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정현.' 22일 호주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대회 8강에 오른 정현은 말 그대로 한국 테니스의 역사를 다시 썼다.

프로스포츠는 단체경기든 개인경기든 소수의 스타가 좌우한다. 나라를 가릴 것 없는 현상인데 한국(인)의 경우 '골프=박세리', '야구=박찬호', '피겨 스케이팅=김연아' 등이 그런 예이다.

불과 2년여 전만 해도 세계 최강이었던 노박 조코비치를 꺾은 정현은 8강전을 코앞에 두고 있다. 정현 선수가 4강 정도까지만 올라도 그 파급 효과는 김연아, 박찬호, 박세리와 맞먹을 것으로 예상된다.

스포츠는 단순한 체육활동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과 문화, 심지어 경제에까지 영향을 준다. 조코비치와 16강 경기를 돌아보고 8강전 이후를 내다보는 건 그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조코비치 상대 16강전

조코비치는 2016년 프렌치 오픈에서 우승할 때까지만 해도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 기술적으로 역사상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12번 그랜드 슬램 대회를 우승했는데, 페더러, 나달과 같은 50년 혹은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선수들 사이에서 기록한 것이어서 더욱 값지다.

조코비치는 현 세계 랭킹 1위인 나달과 상대전적에서 26승 24패로 근소하지만 우위를 지키는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페더러와 상대전적 역시 23대 22로 1승 앞선다.

정현 선수와 맞붙은 22일 조코비치는 분명 2015년 혹은 2016년과 같은 몸 상태는 아니었다. 종합적 컨디션은 그의 기준으로 볼 때 A에 미치지 못하고 잘하면 B플러스, 혹은 B정도였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B플러스의 컨디션일 때도 수없이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세계 10위권 이내의 선수들도 그의 공략에 애를 먹었다.

22일 16강전에서 그의 결정적 약점은 오른쪽 팔꿈치 부상이었는데, 그는 경기 후 첫 세트 후반부터 마지막 3세트까지 계속 통증 때문에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조코비치의 팔꿈치 부상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테니스 선수들 가운데 팔꿈치를 가장 잘 쓰는 편이다. 그가 키에 비해 남달리 가벼운 체중에도 불구하고, 공의 파워, 회전력, 컨트롤이 남다른 건 그의 뛰어난 팔꿈치 활용에 상당 부분 의지한 까닭이다. 페더러는 이런 점에서 팔꿈치 사용을 최소화한 스타일로 대조적이다.

'칼로써 흥한 자 칼로써 망한다'는 격언도 있는데, 조코비치는 향후에도 포핸드 스트로크때 팔꿈치 활용을 달리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팔꿈치가 그를 괴롭힐 수도 있다.

최상은 아니지만 B급 이상인 컨디션의 조코비치를 상대로 완승을 거둔 정현에 대해 칭찬은 아무리 해도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B급 컨디션의 조코비치에게 완승을 거두려면 세계 10위권 정도의 기량은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조코비치가 앞선 32강전에서 21번 시드의 하모스-비놀라스(스페인)를 셋트 스코어 3-0으로 가볍게 물리치고 16강에 올라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양 선수가 압도적으로 상위권을 점하는 남자 테니스에서 동양 선수가 10위권 실력을 보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일본의 케이 니시코리와 레전드로 남아 있는 미국의 마이클 창 정도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10위권 기량을 보인 '유이'한 동양계 선수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테니스 샌드그렌(Tennys Sandgren)과 8강전

남자 테니스는 여자 테니스에 비해 이변이 극도로 적은 편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남자 테니스에서 하위 랭킹이 상위 랭킹 선수를 꺾는 일이 드물다는 뜻이다. 8강전을 펼치는 정현은 50위권 밖이고, 상대 테니스 샌드그렌은 100위권 안쪽인 경우로, 두 사람은 이번 호주 오픈 남자 경기에서 가장 큰 이변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대회 통계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샌드그렌은 8강전에서 정현을 넘어서기 힘들다. 샌드그렌은 1~4회전까지 총 509포인트를 얻고 449점을 내줬다. 1.13점을 딸 때, 1점을 잃은 정도였다. 반면 정현은 4경기에서 441점을 얻고 357점을 실점했다. 1점 잃을 때, 1.23점을 딴 셈이다. 득점력이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물론 테니스는 상대가 있는 경기인데, 정현은 조코비치 외에도 세계랭킹 4위인 알렉산더 츠베레프를 상대하는 등 샌드그렌보다 훨씬 어렵고 랭킹이 높은 상대를 대상으로 경기를 치렀다.

