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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3일 오전 11시 20분]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왜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는지 물으면,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 까마라 대주교

까마라 대주교는 브라질의 로마가톨릭교회 대주교이자 해방신학자이다. 박성율 목사는 왜 자신의 트위터 대문에 이 글을 올려놨을까. 어쩌면 자신의 경험담을 써 놓은 건지도 모른다. 박 목사는 '왜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는가?'라는 질문에 이어 "왜 가난한 농민들이 국가에게 땅을 강제로 빼앗겨야 되나?"고 묻는다. 대대로 살아온 내 땅을 국가가 빼앗아 골프장을 만드는 '자본'에게 주냐는 것이다.

박 목사는 청와대 앞에서 155일째(2018년 1월 4일 현재)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왜 목사가 토지 강제수용을 반대하는 싸움에 온 힘을 쏟고 있을까. 박성율 목사의 삶을 따라가 본다.
155일째 1인시위하고 있는 박성율 목사(2018년 1월 4일 현재)
▲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하고 있는 박성율 목사 155일째 1인시위하고 있는 박성율 목사(2018년 1월 4일 현재)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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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박성율

박성율은 1963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거기서 살다가 아버지가 도자기 일을 하러 이천으로 나가면서 온 식구가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도자기의 명인 토정 홍재표씨와 함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했다. 박성율은 이천 신둔초등학교를 나와, 북중학교, 북고등학교를 다녔다. 말썽은 피웠지만, 공부도 잘했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범생'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중학교 3학년 때 코난 도일의 소설 <황금딱정벌레>에 나오는 암호를 흉내 내어 친구들한테 보냈다가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일이다. 아마 가장 어린 나이에 대공분실을 경험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조사를 끝내고 안기부 직원들은 허탈해했다. 집에 돌아오니 온 식구가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건 외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재수 없는 스타일? 실컷 놀면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 하하" 박성율은 그 말을 하면서 민망해했다. 박성율은 장로인 아버지를 따라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모범생, 한마디로 성실한 '교회 오빠'였다. 기타도 잘 쳤다. '기타 잘 치는 잘생긴 교회 오빠.' 그 당시 인기가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 교회 오빠를 따르는 여학생들 중 한 명이 지금 아내인 백향숙씨다. 백씨가 어릴 때를 회상한다.

"저는 중3 때 이천으로 이사했어요. 엄마가 짜장면 집을 하려고. 근데 교회 다니는 친구가 전도해서 교회를 나갔어요. 엄마는 불교 신자였거든요. 호기심으로 처음 교회에 간 날 오빠를 만났어요. 잘생긴, 기타 잘 치는, 멋있는 교회 오빠였어요. 그다음부터 열심히 주님을 만나러 다녔죠."

박성율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불합리하게 행동하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교회에서 주일 성수를 해야 구원받고 천국을 보장받는다고 했다. 주일 성수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지옥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모두들 주일예배 끝나고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박성율이 보기에 심각한 위선이고 지독한 모순이었다. 종교 개혁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신학교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박성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지원했다. 당시 학장이었던 변선환 목사가 박성율에게 왜 신학대학을 오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박성율은 "한국 교회가 썩었다고 생각해 종교 개혁을 하려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변선환 목사는 "허허허, 그놈 참. 허허허" 하고 웃기만 했다.

목사가 된 박성율

박성율은 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부터 여주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준회원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 동생'이었던 백향숙씨와 결혼식도 올렸다. 여주에서 평범한 목회를 하면서 살았다. 농민들과 같이 모내기하고 밥 먹고 어울리며 살았다.

어느덧 9년이 흘렀다. 그즈음 박 목사 아버지가 다니는 교회 목사의 장로 한 분이 박 목사를 찾아왔다.

"박 목사, 이런 시골에서 처박혀 있지 말고 도시로 나가 목회를 하면 어떻겠나?"

박 목사는 도시 목회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1998년에 성남에 있는 OО교회의 부목사로 옮겨 갔다. 교인 수가 수만 명이나 되는 큰 교회였다. 그런데 금방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가 아니더라, 기업이지. 교회라고 하기에는 비리가 너무 심각했다."

