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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만에 먹어 보는 아침밥이었다. 지난 7일 목요일 오전 8시께, 주방 한쪽 식탁에 홀로 앉아 참으로 오랜만에 안온하게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손자는 제 어미와 함께 건넛방에서 아침잠에 취해 있었고, 난 어깨에 힘을 빼고 느긋한 기분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10월 초 손자가 내려온 뒤 처음 사나흘은 아예 하루 한 끼 식사하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갓난쟁이 손자 녀석이 태어나자마자 혈변으로 인해 중환자실에서 일주일 가량을 보낸 직후 외가를 찾은 탓에 처음에는 잔뜩 긴장해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밥 먹을 짬을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손자의 오른손 손금. 식구들 가운데 나와 가장 닮았다. 평소 주먹을 쥐고 있어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손금 같은 게 나와 가장 닮았다는 사실에 묘하게 기분이 좋다.
 손자의 오른손 손금. 식구들 가운데 나와 가장 닮았다. 평소 주먹을 쥐고 있어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손금 같은 게 나와 가장 닮았다는 사실에 묘하게 기분이 좋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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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를 맞은 첫 사나흘 뒤쯤부터는 줄곧 하루 두 끼 식사를 했다. 대략 오전 11시쯤 딸이 손자를 데리고 노는 시간에, 그리고 오후 5시 30분께 가게에서 돌아온 직후 주섬주섬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가지를 꺼내다 후다닥 먹어치우곤 했다.

"아빠가 그렇게 식사를 하면 내가 미안해서 오래 못 있어요.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우리를 보살피면 내가 너무 부담스러워요."

딸은 자기 때문에 내 식사 리듬이 깨지자, 좌불안석이었다.

"괜찮아. 너도 보다시피 아빠가 지금은 겨울이라 농사일 하는 것도 없잖아. 힘 안 쓸 땐 조금 덜 먹는 게 오히려 낫다."

식사며 잠자는 시간, 구멍가게 돌보기까지 하루가 모두 손자 중심으로 재편됐다. 하지만, 변화된 생활 리듬으로 인해 몸에 이렇다 할 이상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신생아 특유의 '기운' 때문인지 손자가 내려오기 전보다 집중력 등은 되레 더 좋아지는 듯했다.

손자는 우리 집으로 온 지 두어 달이 다 돼가면서, 부쩍 컸다. 단순히 키와 체중만 는 게 아니라, 밤낮을 보다 또렷하게 가리기 시작했고, 저 혼자 길게는 한 30분씩 놀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보살핌 덕분이지만, 나름 한몫을 한 나로서도 아주 뿌듯했다.

서울의 제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푹신한 등받이에 반쯤 누운 자세의 손자. 생후 50일을 지나면서 밤낮을 가리고, 혼자 노는 시간이 늘어나는 등 키우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서울의 제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푹신한 등받이에 반쯤 누운 자세의 손자. 생후 50일을 지나면서 밤낮을 가리고, 혼자 노는 시간이 늘어나는 등 키우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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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를 두어 달 돌보면서 몸은 조금 고단했지만, 심적 충족감은 육체적 피로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컸다. 그러나 딸, 사위, 아이 엄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만의 정신적 고통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찾아오는 불안과 슬픔

내가 유독 불안해지는 때가 있다. 매사 그런 게 아니라 어떤 대상인가를 가엽다 혹은 불쌍하다고 인식하는 순간 공황 같은 게 찾아오는 것이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입이 마르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지난 두어 달 손자를 보면서 대여섯 차례쯤 혼자 눈물을 쏟은 것 같다. 한번은 눈이 붉어진 나를 보고 딸이 "아니 아빠는 손자에 그렇게 감격해. 그렇게 좋아?" 하고 놀리듯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으응... 좋고, 좋고말고"라며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사실 나는 그때 반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손자를 껴안고 있거나, 잠을 재우며 물끄러미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어느 때인가는 느닷없이 입양아들에 관한 얘기들이 떠오른다. 예컨대 젖먹이로 혹은 두세 살 때 미국 어딘가로 입양됐다가 뒤늦게 한국을 찾았다든지, 미국에서 신산한 삶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추방돼 온갖 고초를 겪고 있다든지 하는 사연들 말이다.

