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할리우드는 딜런 패로우의 성범죄 고발로 들썩였다. 가해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양아버지이자 유명 영화감독인 우디 앨런. 패로우가 <뉴욕타임스> 블로그에 보낸 공개서한에 따르면, 우디 앨런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반복적인 성적 학대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법적 처분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후 코네티컷 주가 양육권 공판에서 우디 앨런에게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리고 형사 고발의 근거가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딜런 패로우의 어머니인 미아 패로우는 그 당시 그녀의 딸이 재판 과정을 겪기에 너무 어렸다고 판단해 소송을 포기했다.

물론 이를 이유로 우디 앨런은 자신의 혐의에 관해 어떤 것도 밝혀진 게 없다며 결백함을 주장했다. 두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더 신뢰하는 것이 있긴 하다만 이 글에서 판단을 내리진 않겠다. 다만 피해자들 중 다수가 자신이 성적 학대를 겪었음을 나이가 들고 뒤늦게 깨닫는 아동성범죄의 경우 이와 유사한 상황이 매우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은 이야기해두고 싶다.

아무튼 딜런 패로우는 자신의 피해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호소문을 써왔지만 이 이슈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미투(#MeToo)' 운동과 '타임스 업(Times Up)' 캠페인으로 연예계 내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과 근절을 향한 의지가 할리우드에서 강력하게 솟아났다.

우디 앨런 같은 거물급 감독도 이 바람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얼마 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배우 콜린 퍼스가 '다시는 우디 앨런 감독과 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우디 앨런 감독의 2014년 영화 <매직 인 더 문라이트>에서 주연을 맡은 바 있다. 콜린 퍼스뿐일까, 그레타 거윅·앨런 페이지·레베카 홀 등 이전에 우디 앨런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연이어 비슷한 입장을 내놓았다.

 실제 83년생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에서 55년생 애비를 연기했다.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패션, 그리고 연기 스타일은 [이터널 선샤인]의 케이트 윈슬렛을 연상시킨다. 그녀의 다음 작품들이 기대된다.

영화 <우리의 20세기>에 출연한 배우 그레타 거윅. ⓒ 그린나래미디어(주)


 지난 2014년 2월 HCRF 컨퍼런스 연단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배우 엘렌 페이지.

지난 2014년 2월 HCRF 컨퍼런스 연단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배우 엘렌 페이지. ⓒ HCRF


영화 제작자들의 성범죄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

창작자들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폭로가 등장하고 업계의 다른 동료들이 그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는 상황은 얼마 전부터 이어져 왔다(이전에는 크게 신경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배우 케빈 스페이시의 성추행 가해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가 그랬고, 보다 대표적으로는 하비 웨인스타인의 경우도 있었다. 우디 앨런도 같은 결말을 맞아 사실상 커리어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질까?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당사자가 여전히 가해 사실을 부인하는 중이니 두 눈 질끈 감고 출연 계약서에 서명할 배우는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 중 하나는 벌어졌다. 바로 이 사태와 관련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SNS 등 여러 방식을 통해 많은 이들이 '성폭행 사건이 사실일지라도 우디 앨런이 훌륭한 예술가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남겼다.

생소하지 않다. 할리우드건 한국이건, 과거의 사람이건 현재의 인물이건 한 예술가의 성범죄 사실이 폭로되거나 확정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가 성폭력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혹은 성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뛰어난 예술가임은 부인할 수 없다'.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누군가가 성범죄자인 것과 유능한 예술인인 것이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당장 케빈 스페이시가 형편없던 배우로 낙인이 찍히거나 하비 웨인스타인이 제작했던 영화가 끔찍하다는 평가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아무런 영향이 없는 두 개의 사실이 연관성을 가지는 것은 한 예술가가 자신의 성범죄로 인해 더 이상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할 때뿐이다. 그래서 언급한 말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이어서 하곤 한다.

"죄의 대가는 치르되 이로 인해 작품 활동이 좌절되는 것은 과도하다".

말하자면 '범죄는 범죄, 창작물은 창작물'이라는 식의 논리다.