교회 담임목사는 아랫사람들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박 목사는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했다. 무엇보다 교회가 영적인 느낌, 신앙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담임목사가 박 목사 같은 젊은 목사를 부목사로 불러들인 건 아들에게 세습하는 과정을 중간에 세탁하기 위해서였다. 젊은 목사들이 그렇게 이용당하다가 하나둘씩 다른 교회로 쫓겨났다.

박 목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날 담임목사는 목회 시간에 박 목사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고 발표해 버린다.

"박 목사는 다음 주부터 충남 홍성에 있는 교회로 가게 됐습니다."

황망했다. 가장 추웠던 1월,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박 목사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충남 홍성으로 이사를 갔다. 눈물이 나왔지만, 아내와 아이들한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의 시골 교회인데 신도가 40여 명 있었다.

당시 박 목사는 몸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전에 있던 교회 담임목사한테 인격적인 모독을 받으면서 참고 산 게 문제가 됐다. 화병인가,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까닭도 없이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런 몸으로 목회를 하니 신도들에게 미안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때마침 알고 지내던 연세대 은준관 교수한테서 연락이 왔다. '실천신학콜로키움'에 참여해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박 목사가 연세대 대학원 진학을 문의했더니 은준관 교수는 다른 것을 권유했다.

"학교를 만들려고 해. 한국 교회가 썩어도 너무 썩었어. 영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신학교를 만들면 좋겠어."

은준관 교수가 꿈꾸는 건 신학대학원대학교였다. 박 목사는 학교 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박 목사가 총무 맡으면 되겠네."

실천신학대학원교회에 합류해서 목회를 시작했다. 2000년 10월 가칭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 총회를 했다. 초대이사장으로 은준관 박사가 취임했다. 2002년 5월에는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대학원대학교 설립 허가를 취득했다. 2004년에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에 교사 건축을 완공했고 2005년 3월 실천신학 석사 과정 25명이 입학하면서 학교를 열었다. 박 목사는 그 모든 과정에 온 힘을 쏟았다. 학교 건물을 짓는 일부터 법인 취득, 설립 허가, 교수 채용, 학생 모집 등 모든 일을 처리했다.

학교가 설립된 뒤에는 총무과장으로 행정 일을 했다. 학교가 안정되면서 일도 점점 편해졌다. 이천으로 이사 와서 실천신학도 공부했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가장 편한 때였다. 취미로 약초를 캐다가 심마니 선생을 만나 약초 공부를 하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약초를 캐러 산을 찾았다. 그러면 모든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런데 행정 일만 하다 보니 뭔가 껄끄러웠다. 되돌아보니 자신이 학교 측, 교수 측, 사용자가 돼 있었다. 물 위에 기름방울처럼 떠 있는 듯했다.

"내가 이러려고 목사 했나? 나도 떳떳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민중, 노동자, 농민 다 잊고 살았는데 너무 죄를 많이 지은 것 같다. 농촌으로 가자. 초심으로 돌아가자."

2008년 1월 10일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퇴직금을 다 털어도 집을 살 수가 없었다. 당시 이천에서 도자기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소금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공장 귀퉁이에 방 한 칸을 들였다.

박 목사는 오자마자 동네 반장을 맡았다. 혈연 지연에 틀이 박힌 농촌 분위기였기에 외지에 오래 나가 있었어도 그는 외지 사람이 아니라 고향 사람이었다. 새마을지도자협의회에서 협의회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관변단체였지만 자연스럽게 동네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직책이라고 생각해서 박 목사는 수락했다.

"내가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의장이 아니었다면 관변단체들의 내막을 알기 힘들 텐데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골프장 막아야 하지 않아?

홍천으로 들어온 그해였다. 동네 모임에 갔는데 이장 친구가 박 목사에게 말했다.

"이 동네에 골프장이 들어온다는데 괜찮은 건가? 골프장 막아야 하지 않아?"

박 목사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사건이었다. 양심이 있으면 당연히 막아야 했다. 당시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양재성 목사한테 연락해 의논을 했다. 활동가도 없고 막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골프장 허가 서류를 검토해 보니 엉터리였다. 허가를 내주면 안 되는 곳인데 허가를 내줬다.

"집회 서너 번 하면 끝날 줄 알았다."

한 건설사가 홍천에 27홀짜리 퍼블릭골프장을 짓겠다고 강원도청에 서류를 냈는데 환경영향평가서, 실시계획인가서 등을 보니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 골프장을 짓겠다는 그곳이 생태 자연도 일등급 지역이었다. 생태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아서 개발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개발 허가 나기 2년 전에 그 산을 벌목한 적이 있었다. 생태자연도 등급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인허가 서류를 군과 도에 제출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했다.

