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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 멀어져 간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속 '하루'가 요즘은 일 년처럼 들린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 새해가 온다. 어제 세운 계획을 오늘 수정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다시 목표를 세운다. 금연, 금주, 다이어트, 회화 학원 등록 등등. 헬스장을 운영하는 지인의 얘기로는, 1월에 무더기로 등록하는 사람들 중에 2월까지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1월을 가장 사랑한다.

새해가 밝아 오면 마음은 누구나 비슷하다. 직접 가서 보든 달력 속의 사진으로 보든, 일출을 보면 그 정기가 나한테만 전해지는 기분이다. 지는 한 해야 이제 어쩔 수 없지만 새해에는 더욱 건설적이고 규칙적이며 희망적이자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현실의 땅에 발을 딛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더라도. 하지만 뭐 어떤가? 이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신바람이 나게 살 것인가.

평범한 소시민의 한 사람인 나 또한 12월 말이 되면 궁둥이가 들썩인다. 새해에는 특별하게 살아 보리라. 새 인생을 얻으리라. 온갖 목표와 계획이 세워진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바람 따윈 애초에 없다. 개중에 하나만 걸려라. 뭐 적어도 한 가지는 이루어지겠지, 라는 기대감만으로 행복하다. 그럼에도 진정 바라는 것이 한 가지씩은 있다. 이것만큼은 꼭 이루고 싶은 것. 내게도 물론 그것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018년, 새해 목표 1순위는 신춘문예 '시' 부문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도 한때는 그 흔한 문학 소년이었다. 장래 희망이 시인일 만큼 자질과 노력은 없었지만, 시집 한 권쯤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우수에 젖은 학생이었다.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시를 쓰는 일을 중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에게 바친 시... 처절한 대가

사십대 중반에 다시 만난 시, 그리고 시집. 시인의 감성은 잊혀지는 게 아니고 굳어가는 것이다.
▲ 시집을 다시 읽다 사십대 중반에 다시 만난 시, 그리고 시집. 시인의 감성은 잊혀지는 게 아니고 굳어가는 것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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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건은 감수성이 최고조에 이르던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문예반 연합회 주최로 열린 백일장에서 또래의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했다. 객관적 기준의 미인은 아니지만 뽀얀 얼굴에 안경 낀 단발머리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나와 살짝 눈이 마주칠 때 방긋 웃어준 그 상큼한 미소. 아, 그녀도 내게 관심이 있구나. 착각은 언제나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그녀를 향해 끓어오르는 마음을 시에 담았다. 선배를 통해 그녀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약속한 날 두통을 핑계로 조퇴를 했다. 여학교 정문 앞의 교복 입은 남학생은 동물원 원숭이 이상의 관심거리다. 조롱 섞인 휘파람과 진심 없는 응원 따위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볼 빨간 원숭이는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 하염없이 그녀만 기다렸다.

전교생이 하교하고,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하늘 높이 뜬 달이 나를 비웃을 때쯤 상황이 파악되었다. 버스 열 정거장 거리를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 불 꺼진 방에서 라이오넬 리치의 < hello>를 무한 반복으로 틀어 놓고 울었다(그 당시의 영어 실력으로는 모든 가사가 절절하게 내 심장을 후벼팠다. 요즘 다시 들으면 'hello'만 들린다).

나중에 선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학교 앞에서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웃었던 건 그녀가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 번 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오빠를 부른다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동생을 둔 오빠들은 아주 무섭다. 냉철한 상황 판단으로 그녀를 단념했고, 시도 잠시 접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녀 덕분에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에.

아직은 낯간지러운 수준이지만 무언가를 적어내려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때가 있다.
▲ 시 습작 아직은 낯간지러운 수준이지만 무언가를 적어내려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때가 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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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건은 대학 신입생 때다. 수업도 별로 없고 남는 시간에 다시 낙서처럼 시를 쓰기 시작했다. 술 한잔 걸치고 써 내려간 시들은 밤새 두보가 다녀간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 정도면 시집을 내도 충분하리라. 고등학교 때부터 끼적이던 시들을 모아 출판사에 보냈다. 자아도취는 언제나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며칠 후 돌아온 소포 안에는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귀하의 글들은 저희 출판사의 기획 방향과 맞지 않을 뿐이지 좋은 글들입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갈고 닦아 한국 시 문학계의 빛나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완곡어법을 그때 처음 이해했다. 기획 방향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문학적 자질은 남다르지 않았지만 눈치는 꽤 빠른 편이다. 부족한 재능에 대한 부끄러움이 그날로 시를 접게 했다.

40대에 다시 든 연필... 꿈은 이루어진다

어느덧 늙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안이 오고 손이 떨리고 얼굴에 검버섯이 하나둘 생기고 있다. 석양이 진다.
▲ 시 습작 '석양' 어느덧 늙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안이 오고 손이 떨리고 얼굴에 검버섯이 하나둘 생기고 있다. 석양이 진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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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릴 적 친구라고는 종이와 연필뿐이던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다른 친구가 생기긴 어렵다. 가끔 시상이 떠오를 때면 넋 나간 사람처럼 적어두었다. 세 번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문과의 피가 흐르는 의대생이 제대로 공부할 리가 없다. 학교 수업보다 연극부와 편집부 일이 더 재미있었다. 학점은 당연히 저공비행이었고 그러다 마침내 대공 미사일 한 방을 맞았다.

유급 결정을 통보받던 날,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하숙집 옥상에 올라가서(뛰어내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간 써 두었던 모든 글귀와 모아둔 시집들을 태웠다. 너희들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했다는 듯 원망을 해대며.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 짝이다. 그 날 이후로 시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쓸데없는 오기는 언제나 후회라는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사십 대 중반이 되고 나니 그나마 간직하던 포도알만 한 감성은 화석처럼 굳어졌다. 말랑하던 심장은 푸석해져 먼지만 날린다. 그때 적어두었던 청춘의 비망록이 남아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문득 시가 그리워졌다. 아니, 시를 쓰던 여드름투성이의 소년이 그리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때 마침, 아는 지인으로부터 캘리그라피로 시를 한 편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시인 '백석'이 나에게 걸어온 날이다.

지인의 부탁으로 시를 적으며 시가 내게로 걸어 들어왔다.
▲ 백석 시인의 '백화' 지인의 부탁으로 시를 적으며 시가 내게로 걸어 들어왔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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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라피를 연습하면서 백석의 '백화'라는 시를 읽고 또 읽었다. 투박한 다섯 줄짜리 시를 단내가 날 때까지 씹어 삼켰다. 시를 읽을수록 다시 피가 돌고 몸이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중년에 다시 찾은 감성. 이번에 놓치면 남은 인생을 좀비처럼 살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연필을 깎고 노트를 펼쳤다. 나는 이제 다시 시를 쓴다.

시라고 해 봤자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게 전부다. 많이 읽고 흉내내 보고 그게 습작의 유일한 밑천이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저만치 떨어져 머뭇거리며 따라오던 문학도의 꿈이 이제야 제 길을 찾았다. 목적지를 정하고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고 싶다. 그간 방치했던 서운함에 대한 보상이랄까? 이것이 2018년 신춘문예에 도전하고자 하는 나의 새해 목표이자 이유다. 여러분들도 새해에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성취하길 바란다.

하루에 한 편씩 꾸준히.
▲ 시 습작 하루에 한 편씩 꾸준히.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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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새해 소망, #신춘 문예, #라이오넬 리치 헬로, #백석, #유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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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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