 된 우리 사회 성폭력을 낯설게 하기 위한 "말해도 괜찮은 #미투"를 외쳐본다.


말해도 괜찮아 - 성폭력 피해를 입은 어린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제시 지음, 권수현 옮김, 문학동네어린이(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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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에디터만 아는 TMI'를 연재합니다.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 2019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하는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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