상수도 유하거리 문제도 있었다. 상수도보호 구역에서 개발 부지까지 최종 배출구로부터 거리가 15km 안에 있을 때는 개발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서류에 24km로 나와 있었다. 대책위 사람들이 줄자를 가지고 직접 재 봤다. 서너 번 실측했는데 13.3km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위성 실측과 지도 전문가들을 불러 현장 실측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법 위반이 너무 명백했다.

"날고 기는 놈이 와도 법을 위반한 거니까 '이 정도면 싸울 만해. 공무원들도 이걸 보면 취소하겠지' 했다."

'누가 나서지 않으면 나라도 해야지' 하고 주민대책위를 만들었다. 시골 촌부들도 골프장이 들어오면 더는 농사를 못 짓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싸우기 시작했는데 박 목사와 대책위 농민들은 살다 살다 기가 막힌 꼴을 다 봤다. 국립환경과학원에서 내려와서 생태자연도 변경을 할 때 현장 실측을 해야 하는데 하지도 않았고, 교수들하고 밥만 먹고, 생태자연도 작성지침을 위반한 것은 거론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골프장 건설을 찬성한다는 주민동의서 도장을 받았는데 가짜가 많았다. 대개 시골에서는 이장이 동네 주민들의 도장을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찍다 보니까 죽은 사람 도장도 찍혀 있었다.

너무나 명백한 법 위반에 순박한 농민들도 참을 수가 없었다. 박 목사는 기도회와 집회를 하면서 소송을 걸었다. 그런데 소송 도중에 황당무계한 일이 터졌다. 판사가 실측을 해 보자고 해서 법원에서 실측 조사반이 나오기로 했다. 실측 나오기로 한 날 대책위 측 변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 목사님, 재판 취소가 됐어요. 우리 대책위 사무국장이 재판을 취소했대요."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책위 사무국장이 대책위와 건설사가 합의했다고 허위로 작성한 대책위 회의록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재판은 끝나 버렸다. 하지만 박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무국장이 허위로 회의록을 만든 증거를 제출하고 합의 무효소송을 냈다. 그 소송에서 1심은 대책위가 이겼다. 건설사가 어수룩한 노인네를 증인으로 내세웠는데 그게 실수였다. 그때는 좋았다. '역시 정의는 살아 있어' 하며 기뻐했다.

항소장이 날아온 지 한 달 만에 2심이 열렸다. 그런데 판사가 원고 부적격을 들고 나왔다. 판사가 빈정거렸다.

"대책위가 실체가 없는 거 아닙니까? 원고로서 자격이... 대책위라는 거, 우리 다 알잖습니까? 사무실이나 있겠어요?"

사무실 계약서와 운영한 내용을 다 보여 줬다. 판사는 또 이렇게 비꼬았다.

"사무실이야, 아무 데나 찍어 오면 되지,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대책위 정관이나 조직도 명부라는 게 있어요? 그런 게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박 목사는 다시 주민 확인서를 다 받아 와 판사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판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또 이렇게 빈정거렸다.

"아니, 이 재판 왜 하는지 모르겠네, 이거 합의했고, 돈 다 나눠 줬는데 무슨 재판을 해요? 그리고 원고적격을 인정받으려면 공식적으로 활동했다는 증거 서류를 가져와 봐요."

박 목사는 다시 군청에서 오고 간 공문들, 대책위 이름으로 집회 신고를 한 공문, 감사원에서 내려온 감사 통보 등등 대책위 이름으로 공문 오고 간 것들을 다 갖다 줬다.

"그런데 이 판사 XX가 행정과 사법은 별개라는 거다. '이게 뭐 행정부에서 보낸 거지, 우리 사법부는 이거 인정 안 해요', '행정과 사법이 엄격히 분리되니 대책위가 청와대로부터 받은 임명장이나 강원도나 홍천군에서 받은 임명장을 가져오시오'라고."

