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의 한 시골 마을에서 조그마한 이발소를 운영하는 모금산(기주봉 분)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집-이발소-수영장-호프집만 오가는 그의 하루는 눈감고도 저절로 찾아갈 정도다. 하지만 암 선고를 받은 이후 모금산은 서울에서 영화를 만드는 아들 스데반(오정환 분)과 아들의 여자친구 예원(고원희 분)을 불러들여 다짜고짜 영화를 찍겠다고 한다.

평소 아버지 모금산과 거리를 두고 살던 스데반은 영문도 모른 채 시나리오 하나 툭 던지며 영화를 만들자는 아버지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오히려 스데반과 관계가 소원해진 예원이 모금산의 영화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한 장면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한 장면 ⓒ 영화사 달리기


임대형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영화에 대한 영화'다. 생전 영화 한 편도 안 봤을 것 같은 중년의 남성 주인공은 청년 시절 자신이 즐겨 보았던 고전 무성 영화의 캐릭터와 형식을 차용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시나리오 제목만 봐도 찰리 채플린을 오마주한 느낌이 드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는 현재가 아닌 과거 추억에 머물러 있는 중년의 아버지 모금산의 현실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가족을 위해 평생 재미없게 살았던 아버지와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 상경한 아들 스데반의 삶도 별 볼 일 없기는 매한가지다. 명색이 영화감독인데 영화를 찍지 못하는 스데반은 여자친구인 예원과도 헤어질 위기다.

자리를 못 잡고 방황하는 남자친구 곁을 묵묵히 지키는 예원과 거리를 두는 쪽은 오히려 스데반이다. 나이가 들도록 이룬 것이 없기 때문에 (여자친구인) 예원을 책임지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예원과도 헤어지는 것 또한 원하지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스데반의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것은 예원이다. "내 행복은 내가 결정해."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캐릭터들, 가장 인상적인 등장인물은?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한 장면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한 장면 ⓒ 영화사 달리기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본 관객들 대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를 꼽으라면 모금산을 이야기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캐릭터는 고원희가 맡은 예원이다. 우유부단으로 점철된 스데반과 달리 시원시원하면서 진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예원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한없이 적극적이다. 오히려 스데반이 매사 똑 부러진 예원에게 의지할 정도다.

모금산 또한 아들보다 예원을 더 믿고 의지하는 쪽이다. 하지만 모금산은 예원에게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식의 부담은 안겨주지 않는다. 모금산이 봐도 예원은 아들 스데반에게 있어 한없이 과분한 여자다. 스데반과 예원이 '이미 틀어진 사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모금산은 스데반과 예원과 함께 자신의 첫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예원 외에도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는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가 하나 더 등장한다. 전여빈이 맡은 자영 역이다. 영화 초반, 홀로 수영하는 모금산에게 말을 거는 자영은 예원에 비해서 비중은 적지만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선사한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산에게 말을 걸고 모금산의 단골 호프집에서 같이 술을 마시긴 했지만, 금산과 자영의 관계는 그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한다.

단골 호프집 사장(유재명 분)과도 말을 섞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유독 힘들어하는 모금산은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는 자영과도 쉽게 친해지지 못한다. 금산이 앓고 있는 병 때문일 수도 있고, 딸 같이 어린 자영이 부담스러워서 멀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소 뜬금없는 등장으로 보일 수 있는 자영은 소통의 부재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금산의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영화 속 예원, '대상화된 여성'에 머무르지 않고 주체적인 태도 보여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한 장면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한 장면 ⓒ 영화사 달리기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주요 남성 캐릭터로 등장하는 모금산과 스데반은 모두 무언가가 결핍된 것 같은 무기력한 일상을 살고 있다.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보이고, 특히 스데반 같은 경우에는 예원에게 기대려는 심리가 강하다. 하지만 예원과 자영은 누군가에 기대려고 하기보다, 자신들의 힘으로 상황을 바꾸어보고자 한다. 금산과 스데반 간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도무지 진척이 되지 않았던 영화가 무사히 완성된 것도 예원 덕이요, 갈등의 골이 파일 대로 패인 두 부자의 관계에 숨통을 틔게 한 것도 예원의 공이 크다.

하지만 예원 덕분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를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던 모금산은 이미 아들에게서 마음이 떠난 예원을 잡지 않는다. 금산에게서 예원은 아들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함께 영화를 만든 스태프이자 동료이며, 친구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서 예원은 단순히 남성 주인공이 애정을 갈구하는 대상화된 존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극 중 예원은 모금산과 함께 영화를 만든 촬영 감독이다. 그리고 영화는 모금산의 영화 만들기를 통해 달라진 남성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예원을 스데반의 여자친구가 아닌 영화인으로 남기고자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여성 캐릭터를 누군가의 아내, 애인으로 국한하는 차원을 넘어 주체적인 태도로 자신과 주변의 삶을 바꾸는 인물로 그려냈다.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볼 가치가 충분하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포스터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포스터 ⓒ 영화사 달리기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진경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neodol.tistory.com),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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