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결번'(永久缺番/Retired number)은 운동선수에게는 최고의 영예로 꼽힌다. 리그 혹은 소속팀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수에 대해 그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고 다른 선수들에게는 부여하지 않는다. 해당 번호는 오직 '그 선수'만을 상징하는 번호로 영원히 남게 된다.

영구결번의 시초,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선수들

최초의 영구결번은 1939년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루 게릭이 사용하던 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면서 처음 시작됐다. 뉴욕 출신인 게릭은 운동신경세포가 파괴되는 일명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단어의 시초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며, 전성기에는 1루수이자 4번타자로 활약해 2130경기 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던 양키스의 전설이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은 특정팀을 넘어 현재 리그의 모든 구단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에서 활약하며 신인왕과 MVP, 총 6회의 올스타에 선정될 만큼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로빈슨이 은퇴 후 1972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다저스는 그의 등번호인 42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1997년에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인종의 장벽을 무너뜨린 로빈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2번을 리그 전체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2004년부터 매년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삼아 기념하고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는 모든 리그와 종목을 통틀어 영구결번의 숫자가 가장 많다. 명문 뉴욕 양키스는 원조답게 무려 20명에 이르는 영구결번을 보유하고 있다. 놀란 라이언(텍사스, 휴스턴, LA 에인절스), 행크 애런(밀워키, 애틀랜타) 등 한 선수가 복수의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사례도 여럿 존재한다. 미국 프로농구(NBA)에서도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 코비 브라이언트(LA 레이커스) 빌 러셀(보스턴 셀틱스) 등 여러 전설적인 선수들이 영구결번의 영광을 누린 바 있다.

KBO 리그에서 탄생한 첫 번째 영구결번은...

 16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한국과 일본의 경기. 선동열 감독이 10회말 2사 2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고 패한 뒤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있다.

16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한국과 일본의 경기. 선동열 감독이 10회말 2사 2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고 패한 뒤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스포츠에서는 아직 영구결번의 역사는 짧다. 36년 역사의 KBO리그에서는 총 14명의 영구결번이 나왔다. 최초의 영구결번은 1986년 OB(현 두산)에서 활약하던 고 김영신이다. 평범한 실력의 선수였던 그는 당시 주전 경쟁에서 밀리자 신변을 비관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구단은 애도 차원에서 그의 등번호 5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메이저리그의 루 게릭과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영구결번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1996년 해태 선동열(18번), 1999년 LG 김용수(41번), 2002년 OB 박철순(21번), 2004년 삼성 이만수(22번), 2005년 한화 장종훈(35번), 2009년 한화 정민철(23번), 2009년 한화 송진우(21번), 2010년 삼성 양준혁(10번), 2011년 롯데 최동원(11번), 2012년 KIA 이종범(7번), 2013년 SK 박경완(26번), 2017년 LG 이병규(9번), 2017년 삼성 이승엽(36번) 등이 영구결번으로 선정됐다. 모두 한국프로야구 역사와 소속팀에 큰 족적을 남긴 선수들이다. 이중 이만수 전 SK 감독, 장종훈-송진우 한화 코치 등은 지도자로 변신하면서 영구결번된 자신의 현역 시절 등번호를 다시 사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프로농구(KBL) 역사상 영구결번 선수는 총 9명이다. 199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삼성의 고 김현준 전 코치는 프로무대에서는 선수로 뛴 적이 없지만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삼성과 한국농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구단이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 밖에 전주 KCC 이상민(11번)과 추승균(4번), 원주 DB 허재(9번), 울산 현대모비스 김유택(14번)과 우지원(10번), 서울 SK 문경은(10번)과 전희철(13번), 고양 오리온 김병철(10번) 등이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은 바 있다.

'저니맨' 서장훈, 서울 삼성에서 영구결번이라니?