며칠 뒤에 재판을 연다는 통보도 없이 판결문이 날아왔다. '기각! 원고 부적격'. 대법원까지 상고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박성율 목사가 앞에 나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제공_ 박성율
▲ 2011년 강릉시장 규탄기도회 박성율 목사가 앞에 나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제공_ 박성율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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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3일 홍천구만리 공사 반대. 강원도청 노숙투쟁
▲ 강원도청 3박4일 노숙투쟁 2011년 9월 23일 홍천구만리 공사 반대. 강원도청 노숙투쟁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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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율 목사와 김규돈 신부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는 형상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박성율
▲ 설악산케이블카 반대 투쟁 박성율 목사와 김규돈 신부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는 형상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박성율
ⓒ 박성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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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국가

골프장 문제는 환경 문제 이전에 주민 재산권 문제가 있다. 토지 강제수용이다. 쉬운 말로 국가가 주민의 땅을 빼앗아 돈 많은 자본가들한테 주는 것이다. 물론 보상은 한다. 현 시세의 반값? 기껏해야 60%다. 그러니 어떤 주민이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까. 아니, 사실 땅값은 따질 게 못 된다. 백 배, 천 배를 쳐 준다고 해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서 어디서 살라는 말인가. 그래서 보상 안 받겠다고 싸우면 정부와 자본과 수구 언론은 "저것들 보상 다 해 줬는데 더 받아먹으려고 그런다"고 선전을 한다.

박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토지 강제수용 문제는 자본주의의 심장을 건드리는 문제다. 두 가지 흐름으로 토지 강제수용이 진행되는데, 한 가지는 국책사업이라고 하는 국가 기간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토지 강제수용. 도로, 항만, 철도, 군사기지를 비롯한 여러 국가 기반 산업이다. 둘째 민간 사업자, 자본가들을 위한 토지수용이 있다. 대략 30%가 국책사업, 70%가 민간을 위한 토지수용인데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있다. 줄여서 토지보상법. 제4조 항목에 별표로 돼 있다. '별표에 의해 보상한다.' 그 별표를 까 보면 백열 개다. 본 조항보다 더 길다.

이렇게 '우리는 당신 땅 뺏는다' 하면 누구나 알아듣는데 법 조항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만들었다. '이 개발에 수용이 될 수 있으며 수용은 몇 조 몇 항 근거에 의해 관련법 몇 조 몇 항에 하되 다만 이 시설에 관해서는 이걸 제외하고 이런 경우는 예외조항으로 남긴다.' 예외조항에 가면 또 예외가 있고 또 별표가 있다. 황당하다. 누구든 땅을 뺏길 수 있는 게 토지보상법이다."

그리고 민간 사업자가 어떤 사업을 할 때 용지를 100% 확보한 뒤에 해야 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현행법으로 80%, 70%만 있으면 사업 허가가 난다. 심지어 기업도시, 혁신도시 같은 경우는 50%까지 가능하다. 나머지 땅을 팔지 않은 사람 집은 용역 깡패를 동원해 포클레인으로 그냥(물론 법의 이름으로) 부숴 버린다.

이게 다가 아니다. 민간 사업자가 하는 골프장, 심지어 호텔이 공익사업에 속한단다. 아니, 골프장, 호텔이 왜 공익시설인가. 돈은 자기들이 벌면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본이 이익을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해서 약자, 소수의 권리는 짓밟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만 대충 뽑았는데 땅을 빼앗긴 사람이 토지 소유주로만 따지면 25만5천여 명, 곱하기 가족 4를 해 보면 피해자가 대체 몇 명인가. 끔찍하다. 김창남씨와 백선희씨는 홍천군 서면 동막리 골프장 공사를 위해 강원도와 정부가 토지를 강제수용하는 바람에 평생의 삶의 터전을 잃었다. 두 분은 홍천 읍내로 쫓겨나서 살고 있다. 김창남씨는 일흔여덟이다. 20년 전에 3천5백 평 땅을 사서 귀농했고 20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누가 쫄래쫄래 와서 '여기 골프장 할 거니까 땅 파세요.' 농사 20년째 하는 사람이 땅을 왜 팔아? 그런데 어느 날 발전소 한전 협력업체가 골프장 짓는다고 들어와서 집을 다 때려 부쉈다.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이의 신청하니까 다 법이란다. '여기 법으로 했잖아요. 저희 다 근거에 의해서 했어요. 저희 깡패 아니에요.' 그냥 뺏긴 거다. 그분들 처음에 골프장 반대 투쟁 안 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앞서 투쟁 중이다."

