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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살려고 나는 게 몸살'이라고 어딘가에서 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몸은 정기적으로 살려고 발악을 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몸살약과 피로회복제를 아무리 먹어도 회복되지 않았던 건 효능의 문제라기보단 패턴의 문제였다. 일하고 스트레스 받고 자고. 그 사이사이에 있어야 할 휴식과 밥은 너무나도 간헐적이었다.

예민한 성격 탓에 일이 있으면 밥을 못 먹었다. 일이 끝나야 뭘 겨우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는데, 일이 안 끝났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두통약은 내 생활필수품. 나는 실비보험의 최대 수혜자였다.

신도림역에서 강남역까지 12개역, 지하철 앱이 계산해 준 소요시간은 30분이었지만 그건 오직 지하철이 움직이는 시간뿐, 출퇴근 시간이라는 변수와 지하철역까지 가는 시간까지 더하면 1시간 20분이 걸렸다.

매일 2시간 40분을 소진하고 탈진했다. 심지어 퇴근 시간 강남역은 전철을 두세 번 정도 보내야 겨우 출입문 근처에 '설' 수 있었다. 지하철을 지상에서부터 기다려야 했다. 업무를 시작도 안 했는데, 몸은 출근과 동시에 퇴근 상태가 되었다. 일도 문제였지만, 일터까지 잘 도착하는 것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는 업무의 시작이었다.

회사생활 10년, 밑 빠진 독에 일 붓기

'월급에는 스트레스 비용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억대 연봉자. 상여금에 특별보너스까지 계속 받아야 한다.
 '월급에는 스트레스 비용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억대 연봉자. 상여금에 특별보너스까지 계속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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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에는 스트레스 비용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억대 연봉자. 상여금에 특별보너스까지 계속 받아야 한다. 일종의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있었던 나는 거절도 부탁도 못했다.

주말 당직근무를 자연스레 넘겼던 선배. 아이가 아파서, 남편이 아파서, 시부모님이 아파서, 그 수많은 인물들이 아프다는 이유 앞에서 결혼도 아이도 없던 나는 나 혼자만 아팠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이건 너가 잘 하니까."
"이거 되게 간단한 일이야."

내가 잘하는 일은 선배는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간단하다는 일은 야근에 당직까지 하게 만들었지만 후배라는 이유로 거절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업무는 쌓여갔고, 피로는 넘쳤다. 아프면 티를 내야 했는데, 안 아픈 척을 하다 천하에 슈퍼우먼이 됐고, 그 슈퍼우먼은 아프지 않았는데 종종 쓰러졌다.

"아니요. 괜찮아요."

직장생활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내뱉었던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은 나쁜 거라 배웠는데, 회사에선 뱉을수록 칭찬과 부탁으로 돌아왔다. 내 얼굴에 침 뱉기. 아니 내 얼굴에 업무 뱉기. 너무 많이 뱉었다.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OO씨는 일을 참 잘해."

내가 잘했다기보단 그대들이 못한 거였다. 아니 정확하게. 안 한 거였다. 정규직은 연차가 쌓이고 연봉이 높을수록 일을 안 했다. 쌓일 시간도 돈도 없었던 비정규직은 일만 했다. 밑 빠진 독에 일 붓기였다.

"피곤해. 피곤해." 자면서도 내뱉었다. 그렇게 청춘과 노동을 팔아 월급을 받으며 열심히 회사를 다녔지만, 남은 건 축난 몸뿐이었다. 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약을 사먹고 다시 일을 했다. 이상한 순환이었다. 어김없이 월급을 받아 약국에서 카드를 긁을 때면, '약 사먹으려고 일했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두 10년이라는 직장생활 동안 반복된 일이었다. 더 이상 반복할 체력과 재간이 나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 두어야'만' 했다. 끊임없이 그 반복을 끊고 싶었지만, 회사를 끊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직장이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이직을 해도 반복됐기에 다 이렇지 않지도 않았다.

이력서를 쓰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약사도 알았을까? 약은 미봉책이지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약사도 알았을까? 약은 미봉책이지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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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타는 약사의 말 한마디였다.

"피로회복제 주세요."
"아휴 또 오셨네. 그렇게 많이 피곤하시면, 약 드시지 말고 그냥 쉬시고 푹 주무세요."

약사가 약을 안 팔았다. 약 달라는데 약을 안 줬다. 약사도 알았을까? 약은 미봉책이지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직책도 임시직이었는데 약까지 임시처방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 허술했다. 처음으로 월급으로 약을 안 샀다. 아니 못 샀다. 약보다 해결책이 필요했고,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퇴근이 아닌 퇴사를 하고 결심했다.

'다신 돈 벌어서 약 안 사먹어야지. 맛있는 거 사먹고 건강해져야지.'

통상적 출퇴근 시간은 9시-6시였지만, 일상적 출퇴근 시간은 8시-10시였던,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업무를 반복했던 직장생활. 꼬박꼬박 월급을 받았지만 더 꼬박꼬박 약도 받았고 스트레스도 받았던 회사생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고 아등바등 유지하고 버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돈이었다.

아무리 다른 윤색된 이유를 생각해 봐도, 짧고 굵은 명쾌한 답이었다. 돈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기에 직장생활을 했지만 결국 그 돈을 몸에, 그것도 아픈 몸에 가장 많이 쓰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감수할 수 없으니 포기해야했다. 연애라면 헤어졌겠지만, 일이었으니 그만둬야 했다.

퇴사를 하고 지금은 자발적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일을 줄였고, 약 사먹을 일도 거의 없어졌다. 일과 일 사이에 휴식과 밥이 생겼고, 일이 끝나니 밥을 먹게 되었다. 당연히 월급을 받아 약을 사먹는 일도 없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속해 있는 직장이 없으니 월급도 없어졌고, 대신 일이 줄어든 만큼 휴식이 늘었으니 피로가 회복될 시간을 확보한 셈이다. 피로는 약이 아닌 시간으로 풀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이 줄어든 만큼 돈도 따라 줄었기에, 가끔 예전의 이상한 순환을 망각하고 그 돈이 다시 궁해질 때면 나도 모르게 구직 사이트를 접속해 보기도 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예전에 약국에서 약을 못 사고 나왔던 그 날이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다신 돈 벌어서 약 안 사먹어야지. 맛있는 거 사먹고 건강해져야지.'

돈의 액수와 업무의 강도, 스트레스의 양은 비례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으니, 이제 선택은 나의 몫. 돈이냐 몸이냐. 나는 이제 나의 몸을 축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인간이고 망각하지만, 되풀이하지는 말아야지 다짐한다. 그래서 오늘도 망각하고 이력서를 쓰려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컴퓨터를 끈다. 내 몸은 피로에선 회복됐지만 그렇다고 다시 과거를 반복할 맘은 없다. 대신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로 하며 한 번 더 외워 본다.

'다신 돈 벌어서 약 안 사먹어야지. 맛있는 거 사먹고 건강해져야지.'

주문을 외운다.


태그:#회사생활, #직장생활, #야근, #퇴사, #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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