성범죄 폭로 후 영화 제작자의 경력 단절, '부당하지 않은' 이유

성폭력 가해자의 미래까지 걱정하다니, 정말이지 넓은 아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전에 지적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바로 '타임스 업' 캠페인이 있기 전까지 '성폭력 폭로로 가해자의 경력이 단절'되는 일이 벌어진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의 범죄 정황은 성범죄 혐의로 기소되는 등 다른 경우보다 비교적 명확했다. 심지어 로만 폴란스키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재판 직전에 유럽으로 도주까지 감행했다. 하지만 폴란스키의 경력은 단절되기는커녕 이후로도 매우 잘 이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영화계의 거장 대접을 받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치른 대가라고는 평생 미국 땅을 밟지 못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오스카 트로피를 직접 받지 못했다는 것 정도다. 피해자들의 삶에 잊지 못할 상흔을 남긴 것에 비하면 이게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만약 로만 폴란스키가 유죄를 선고받아 더 이상 영화를 찍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 상황이 그렇게까지 부당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무엇보다 많건 적건 돈이 들어가는 산업이기도 하다. 관객들과 동료 배우들의 보이콧으로 제작이 불투명하거나 손해가 뻔하게 예상되고, 그래서 제작사가 돈을 대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다. 이보다 더 황당하고 납득이 불가능한 이유로도 영화 제작이 무산되는 게 이 바닥의 현실이다.

이에 비하면 주요 제작진의 '성폭력 가해'나 '성범죄 혐의'는 제작 무산의 이유로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유가 아닌가. 나 같아도 성범죄자이거나 혹은 강력한 혐의를 받는 감독과 함께 일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또한 관객으로서 그런 사람이 만든 영화에 감정 이입이 전혀 되지 않는다. 이건 예술인에 대한 과도한 탄압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결과에 불과하다. 물론 폴란스키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성폭력 가해자들이 사회적 댓가를 치러야 하는 이유

사회적 지위나 계급에 상관없이 유독 성폭력 가해자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에 한국은 꽤 관대한 편인 것 같다. 어쨌든 예술가들을 두고 이와 같은 반응이 등장하는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 것 같다. 작품만 보고 평가하겠다는 예술관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그렇다면 혼자 그 가치관을 고수하면 된다) 어쩌면 한때 사랑했던 창작자들이 사라지거나 그들이 작품 외적인 이슈로 비판받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말하건대, 그런 예술가들의 경력이 박살 난다고 해도 관객인 우리가 잃을 것은 별로 없다. 예술계 특히나 영화계는 실력만으로 입지전적을 이룰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운이 없어서 혹은 성별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적 대우 때문에 같은 재능을 겸비하고도 사라져간 창작자들은 무수히 많다. 만약 로만 폴란스키나 우디 앨런이 사라져도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독보적인 제작자가 일궈낸 작품 세계는 사라지고 이를 대체할 인물은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특정 감독의 더욱 진일보한 성취를 목격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우리에게 그것은 발생조차 하지 않아서 알 수 없는 미래로만 남을 것이다.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훌륭한 작품을 만든 제작자들은 많다. 그러니 성범죄를 저지른 감독들이 모두 퇴출당한다고 해도 영화계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피해자에게는 분명 결과가 다를 것이란 점이다. 더불어 대다수의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여성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성폭력 가해자가 멀쩡하게 이전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평온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세상에서 과연 성범죄를 저지른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후유증으로 인해 사회적 대가는 피해자 혼자 치르는 동안 가해자는 계속해서 멀쩡하게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현실은 성폭력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까. 어쩌면 가해자는 '잠깐의 추문은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정당한 처벌을 받고 매장이 되는 사람은 운 없는 소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가해자들은 겁도 먹지 않고 경고도 받지 않지만 오히려 그것들은 피해자에게 전달된다. 이런 상황은 성폭력을 둘러싼 현실의 축소판이다.

우리는 유능한 예술가의 작품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피해자와 주로 피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제대로 살아낼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딜런 패로우가 <뉴욕타임스>에 보냈다는 서한의 일부를 피해자의 증언으로서 공유하고자 한다.

"우디 앨런은 성폭력, 성적 학대 생존자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좌절시키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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