싸우는 과정은 험난했다. 권력을 이용한 자본은 갖은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 박 목사 집으로까지 찾아와 20억을 줄 테니 대책위에서 손을 떼라는 유혹과 협박을 벌이기도 했다. 박 목사는 성서적으로(목사니까) 욕을 해 줬다. "XX새끼들아, 지옥의 심판을 면치 못할 거다."

홍천 어느 마을은 골프장 사업자가 주민들에게 까만 봉지에 천만 원씩을 담아 몰래 집에다 갖다 놓기도 했다. 주민들을 분열시키려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강원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그 돈을 뿌리면서 항의했다.

건설사들은 돈으로 회유가 안 되면 폭력을 쓰고, 오히려 소송을 건다. 구만리 골프장 공사를 막는 마을 노인들을 용역 120여 명을 동원해 폭행하는 바람에 노인들이 헬기로 병원에 이송되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사업자는 거꾸로 주민들을 고소하고 11억98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도 했다. 이런 사례는 전국 어디나 똑같다.

박 목사의 유일한 수입원 은해염 소금

박성율 목사 직함을 보면 이렇다. 원주녹색연합 상임대표,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강원행동 집행위원장. 강원도골프장 문제 해결을 위한 범도민행동위 집행위원장. 대성리골프장반대대책위 위원장. 이 밖에도 많은데 돈 한 푼 못 받는 직함이다. 여전히 목사이기는 한데 목회할 교회가 없다. 그동안 길거리에서 436차 기도회를 했다. 토지강제수용 피해자 백선희 씨가 조그만 교회를 지어 줘 개척교회를 하려고 했는데 교단에서 승인을 안 해 줘 교회 등록을 못 하고 있다.

"골프장 저지 싸움을 시작할 때 고민했다. 목사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난받는 현장에서 이걸 무시하고 하나님 부를 수 있나. 신앙적 결단이었다. 이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골프장 투쟁은 단순한 환경 싸움이 아니다. 골프장 자본 뒤에는 자본주의의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다. 먼저 자본가들이 구상한다. 그리고 권력을 이용한다.

시장, 도지사, 군수 등 결정권자, 그 밑 공무원들. 그들이 사전에 모의한 고의 벌목, 고의 훼손. 서류 조작. 인허가청, 산림청, 국회의원, 국립생태과학원 환경생태평가 연구원, 다 야합돼 있다. 서류가 표면적으로는 완벽하다. 그 서류를 들고 현장에 가서 비교해 보는 순간 책상에서 만든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행정적으로 완벽하니 어쩔 수 없다. 사법으로 가면 다 로비당해(?) 있다. 주민들이 거는 소송은 100% 패소한다. 형사 건도 마찬가지. 주민들이 걸면 증거 불충분이고, 사업주 측에서 걸면 100% 주민들의 법 위반이다."

박 목사는 10년 동안 골프장 반대 투쟁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가정 살림은 완전 파탄이 났다. 소송비용 등도 위원장들 몫이었다. 박 목사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오죽했으면 손해배상 청구가 들어와도 빼앗길 게 없어서 마음이 편했겠는가. 땅도 없고 집도 없고 벌이도 없으니 집행할 게 없다.

박 목사의 유일한 수입원은 소금이다. 도공이었던 아버지가 발견한 소금이다. 열전문가였던 아버지가 천일염을 800도 이상, 1000도 이하에서 구운 태움·용융소금(은해염) 만드는 비법을 발견했다. 일반 구운 소금과는 차이가 있다. FDA 승인으로 미국에선 한때 약용으로 판매되기도 했는데, 식용으로 더 좋은 소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박성율 목사가 뒤를 이어 만들고 있다. 디아코니솔텍이라는 공장인데 아내 백향숙씨가 대표로 돼 있다. 지인들이 여기서 소금을 사 먹고 있지만 금방 소비되는 게 아니라서 많이 팔리지 않는다.

활동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박 목사가 대중교통으로 서울을 가면 경비가 3만 원, 차를 끌고 가면 5만 원 정도가 든다. 강원도는 워낙 넓어 삼척, 강릉, 원주, 설악산 등을 오가려면 차비가 만만치 않다. 강릉 한 번 갔다 오면 10만 원에서 15만 원이 든다. 가장 화가 날 때는 집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화물차 기름이 떨어졌다는 표시의 빨간 불이 들어올 때다. 그럴 때 구세주가 온다.

