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협에서 산 춘장의 색은 검지 않았다. 캐러멜 색소를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춘장을 볶을 땐 춘장보다 기름을 두 배 정도 넉넉히 넣어야 한다. 약한 불에서 춘장을 10분 이상 튀기듯 볶았다. 양파, 양배추, 감자 등 볶은 채소에 기름에 튀긴 춘장을 넣어 뒤적이다가 물을 붓고 끓였다. 마지막에 전분 물을 풀어 넣으면 연갈색의 걸쭉한 짜장소스가 된다. 소스를 밥에 부어 한술 뜨려는데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춘장을 산 건 뱃속 아기 때문이었다. 입덧으로 두 달 가까이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있었다. 위가 비어 있으면 속이 더 쓰리고 메스꺼움도 심해서 그때그때 덜 역겹게 느껴지는 것들을 조금씩 목구멍으로 넘겨야 했다. 굶주림과 구토의 지옥에서 버티던 14주차, 드디어 입덧이 서서히 가라앉는 기미가 보였다. 반갑게도 먹고 싶은 것도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입맛을 당긴 것은 짜장면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캐러멜색소 같은 식품첨가물이 행여 아기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되었다. 마흔이 다 된 노산에 출산 경험도 없고, 게다가 임신 초기여서 작은 것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고 마냥 조심스러웠다. 몇 번을 망설였지만 끝내 중국집 전화번호를 누르지 못했다. 대신 생협에서 국산 춘장을 주문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짜장소스를 듬뿍 얹어 밥 한 그릇 뚝딱 비울 수 있겠지. 춘장이 올 날을 기다리며 입맛을 다셨다.
며칠 후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했다. 초음파 화면을 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양막(아기집)은 커졌는데... 아기가 하나도 자라지 않았네요." 계류유산이라고 했다. 아기 심장은 뛰지 않는데 여전히 태반과 연결돼 있어 내 몸은 아직 '임신 중'이라 여기고 있는 상태. 의사가 말했다.
"수술로 '제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산모가 위험해져요." 집에 돌아오니 현관 앞에 상자가 놓여 있었다. 병원에 간 사이 생협 물품이 배송된 것이다. 물건들 사이에서 춘장이 나왔다. '이제 필요 없는데. 반품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그냥 냉장고 안으로 쑥 밀어 넣어버렸다.
왜 자라지 못한 걸까... 그날 밤은 길었다 그날 밤은 길었다. 낮에 본 초음파 영상이 자꾸 떠올랐다. 왜 자라지 못한 걸까. 어디가 불편했을까. 많이 힘들었을까... 눌러 온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속도 메스꺼웠다. 입덧이 힘들어도 아기를 생각하며 참았는데 지금 이 메스꺼움은 아무 쓸모가 없지 않나. 괴로울 이유도, 견딜 이유도 모두 사라진 지금, 이 입덧은 민망하고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아기와 내가 함께 만들고 겪어온 이 모든 변화들이 곧 사라질 거라니 황망했다. 동그랗고 단단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나와 함께 한 14주의 시간이 부디 너에게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기를. 귓속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춘장과 채소들을 꺼냈다. 아직 뱃속에 아기가 있다. '너랑 함께 먹으려던 것이니 헤어지기 전에 먹자.' 아기의 영혼에 바치는 마음으로 짜장소스를 볶아 짜장밥 한 그릇을 최선을 다해 먹었다.
며칠 후 나는 어느 뒷골목의 산부인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수술을 위해 약을 집어넣고 아픈 배를 부여잡고 열 시간 동안 침대를 뒹굴며 아기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수술대에 누워 전신마취를 했다. 마취가 살짝 깰 무렵이었나 보다.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내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아기와 이별했다.
3년이 훌쩍 지났지만 생각하면 여전히 아프다. 상처 때문인지 아기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출산을 경험한 많은 여성들은 아기를 낳은 시기가 다가오면 산후풍 증상이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희한하게도 유산을 한 그 달엔 몸이 붓고, 쑤시고, 생리에 이상이 온다. 내 몸이 그 날을 기억하는 건지, 심리적인 이유인지 알 수 없다. 원인이야 어떻든, 더 많이 쉬고, 내 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유산의 아픔을 겪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의 인사를 보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린 글을 보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