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성범죄는 근절되어야 할 범죄지만 무분별한 고소와 여성 우월주의의 등장으로 소위 '꽃뱀'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성폭력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 할 때, 이런 편견을 가진 남성들을 꽤 자주 마주한다. 일단 맞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엉망진창인 주장이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먼저 기본적인 전제부터 틀렸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이들은 '성폭력 폭로와 기소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무고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증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폭력' 개념이 비교적 근래에 고안되어 전파된 것과 다르게 '꽃뱀'의 역사는 그야말로 유구하다. 각종 설화, 민담 심지어 종교 경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부당하게 남성을 갈취하고 타락시킨 여성의 이야기는 질릴 정도로 즐비하다. 그런데 현대의 기준에서 성폭력으로 볼법한 행위들은 구애나 애정 표현, 혹은 남성의 당연한 권리처럼 묘사되곤 했다.

한 개인에 대한 성적 폭력이라는 의미로 '성폭력'이 의미화 된 것은 국가에 따라 빠르게는 60년대 혹은 80년대부터다. 이전에도 형법에 강간죄가 존재한 나라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이는 '정조를 침해한 죄'로 다루어졌다. 한국의 경우 95년에 이르러서야 성범죄를 다룬 형법 제32장의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라 바뀌었다.

말하자면 '꽃뱀'이 실체는 없는데 이름만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성폭력은 현실에 만연한데 부를 명칭이 없던 개념이었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이 손쉽게 '꽃뱀'을 이야기하는 동안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일이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고,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데는 힘겨운 투쟁과 고발이 필요했다.

즉, 당사자가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나갈 때 성범죄에 대한 정의로운 처분이 가능해졌고, 현대적인 의미의 '성폭력'이 명확히 개념화된 것이다.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가 30일 오후 JTBC뉴스룸에 출연해 검찰내 성추행 피해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가 30일 오후 JTBC뉴스룸에 출연해 검찰내 성추행 피해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 JTBC 화면

관련사진보기


'성폭력'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여성들

흔히 '강간'을 의미하는 협소한 의미의 성폭력도 그러했지만 성추행과 디지털 성범죄 등 광범위한 성폭력을 포괄하면 그 역사는 더욱 최근까지 이어진다. 1991년 미국에서 직장 내 성추행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지지 조차 않았던 시절, 변호사 아니타 힐은 클라렌스 토마스 연방 대법관 인준 청문회에서 그의 성추행 사실을 증언했다. 한국은 1993년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에 대한 고발과 함께 직장 내 성추행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 올랐고, 98년에 이르러서야 대법원의 판결로 가해자의 유죄가 확정됐다.

변화는 명백했다. 힐의 증언 이후 법원의 성추행 보상 판결과 기업 내 성추행 방지 교육은 크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신교수 성추행 사건에 대한 판결 이후, 한국에선 '남녀고용평등법'과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에 '직장내 성희롱 예방과 처벌 조항'이 신설되었다.

흥미롭게도 아니타 힐은 할리우드에서 일어난 '#MeToo'(미투) 운동과 'Time's Up'(타임즈업) 캠페인의 결과로 만들어진 '성추행 근절과 일터에서의 성평등 발전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언급한 두 운동은 할리우드의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이 30년 가까이 많은 여성들에게 성폭력과 성추행을 저질렀음이 폭로된 이후 등장했다.

운동가 타리나 브룩이 처음 제안한 'Me Too' 운동은 성추행이나 성폭력을 겪은 여성들이 '나도 그런 일이 있었다(Me too)'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문제를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Time's Up'은 이렇게 드러난 피해들에 마주하고 실질적인 법적 조치에 나서 성폭력과 성추행, 직장 내 성차별이 만연한 시대를 종식시키는 것(Time's up)을 목표로 진행한 캠페인이다.