"승용차 한 대가 오더라. 소금 하나 사러 왔다고. 세 봉지에 4만5천 원인데 5만 원짜리를 준다. 잔돈 없다고 하니 '나중에 5천 원어치 주세요' 하더라.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전기가 끊길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면 홀로 집에 계신 어머니가 노발대발한다.

"니가 목산데, 목회는 안 하고 집안 꼴은 이렇고. 애들 꼴도 봐라, 학교도 안 보내고."

어머님 말씀은 다 맞지만, 아이들 꼴이 잘못됐다는 말은 틀렸다. 아이들은 중고등학교를 안 간 대가(?)로 스스로 인생을 헤쳐나갈 심신 건강한 청년들로 자랐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닮았는지 문학청년이다. 고등학교 때 반 애들이 교실 바닥에 침을 뱉고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욕을 하는 걸 보고 학교에서 나왔다. 검정고시를 본 뒤, 수석으로 서울예대를 들어갔다. 지금은 졸업하고 이태원에서 친구들과 합작으로 출판사를 차렸다. 이제 책을 한 권 발행한 새내기 출판사다.

큰딸도 고등학교를 안 다니고 대학을 갔다. 철학과에 들어갔는데 장학금과 알바로 버티고 있다. 아직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일곱 살 연상의 멋진 청년과 약혼을 했다. 두 사람은 약혼을 한 뒤,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남미를 여행하는 중인데 지금은 갈라파고스에 있다고 한다. 박 목사 부부는 그 아이들에게 차비 한 푼도 주지 못했다.

둘째 딸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다. 박 목사 부부는 큰딸의 시아버지가 될 그 선교사가 있던 캄보디아로 여행을 보냈다. 열다섯 살 나이에 여행 가서 할 일이 없던 딸은 캄보디아의 선교사 집 골방에 앉아 책만 읽었다고 한다. 2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는데 철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빠가 농성하느라 냄새나는 노숙인 꼴을 하고 들어와도 아빠를 반겨 준다. 그리고 나갈 때 "아빠, 힘내. 건강 조심" 하며 응원해 준다(박 목사는 2016년 4월 무렵 심근경색이 와서 위험했던 적이 있다).

막내도 고등학교에 안 가고 검정고시를 본 뒤 올해 수능을 봤다. 수능이 끝난 뒤 두 달 동안 알바를 해서 돈을 모으더니 언니가 있는 갈라파고스로 여행을 떠났다. 백향숙씨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짠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막내는 한국에 들어오면 미술사를 공부하겠대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할지 그거만 아는 것만 해도 너무 고맙죠. 알아서 잘 컸어요, 고맙게. 애들은 방목해야 돼요. 참견하지 않아야 잘 커요. 사람들이 '아니 애들한테 그럴 수 있냐'고 그러는데, '아니 어떻게 애한테 그렇게 신경을 써?' 저는 못해요.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숨 막혀요.

제가 아이들한테 그런 이야기는 했어요. '뭐든지 준비를 하면 이다음에 내가 뭘 하고 싶을 때 그걸 써먹을 수 있어. 포클레인이 필요한데 포클레인 운전을 못 하면 죽어라 삽질해야 돼. 그걸 내적 자원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어.' 저는 공부하라는 소리 않고 책만 보라고 했어요. 애기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동화책이든 뭘 읽어 줬어요. 지금도 애들이 엄마를 생각하면 밤마다 책 읽어 주는 게 생각난대요. 그게 전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랐던 힘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모두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다. 소득분위가 1분위라 학교 장학금에 국가 장학금도 받았다. 언젠가 하루는 큰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없으면 우리처럼 없어야 돼. 내 친구들 어중간하게 없으니까 힘들어해. 우린 완전히 없으니까 꿀이야 꿀."

백향숙씨는 그 말을 들으면서 폭소를 터뜨렸지만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없는 게 감사해요. 있으면 뭐라도 아이들에게 해 줬을 거 같아요. 없으니까 해 줄 수 없어요."

아내 백향숙 씨가 대표로 돼 있는 디아코니솔텍에서 판매하고 있는 구운 소금
▲ 은해염 판매 광고 아내 백향숙 씨가 대표로 돼 있는 디아코니솔텍에서 판매하고 있는 구운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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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백패해도 투쟁하는 까닭

"싸움 참, 지겹게 했다."