이웃 동네에 사시는 손자의 외증조부모 등이 손자가 서울로 돌아가기 전 우리 집에 모여 조촐한 환송 저녁식사 모임을 가졌다.
 이웃 동네에 사시는 손자의 외증조부모 등이 손자가 서울로 돌아가기 전 우리 집에 모여 조촐한 환송 저녁식사 모임을 가졌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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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아동들에 대한 이런 얘기들을 떠올리면 즉각적으로 영아 유기 등과 관련한 뉴스들이 연상된다. 최근 이 추운 겨울 밭에서 사망한 채로 젖먹이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듯이, 버려져 유명을 달리한 이러한 영아들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다.

내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손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세상의 수많은 버려진 젖먹이들의 존재가 상상의 영역으로 쉼 없이 밀려든다. 나는 소리 죽여,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으려 하지만, 한번 뒤죽박죽된 내 뇌는 쉽게 평상 수준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 예쁜 이 녀석에게 부정적인 기운을 전달하면 안 되지" 하며 애써 참으려 해도, 보통은 한 시간 안팎 나는 온전한 이성을 회복하지 못한다. 특히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 캄캄한 시간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은 극도의 불안감이 엄습한다. 세상에 나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어쨌든 혹독한 고질이다.

대개는 연민으로 시작돼 서러움이 포개지고 끝내는 공황 혹은 그와 유사한 심리적 불안감으로 마무리되는 이런 증세는 꼭 어린아이들만은 대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던 날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계약직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울기만 했던 적도 있다.

인생공부 시켜준 우리 손주, 그동안 고마웠다

내가 손자를 끼고 살다시피 하는 바람에 좀체 얼굴을 보기 힘들다며, 얼마 전 동네 아는 또래 한 분이 "아니 그렇게도 좋습니까"라고 반쯤은 놀리고, 반쯤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어온 적이 있었다. 내가 해준 대답은 '미친 사랑'이라는 거였는데, 아마 그분은 내 말의 속뜻을 십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내 혈육이라는 이유로 손자에 미쳐 있는 건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내 마음이 평소 깊은 탓에 손자며 버려진 젖먹이들, 유기됐다 입양되는 아동들을 평온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할 때가 왕왕 생기는 것이다.

난 전생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한데 유독 버려진 영유아들을 떠올리면 이내 서러움 같은 게 밀려오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전생에 버려진 젖먹이였다가 다시 태어났나 하는 생각마저 드는 건 이런 연유에서다. 나의 '아픔'을 나 스스로 좋게 해석하자면, 생명 혹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수성이 좀 유별난 탓이 아닌가도 한다.

혈변으로 인해 아연 식구들을 긴장케 했던 손자가 나의 시골집으로 내려온 뒤 일주일쯤 지났던 시점이었을까? 녀석의 배변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크게 방긋 웃음을 보인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손자님"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제 새끼라고 해서 60살 가까이 차이 나는 손자를 '님'자까지 붙여가며 부를 만큼 난 비위가 대단한 사람은 못 된다. 또 과잉으로 자식이나 손자를 떠받들어 그들의 인성을 망쳐 놓을 정도로 지각이 없는 부류도 아니다.

그럼에도 왜 나도 모르게 손자님이라고 '닭살' 돋는 말을 자동적으로 뱉어내고 말았을까? 손자님이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온 건, 아마도 '생명님' '하느님' '조물주님' 뭐 이런 맥락에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이의 고하를 기준으로 한 경칭이 아니라, 무릇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듯 나의 무의식이 손자를 존귀한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해서 그랬을 것 같다.

지난 9일 손자는 딱 두 달을 채우고 서울의 제집으로 돌아갔다. 딸이며 사위, 다른 식구들 또 동네 몇몇 친구들은 내가 손자를 떠나보내며 펑펑 울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눈물은커녕 눈가에 물기도 비치지 않았다. 울음을 억지로 참은 게 아니라, 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손자와 함께한 지난 두 달은 충만의 시간이었다. 뜻하지 않게 참으로 많은 걸 배웠다. 손자는 제 아빠의 외국 취업으로 인해 머잖아 바다를 건너가게 될 것이다. 손자와 함께한 가을 끝자락에서 겨울 초입까지가 그저 꿈만 같다. 그간 인생 공부를 시켜 준 젖먹이 손자가 고맙다. 손자와 맺은 인연 그 자체에 감사할 따름이다. 언제가 될지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서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빈다.

덧붙이는 글 |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립니다.



태그:#손자,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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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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