'공조7' 서장훈, 완전 방송인 방송인 서장훈이 17일 오전 서울 영등포의 한 웨딩홀에서 열린 tvN 예능 <공조7> 제작발표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공조7>은 예능계 대부부터 대세 방송인까지 7명이 최고의 콤비 자리를 두고 벌이는 강제 브로맨스 배틀 프로그램이다. 26일 일요일 오후 9시 20분 첫 방송.

▲ '공조7' 서장훈, 완전 방송인 방송인 서장훈이 17일 오전 서울 영등포의 한 웨딩홀에서 열린 tvN 예능 <공조7> 제작발표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공조7>은 예능계 대부부터 대세 방송인까지 7명이 최고의 콤비 자리를 두고 벌이는 강제 브로맨스 배틀 프로그램이다. 26일 일요일 오후 9시 20분 첫 방송. ⓒ 이정민


창단 40주년을 앞둔 프로농구 서울 삼성은 이상민(삼성 감독)과 서장훈(방송인)의 현역시절 등번호인 등번호 11번을 동시에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가 1시간 만에 이를 철회하는 소동을 빚어, 팬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삼성은 지난 28일 "영구결번 당사자와 소통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다"라면서 "추후 협의를 통해 영구결번과 관련한 내용을 확정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활동했던 시대는 달랐지만 뉴욕 양키스에서 현역 시절 나란히 8번을 썼던 요기 베라와 빌 디키의 경우처럼, 두 명 이상의 선수가 함께 사용한 등번호를 영구결번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프로농구에서는 최초가 될뻔했다.

하지만 이상민-서장훈의 경우에는 농구 팬들도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두 선수는 물론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농구의 전설이지만,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이상민은 현역 시절 말년인 2007-2008시즌부터 2009-2010시즌까지 삼성에서 단 3시즌을 뛰고 은퇴했고, 서장훈도 2002-2003시즌부터 2006-2007시즌까지 5시즌만을 뛰었을 뿐이다.

 이상민

이상민 ⓒ 서울 삼성 썬더스


이상민은 이미 현역 시절의 전성기의 대부분을 보낸 전주에서 영구결번을 부여받았다. 서장훈은 선수생활 내내 무려 6팀을 전전했던 '저니맨' 이미지가 강한 데다 말년으로 갈수록 팀보다 개인 기록만 챙긴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을 만큼 '특정팀의 레전드'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다. 이미 팀을 떠났거나 은퇴한 지도 수년이 넘은 상황에서 굳이 이제 와서 갑자기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는 것도 다소 뜬금없다는 반응이다.

사실 초창기 프로농구는 아직 짧은 역사에 비하여 영구결번을 너무 남발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올해로 37년째를 맞이하는 프로야구도 영구결번이 아직 14명인데 이제 20년을 갓 넘긴 농구가 벌써 9명이나 된다.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김유택이나 허재, 문경은, 전희철처럼 정작 프로무대에서는 활동한 시간이 짧았거나 전성기를 보내지도 않은 팀에서 영구결번을 지정받은 사례도 적지 않다. 허재를 원주의 레전드로 기억하거나, 전희철을 서울 SK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생각하는 팬들은 거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영구결번의 가치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미래에 KBL에서 은퇴 후 영구결번으로 유력한 후보는 김주성(원주 DB, 32번)과 양동근(울산 현대모비스, 6번) 등이 첫 손에 꼽힌다. 두 선수 모두 KBL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은 선수들이자 선수 생활 내내 한 팀의 유니폼만 입고 활약해온 '원클럽맨'이기도 하다. 재론의 여지없이 영구결번의 자격을 논할 때 가장 모범사례가 될만한 선수들이다.

영구결번은 선수 개인의 영예를 넘어 그 팀과 리그의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번 선정하면 쉽게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보다 신중하고 사려깊은 결정이 필요하다. 마치 연말 방송사 시상식처럼 일회성 이벤트나 선심성으로 남발하는 영구결번은 그 무게를 떨어뜨린다. 더구나 삼성의 경우처럼 사려깊지 못하게 결정을 내렸다가 뒤집는 촌극은 선수들의 명예에도 오히려 누가 될 뿐이다. 누구나 인정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절차와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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