박 목사는 나이 든 주민들하고 골프장 문제로 강원도청에서 406일, 홍천군청에서 204일, 강릉시청에서 479일, 다시 또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로 강원도청에서 443일, 원주지방환경청 비박농성 364일을 주민들과 함께 했다. 단식, 점거, 3~4일이나 일주일 노숙투쟁은 헤아릴 수가 없다.

"그걸 쭉 해 왔는데 아직도 못 이기고 있으니 어떤 마음이겠는가. 지금 투쟁에 남아 있는 분들, 모을 수 있는 분들은 소수다. 싸우던 분들 60% 이상이 돌아가셨다. 2008년부터 10년 동안 싸웠는데 농촌 인구 줄어드는 속도와 똑같다."

박 목사는 승리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폐암으로, 화병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지난해까지 기도회 나오시던 여든네 살 할머니 한 분이 올해 중풍이 와서 못 나온다고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울면서 그래요. '내가 골프장 취소되는 거는 보고 죽어야 되는 건데. 나 죽기 전에 이거 취소되는 거지?' 그럼요. 우리 이길 거예요. 이길 때까지 싸울 거니까."

박 목사도 인간이라 약한 면이 있다. 투쟁 초기 5년은 이게 사는 건가? 하고 반문하기도 했다. 누구 붙잡고 하소연할 사람도 없다. 가끔 집회장에 와서 밥을 해 주고 가는 유희씨와 전화 통화를 하다 "누나, 나 울어도 되죠?" 하고 펑펑 운 적도 있다.

그렇게 힘든데 투쟁하는 까닭은 뭘까. 박 목사는 그게 운동이 아니라 곧 삶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환경운동, 노동운동은 '일'이 아니라 삶인 거 같다. 일은 보수를 받고 하다가도 안 할 수 있다. 삶은 그만둘 수가 없다. 삶이니까. 나는 활동가가 아니다. 삶이기 때문에 끝까지 가야 한다."

처음으로 온 가족이 제주도를 다녀왔다. 사진 제공_ 박성율
▲ 박성율 목사 가족 처음으로 온 가족이 제주도를 다녀왔다. 사진 제공_ 박성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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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이야기

지난 1월 4일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박성율 목사와 아내 백향숙씨를 만났다. 백씨는 박 목사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다. 두 분 다 처음 만났는데 오랜 친구, 동지들처럼 정겹고 반가웠다.

이틀에 걸쳐 서울 <작은책> 사무실과 홍천에서 두 분을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두 분은 벼랑 끝에 서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박 목사에게 대책위에서 활동비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물었다. 박 목사가 대답했다.

"그 사람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고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에요. 우리보다 더 절박한 사람들이죠. 너무 수탈을 당해서 도와줄 여력이 없어요."

나는 무신론자다. 그런데 만일 예수가 있다면 저 박 목사가 예수가 아닐까 생각했다. 박 목사는 농민들, 핍박받는 이들이 예수라고 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가 안 보여요. 농민, 그 핍박받는 이들, 어떻게 보면 하나도 거룩해 보이지 않는 그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거룩한 거예요.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예요."

박성율 목사는 오랫동안 노숙투쟁을 했고 벼랑 끝 삶을 살았는데 얼굴이 밝다. 꼭 종교의 힘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게 뭘까? 긍정? 낙관? 성경? 마르크시즘? 아참, 예수의 삶과 마르크스의 삶은 닮았다고 들었다.

"절박한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 자신이 벼랑 끝에 살게 됐어요. 아내한테 미안한 거야. 벼랑 끝에 살았던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꽃길처럼 행복하게 살았던 거야. 앞을 보면, 한 발 내디디면, 벼랑 끝인데 뒤를 돌아보면, 동지들도 있고,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변하는 거 봤고... 어쩌면 그게 행복인 거 같아요."

백향숙씨가 "맞아, 맞아" 하고 웃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참 아름다운 부부다. 이들이 바라는 세상이 가난한 이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골프장, 케이블카 따위 만든다고 국가가 남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자본에게 주는 세상은 바꿔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2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



태그:#안건모, #박성율, #작은책, #골프장 반대, #케이블카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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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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