'여성'이기에 당하는 폭력

한국에서 일어난 '#OOO_내_성폭력'의 미국판이라 할 '#MeToo' 캠페인, 최근 이 두 해시태그가 나란히 등장한 일이 발생했다. 29일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통신망을 통해 8년 전 성추행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서 검사의 말에 따르면, 2010년 한 장례식장에서 법무부 장관을 수행하고 온 안태근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국장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강제 추행을 저질렀다. 이후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기로 했으나, 돌아온 것은 사무감사에서의 이해할 수 없는 지적과 검찰 총장의 경고 그리고 이로인한 전결권 박탈과 부당한 인사조치였다는 주장이다. 

당시 서지현 검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사건을 덮고 가는 게 나을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서 검사가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도 언급했듯, 검찰은 피해에 대해 쉽게 증언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그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은폐되기 일수였으며, 오히려 피해자를 향해 '남자 검사들 발목 잡는 꽃뱀이다'라는 비난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나 한국에서 검사는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지닌 이들이 아닌가. 여기에 검찰은 어느 조직보다 엄정해야 할 법 집행 기관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직 내 성폭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권력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객관적으로 힘도 지위도 있어 보이는 여성일지라도 그 사람보다 직급, 연령 심지어 단지 성별 때문에 더 높은 위계를 점하는 남성들은 어느 분야에나 존재한다.

일례로 배우 레아 세이두는 프랑스 미디어 업계를 거머쥔 조부와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을 정도로 막강한 배경을 지녔지만, 웨인스타인이 업계에서 가진 힘 때문에 그의 성추행을 피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서지현 검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형식의 글을 통해 '후배 검사가 자신을 안아주지 않으면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행패를 부린 적이 있음을 증언했다.

더불어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서지현 검사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 검사는 지난 2010년 서울 북부지검 소속이었을 당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사건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 후에 검찰국장까지 승진 후 퇴임)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날 회견은 남윤인순 유은혜 유승희 진선미 이재정 박경미 의원 등이 함께했다.
▲ 서지현 검사 지지나선 여당 여성 의원들 더불어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서지현 검사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 검사는 지난 2010년 서울 북부지검 소속이었을 당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사건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 후에 검찰국장까지 승진 후 퇴임)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날 회견은 남윤인순 유은혜 유승희 진선미 이재정 박경미 의원 등이 함께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바라보고, 지지하고, 지켜내자

아마 가해자들은 그랬을 것이다. 평생 자신이 피해자가 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니 성폭력 문제에 관심도 없었고 그래서 자기가 한 일이 가해라는 사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폭력 예방 교육에 엄격한 사회도 아니니 스스로가 모범 시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혹은 가해자가 된 이후에도 한국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이고, 그래서 피해를 제대로 호소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당당하게 굴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 성폭력 가해자들 중에, 유죄 판결을 받고 난 이후에도 너무나 잘살고 있는 이들이 많다. 신교수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는 이후로도 오래 대학에 남았다. 반면, 서지현 검사는 당장 검사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판국이다.

상당한 시간 단체에서 활동하며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지지의 메시지를 작성하는 일을 하곤 했다. 하지만 피해당사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제대로 안 적은 거의 없다.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선택의 유무를 넘어서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내고 공개적인 문제제기에 나설 때, 가해자와 달리 너무도 잃을 것이 많아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당사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말이다. 그래서 서지현 검사도 너무나 두렵지만 피해자가 자신의 탓을 하지 않고 당당하길 바라는 마음에 나서게 되었다고 언급했으리라.

서 검사는 충분히 자신의 일을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몫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들고,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고발자에 대한 불이익이 이어진다면 결국 공론화를 원하는 이들은 뒤로 물러설지 모른다. 누구도 더 이상 나도 그 일을 겪었다고 말하지 않고, 이런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일어설 필요가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변화를 위해 용기를 낸 사람을 계속 바라보고, 지지하고, 지켜내자.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몫이라고 생각한다.


태그:#METOO, #TIMES UP, #검찰 내 성폭력, #OOO 내 성폭력, #성폭력
댓글1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