정현은 또 대포알 서브의 츠베레프나 기술적으로 무결점에 가까운 조코비치 같은 플레이 스타일에 관계없이 승리를 이끌어 냈다. 반면 샌드그렌의 상대들은 모두 랠리를 길게 가져가는 스타일이었다. 정현이 최소한 수비에서는 샌드그렌보다 확실히 한수 위라고 할 만한 대목이다.

 정현, 지난 4일 브리즈번 오픈 당시 장면

정현, 지난 4일 브리즈번 오픈 당시 장면 ⓒ EPA/연합뉴스


정현은 이번 호주 오픈이 아니더라도, 세계 남자 테니스계에서 수비력이 가장 뛰어난 축에 속한다. 코트 커버리지가 월등하다는 뜻인데, 정현을 확실히 넘어설 수 있는 수비력은 전성기의 나달과 조코비치, 페더러 정도이다. 조코비치가 정상 상태가 아니므로, 정현은 이번 호주 오픈만 기준으로 한다면 나달, 페더러와 어깨를 나란이 하는 세계 최정상급의 수비력을 보이고 있다.

서브를 필두로 한 공격력을 기준으로 해도, 정현의 우세가 두드러진다. 샌드그렌은 상대 실수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점수를 창출한 위너(winner) 숫자에서 지난 4경기 가운데 2경기에서만 상대를 앞섰고, 다른 2경기에서는 상대보다 위너 숫자가 적었다.

이에 비해, 정현은 지난 4경기 모두에서 상대보다 위너 숫자가 많았다. 강자들을 만나 시종일관 위너가 많았다는 것은 공격력 또한 통계로 볼 때는 정현이 한수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반수는 위라는 것이다.

요약컨대, 피로 누적 등으로 인한 갑작스런 경기력 저하 등의 요인만 없다면, 정현은 샌드그렌 전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통계는 말해주는 것이다.

페더러 넘어설 수 있을까

정현의 이번 대회 경기력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랭킹 1위 나달이 아니라, 2위인 페더러이다. 16강전 대진표가 확정되기까지 페더러가 나달보다 더 우세한 경기력을 보인 점도 있지만, 경기 스타일과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현은 페더러보다는 나달이 상대적으로 상대하기 쉽다.

어쩌면 페더러는 이번 대회 최강의 수비력을 보인 정현의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창을 가진 선수일 수도 있다. 페더러는 스트로크만 해도, 플랫, 톱스핀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여기에 드롭샷과 넷트 플레이 감각이 발군이어서 상대 선수의 리듬을 뺏는데 역사상 그만한 선수도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랠리를 여간해서는 자기 서브권 기준으로 5회 혹은 7회 이상으로 잘 끌고 가지 않는 경기 스타일이어서, 길게 주고 받는 볼이 자주 나올 확률이 떨어진다. 나달은 톱스핀을 주무기로 코트 좌우로 공을 쉴 새 없이 뿌리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경기를 한다. 실제로 정현은 나달이 최고의 기량을 보이는 흙 코트 경기에서도 지난해 크게 밀지 않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줬다.

페더러와 4강전을 치른다는 게 불운이라면 불운인데, 페더러에게도 약점은 없지 않다. 페더러는 우리 나이로 37살, 지금까지 무실 셋트 경기를 펼쳐왔지만, 경기를 거듭할수록 나이를 속이긴 어렵다. 14살 어린 정현이 4강에 오를 경우, 페더러를 지치게 만든다면 승산이 있다.

이번 대회에서 정현에게 승리를 안겨준 수훈 값 샷을 하나만 고르라면 위기에서 받아치기를 할 때 상대 코트 가운데로 보내는 공이다. 구석이 아닌 코트 가운데로 보내는 건 상대적으로 쉬운데, 이를 받는 상대입장에서는 각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랠리를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속된 말로 상대로 끊임없이 '갈아 버리는' 샷, 이 샷으로 정현은 상대의 진을 빼고 끝내는 승리를 거머쥔 것이었다. 정현이 페더러와 만일 4강전을 벌이고, 처음 두 셋트 가운데에서 1세트만 뺏어올 수 있다면, 경기는 예측하기 힘든 국면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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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렸습니다.
정현 페더러 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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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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