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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해석이 저마다 틀린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가? 새해 벽두부터 일개 은행이 만든 달력에 나온 인공기를 두고 어떤 정치집단은 '안보 불감증'을 이야기한다. 반면, 논란이 된 그림을 심사한 이들은 '평화를 의미하는 통일나무'라고 했고, 많은 이들은 어린 초등학생에게까지 '색깔론'을 덧입히는 정치권의 행위를 통탄한다.

이 논란을 역사라고 한다면 먼 훗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그것은 역사가가 '책'에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달렸다. 어떤 생각이나 사실을 글이나 그림 따위로 종이 위에 나타내고, 그 종이들을 한데 꿰맨 물건을 책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책'을 통해 역사를 본다.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고 재구성된 사건들을 책을 통해 보면서 일어났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나열한 역사라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저마다 다른 관점과 목표를 갖고 과거를 기록했다. 그들이 선택한 사건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그 기록들이 일어났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나열했을 거라는 믿음은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길진숙 저, 북드라망 출판
▲ 삼국사기, 역사를 배반하는 역사 길진숙 저, 북드라망 출판
ⓒ 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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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역사를 배반하는 역사>는 사건과 진실은 역사책만큼 다르고 많다는 사실을 말한다. 저자 길진숙은 역사가가 과거를 재구성하는 목표와 이유가 N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삼국사기를 통해 풀어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삼국사기가 사대적, 반민족적이며, 사료가 편파적이라는 사학계의 일반적 시선과 마주한다. 누군가 한 역사책에 드리운 가혹할 정도의 비난과 폄하를 변명하려 들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저자는 무모할 수 있는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저자가 삼국사기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풀기 위한 변명을 시도한 이유는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기 때문이며, 다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책이기 때문이다." -8쪽

근대 사가들이 <삼국사기>에 새겨 놓은 낙인은 민족의식이 결여된 역사책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편찬목적은 따져보지도 않고 단군조선과 상고시대를 제외시킨 사실에만 주목한다. 단군의 얼을 이어받은, 한겨레라는 뿌리의식은 김부식이 상고사를 배제한 이유를 살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늘날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는 절대화된 단일민족의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한 나라, 한 민족이라는 단순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국사기와 그 편찬자를 옹호하는 일은 결코 만만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저자가 삼국사기를 변론하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역사책들은 근대 역사관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 의해 기술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사대에 찌든 관변 역사서라고 비난받는 삼국사기는 한반도라는 심상지리 안에 구축된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다룬 역사책이 아니다.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은 삼국보다 앞선 시기의 역사책을 기술할 생각을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라는 세 나라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기록이다. 삼국의 생장소멸을 다룬 역사책인 것이다. 즉 김부식의 나라 '고려'가 세워지기 이전의 기원, 즉 '고려'라는 하나의 국가로 병합된 '세 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36쪽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통해 중국에 대한 고려 제국의 자존심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은 삼국사기에 대한 통념을 거부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를 다루는 삼국사기는 '한민족'이라는 민족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김부식은 한민족의 정체성이 아니라 고려인의 정체성을 그려냈다.

"고려시대 인종과 김부식에게는 하나의 민족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한반도상의 세 나라를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를 정립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88쪽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기술한 추동력은 제국의식이었지, 민족의식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민족'이라는 혈연적 연대감 때문에 통일을 이야기하는 대한민국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삼국은 치열한 경쟁 국가요, 중국과 왜보다 더한 원수의 나라다. 고구려는 신라, 백제를 동쪽 오랑캐 즉 '동이'라 불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민족은 없다. 빼앗고 뺏기고, 죽이고 죽는 관계 속에 놓여 있던 삼국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남북이 서로 못잡아 먹고 으르렁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신라인들이 백제나 고구려에 대해 갖는 적개심은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는 적개심에 비할 수 없이 뿌리 깊었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이런 사실은 한반도가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핏줄 때문이 아니라 평화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대이기 때문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보면 신라나 백제나 중국이나 왜나 고구려에게는 모두 똑같은 비아非我일 뿐이다. 한반도 상에 이웃해 있다고 민족적 동질감(?)이 있으리란 건, 전적으로 우리의 오해이다." -93쪽

제국주의의 광기 속에서 민족을 지키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신채호가 묘청을 혁명가로 불러내면서 김부식은 완벽하게 패배하고, 김부식은 나라를 말아먹은 역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했다. 김부식은 문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묘청의 난을 진압하여 정치적으로 승리했던 고려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문무를 뛰어나게 겸비하여 현존 최고의 사료를 남겼지만, 삼국사기는 그에게 '살아 영광, 죽어 오욕', '살아 승리, 죽어 패배'라는 결과를 안겼다. 한반도의 기원이 아니라 고려의 기원을 더 중시했던 김부식은 후대의 인색한 평가가 못내 억울할 수 있다. 고려 제국의 자존감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자로 치부되고 있으니 말이다.

"제국주의의 광기 속에서 민족을 지키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신채호가 김부식을 오욕스럽게 취급한 것은 그 시대가 만들어 낸 어쩔 수 없는 정서였다. 김부식에 대한 매도는 '식민주의'의 광풍 때문이었던 것이다." -50쪽

제국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신채호의 진정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덕택에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투사들이 있었고, 남북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 73주년이 되는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주민 200만 시대를 살고 있다.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사회 문화적 인식에 우려를 표했던 적이 있다. 다민족다인종사회에서 지나친 민족의식 강조는 오히려 사회통합을 가로막을 수 있다. 반면, '고려'라는 정체성을 강조했던 김부식의 제국의식은 이주민 200만 시대에 더 적절할 수 있다.

역사라는 기록을 해석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이들의 몫이다.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단순화하려 한다면 편협한 해석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기대하고, 알고 있던 상식에 의문을 제기한 <삼국사기, 역사를 배반하는 역사>는 '한민족'을 강조했던 시대를 넘어서는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 방법으로 저자는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을 사료가 아니라 독서물로 받아들이고, 역사소설을 읽듯 읽어 내려갔다고 밝혔다. 이러한 시도는 자칫하면 사료라는 기록물을 한낱 (옛날)이야깃거리로 전락시켜 역사에 대한 신뢰를 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 다만, 역사는 역사가의 마음을 헤아리며 읽어야 한다는 면에서는 뜻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무엇을 사실로 구성하는지가 역사책 각각의 특이성이라면, 역사가들은 어떤 사건을 '사건'이라 규정하며 저마다 다른 역사 만들기를 해왔다. 그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마침 문화재청은 경북 경주 옥산서원에 있는 보물 제525호 삼국사기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보물 제723호 삼국사기 완질본을 국보로 승격한다고 4일 밝혔다. 삼국유사와 달리 국보가 없던 삼국사기의 국보 승격으로 관심이 높아진만큼, 이참에 삼국사기를 제대로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삼국사기, 역사를 배반하는 역사 - N개의 키워드로 읽는 역사책

길진숙 지음, 북드라망(2017)


태그:#단일민족, #한민족, #삼국사기, #김부식, #이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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