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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졸의 구로공단 여공이 갓 상경한 손수레 상인과 결혼했다. 여기저기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인 왕십리 달동네에 구멍가게를 열고, 아이들을 낳아 가게 안에서 길렀다. 눈이 내리면 길을 돌아 집에 가야 했던, 그 높디높은 달동네로부터 뉴타운 재개발이 시작됐다. 밀려난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조용히 흩어졌다. 동네가 험해지고 인기척이 없어질 때까지 버티던 가게의 마지막 불을 끈 날, 여공이었던 가게 주인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이후 옮겨간 곳에서 계속 장사를 하다 3년 전 권리금도 받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아랫동네 SSM(기업형 슈퍼마켓)의 공세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공의 막내자식이다.

옛사람들이 남긴 글들을 읽고서야 겨우, 내가 겪은 일들을 알았다. 자본 권력에 의해 장소를 상실하고 뿌리를 뽑힌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생겼다. 그리고 3년 전 제주에 정착했다. 어디 출신이냐는 물음에 항상 제주가 첫 번째 고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살고 싶은 곳으로 꼽는 제주에서도 뿌리내림이 쉽지가 않다. 나는 제주가 제 것을 잃어가고, 도민들이 장소를 상실하는 기척을 예민하게 느꼈고,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뿌리를 뽑혀본 사람이 가지는 본능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빠른 속도로 난개발과 군사기지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짓겠다며 시작된 일들이 지금 성산읍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2015년 11월, 국토부는 제주 성산읍 온평리, 신산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5개 마을 일대에 24시간 운영되는 두 번째 국제공항을 짓겠다 발표했다. 강정 해군기지 준공을 3개월 앞둔 때였다. 관광 인프라를 확대해야 한다며 20년간 느린 호흡으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한순간 신규 공항 건설 계획이 나온 것이다. 그것도 20년간 단 한 번도 예정부지로 검토된 적 없는 곳에. 제주도정은 국토부 발표 바로 다음 날 적극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제주도민은 물론 3000명이 넘는 예정부지의 주민들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야 사실을 알았다.

난산리 주민 김경배씨(제주 제2공항 반대 성산읍 대책위원회 부위원장)도 마찬가지다. 노모와 함께 평생을 한곳에서 살았다. 포크레인 기사가 직업이었지만 지금은 '대책위 부위원장'이다. 지난 2년간 김 부위원장은 제2공항 추진 근거인 사전타당성 조사 보고서에서는 다루지 않았거나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싸워왔다. 보고서는 2025년에 4000만 관광객을 제주에 들이겠다는, 도민과 전혀 합의되지 않은 관광 목표를 전제로 쓰였다. 제2공항 건설이 아닌 다른 대안들, 기존 공항 확충이나 현상 유지 등에 대한 분석은 고작 몇 페이지로 일축됐다. 활주로를 내기 위해 오름 10여 개를 수십m씩 깎아내고 천연 동굴들을 매립해야하는 사실은 적히지도 않았고, 다른 부지와 비교한 기상 정보 데이터도 조작되어 있었다. 국군방송에서는 제주 제2공항에 공군부대를 창설할 거라는 뉴스들을 내보냈다.

가을내내 단식을 하면서 1인 시위를 병행했던 김경배 부위원장
 가을내내 단식을 하면서 1인 시위를 병행했던 김경배 부위원장
ⓒ 송동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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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생계 수단인 포크레인을 팔고 2년간 국토부와 청와대, 제주도정을 직접 찾아다녔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의 동의 한번 없이 건설을 강행하는 데 문제를 제기해왔다. 2년간 국토부와 제주도정은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보상 절차를 밟겠다고 앵무새처럼 말했다. 그 동안에도 공무원과 사복 경찰들을 동원한 주민 설명회와 연계된 개발 정책 발표가 이어졌다. 반대 활동의 동지가 된 강정마을 활동가들이 습관처럼 말했다. "10년 전 강정과 똑같아요."

오는 28일까지 국토부가 제주 제2공항 기본계획수립 용역을 발주하지 않으면, 예산이 불용된다는 소식을 들은 김 위원장이 10월부터 곡기를 끊었다. 목숨을 걸고 국토부와의 협상 테이블을 만들어 기존 부실 용역에 대한 재검증과 사전 타당성 조사를 다시 해달라, 그 후에 기본계획수립 절차를 밟으라 요구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에게 대책위와 뜻을 함께해달라고 호소했다. 당장 위원장을 먹여야 했으므로, 국면의 속도가 빨라졌다.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정당이 모여 반대 범도민행동을 조직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뿌리 뽑힌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옆에서 함께 굶었다. '뭐라도 하자'라는 이름의 시민 모임이 구성돼 각종 문화제를 열었고 릴레이 만화, 그림, 노래 등을 남겼다. 하지만 국토부는 강행 입장을 고수했고, 42일 단식의 끝은 응급실행이었다.

제주녹색당도 서울까지 올라가 직접행동을 통해 김현미 국토부 장관과 면담을 했다. 단식 주민의 존재와 도민 사회에서의 소요도 알고 있지만, 제주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소속 위성곤, 강창일, 오영훈)과 제주도지사를 통해 항상 도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2공항 건설은 국회의원뿐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의 개발 공약이었다. 대의제를 통하지 않은 시민의 목소리는 국가권력에는 한낱 소문일 뿐이다. 몸을 추스르자마자 김 부위원장은 대책위 사람들과 함께 서울로 갔다. 지금도 광화문에서 청와대를 바라보며 천막 농성 중이다.

단식 투쟁의 상징이었던 제주도청 앞 천막은 현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순번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 나를 비롯해 난생처음 천막 노숙을 해본다는 시민들이 대부분이다. 서울의 천막에서는 KBS 노조와 세월호 천막 등, '이웃 천막'들이 매일 몰려든다고 했다. 군사기지화 속에 밀려나는 제주도민과 성산읍 주민을 걱정하는 시민들은 죄다 천막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국가는 여기에 없다. 뿌리를 내린 곳에서 내쫓기지 않고 사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인권이라 부른다. 그 뿌리를 뽑은 자리에 국가가 비집고 들어선다. 늘 같은 방식으로 대추리를, 강정을, 밀양을, 소성리를 잃었다. 우리는 그것을 국가폭력이라 부른다. 그렇게 들어선 제주 제2공항은 누구를 위한 하늘길인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키고 있는 제주도청앞 천막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키고 있는 제주도청앞 천막
ⓒ 김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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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제주 제2공항, #제주공항, #김경배, #제주녹색당,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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