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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가 코발트광산에서 유해발굴(2007~2009)하는 모습. 사진출처: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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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광산에서 발굴된 두개골. 사진출처: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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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대원들 중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 보도연맹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경산 중앙국민학교에 도착한 지 2~3일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충북 영동군과 전북 무주군 등지에서 소집되어 온 청년방위대원들이 경북 경산군 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했다. 현역 군인들은 명부를 들고, 보도연맹원들은 앞으로 빨리 나오라고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보도연맹이 주최한) 집회에 참석한 사람도 나와!"라고 하며 다그쳤다.

운동장에 집결한 청년방위대원 중 보도연맹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이들은 집으로 돌려 보내준다는 소리에 무심코 발걸음을 운동장 연단으로 향했다. 청년방위대원들은 면 단위별로 중대를 형성해 집결해 있었다. 대열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학산면 중대의 이규성은 앞으로 나갔다. 황간면 중대의 노병동(당시 25세)은 몇 발짝 앞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섰다.

노병동이 발걸음을 돌린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보도연맹원이 빨갱이인데, 집으로 보내줄 턱이 없을 것 같아" 서였다. 당시에 전선(戰線)에 배치된다는 것은 총알받이가 된다는 의미였다. 즉 집으로 돌려 보내준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이런 사탕발림에 보도연맹원도 아닌 어린 청년이 속아 넘어갔다.

매곡면 수원리 박찬용(당시 17세)은 현역군인에게 "(집회를) 멀리서 본 사람도 해당하나요?"라고 하자, 군인들이 "그렇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나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아저씨도 봤잖아요"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도 데리고 나갔다.

이렇게 연단 앞에 집결한 보도연맹원들은 머리를 빡빡 깎인 채 별도의 교실에 구금되었다. 구금된 지 5~6일 후인 1950년 7월 28일경, 이들은 손이 묶인 채 코발트광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트럭이 아니라, 죽음의 광산이었다.

광산 수직굴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 특무대원(CIC), 헌병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그들을 굴 아래로 떨어뜨렸다. 굴 아래로 떨어진 시신은 수평굴에서 옆으로 떠밀리며 굴속에서 차곡차곡 쌓였다. 영동군 보도연맹원 89명을 포함해, 약 3500명의 민간인이 코발트광산에서 숨졌다.

"내가 인솔한 용화중대원 중에 20여 명이 죽었어요."

강태석(1929년생) 소대장은 자괴심에 빠졌다. 자기가 인솔해 경산 중앙국민학교까지 간 청년방위대원 중 용화면 사람 20여 명이 코발트광산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강태석은 영동군 용화면 출신으로, 수원에 있던 방위사관학교 5기생이다. 권준 대령이 저술한 '작전요무령'을 배우고, 여순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동기생 200명과 함께 한 달간의 교육을 받고, 1950년 5월 31일 소대장으로 임관했다.

청년방위대 제8단(충청북도) 제2지대 영동군 편대(대대) 용화면중대 조동소대(조동리+안정리. 대원 50~60명)에 배치된 것이다. 강소 대장은 조동초등학교 운동장, 마을 공터 그리고 논과 밭에서 대원들에게 목총을 들게 하고 제식훈련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다 6.25가 터졌다. 북한군은 밀물 듯이 남하해, 서울을 점령했다. 국군들은 힘없이 주저앉았고,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6.25 당시 국군 총병력은 9만8000명 이었다. 하지만 7월 1일 육군본부가 수원에 위치했을 때 전사·포로·행방불명 또는 낙오로 인해 지휘가 가능한 군인은 약 4만4000명에 불과했다.(육군본부,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1994)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재의 예비군 격인 청년방위대가 소집된 것이다. 부족한 군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방위대원의 차출은 총알받이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군사훈련이 부족했을뿐더러, 목총을 갖고 훈련을 받았으니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청년방위대 상급기관에서는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청년방위대 영동군 대대장 정환성은 "영동에서 약 1주일간 군사훈련 및 신무기 취급법을 배운 후 읍·면으로 돌아가 향토방위에 임한다"고 했다. 또한 "훈련을 받으면 기간병이나 조교를 시켜준다"고 했다. 이와 같은 감언이설에 속은 대원들은 자원해 영동에서 훈련을 받았다. 영동읍에서 훈련을 받으러 가는 대원들을 인솔할 장교가 필요했다.

용화중대 이경승 중대장이 강 소대장을 불렀다. "강 소위는 미혼이니까 적임자다. 대원들을 인솔해 영동읍에 갔다 오기 바란다"고 했다. 강 소대장은 7월 13일경 65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영동으로 갔다. 중국인 천성태의 집과 읍내 여관에서 짐을 풀고 1주일간 훈련을 받았다. 영동읍 천변에서 수류탄 투척, 각개전투, 제식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받고 며칠 후 밤 10시에 영동역으로 집결하라고 명령을 받았다. 영동역에서 화차를 타고 경산 중앙국민학교로 이동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분류할 때만 해도 강소대장은 보도연맹원들을 정말 집으로 돌려보낼 것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강소대장의 인솔을 받은 용화면 중대원 중 20여 명은 코발트광산에 묻혀야만 했다. 강태석은 이 기막힌 사연을 60년 가까이 가슴속에 안고 살았다. 마치 자신의 책임인 듯 자괴심만 커졌다. 그러다가 2008년 영동군청에서 58년간 가슴에 품고 지냈던 피맺힌 사연을 증언했다.

용화면 조동리에서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이갑문(당시 29세)이 있다. 그의 아들 이경희(75세. 용화면 조동리)는 아버지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10년간 뛰어다녔다.

죽음의 광산에서 살아난 이들

코발트광산에서 살아나온 영동군 학산면 서산리의 이규성
▲ 이규성 코발트광산에서 살아나온 영동군 학산면 서산리의 이규성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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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광산 수직굴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총을 쏴, 굴 아래로 떨어진 사람 중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영동군 양강면 가동리 정관택(1931년생)과 학산면 서산리 이규성(90세·학산면 서산리)이 그 주인공이다. 정관택은 약 20년 전에 사망했고, 이규성은 현재 학산면에 거주하고 있다.

이규성의 증언에 의하면, 6.25 후 영동읍에서 훈련을 받던 청년방위대원들에게 하나의 고역이 있었다 한다. 1주일 훈련을 받는 동안 야간에 방위대원 중 보도연맹원들을 분류해 집단매질을 가한 것이다. 현재 영동농협 맞은편 자리인 5신병 교육연대 사무실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한 것이다. 이규성도 이때 심한 매질을 당했다고 한다.

경산 중앙국민학교에서 코발트광산으로 이송된 이규성은 양손이 묶였다. 군인들이 보도연맹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발사"라는 소리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이규성은 다행히 총에 맞지 않았다. 다행히 굴을 빠져나왔지만 옷은 동료들의 피로 칠갑이 되었다. 개울의 흙탕물에서 옷을 빨았지만, 핏물이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다.

3500명의 한 맺힌 죽음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코발트광산에는 3500명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 한국전쟁 직후에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경산·청도·대구·영동지역 보도연맹원 1천 명과 대구형무소 정치범 2,500명이 학살된 곳이다.

이 곳에서 영동군 보도연맹원 80여 명도 뼈를 묻었다. 영동군 보도연맹원을 경산 코발트광산에서까지 죽일 정도의 노력으로, 이들을 후방으로 이송해 격리시켰다면...


태그:#청년방위대, #경산코발트광산, #보도연맹원, #용화면, #강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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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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