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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택 문학세미나. 왼쪽부터 김성민동시인, 김제곤평론가, 정유경시인,김재복평론가, 박숙경평론가,김미경어린이도서연구회회원
▲ 임길택문학세미나 임길택 문학세미나. 왼쪽부터 김성민동시인, 김제곤평론가, 정유경시인,김재복평론가, 박숙경평론가,김미경어린이도서연구회회원
ⓒ 김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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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청소년작가연대, (사)한국작가회의 어린이청소년분과, 글과 그림, (사)어린이도서연구회, 월간 어린이와 문학, 동시마중, 웹진 동시 빵가게, 어린이문화연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임길택문학제'가 오는 8일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사북초등학교에서 열린다. 

임길택은 강원도 탄광마을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탄광마을 아이들'을 비롯해 탄광마을에서 살아가는 광부와 아이들 이야기를 수많은 시와 동화로 썼다.

평범한 교사로 살아가던 임길택에게 1980년 4월에 일어난 사북사태(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단초가 된 사건이다)는 작가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광부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폭력진압에 꺾이는 모습을 보고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임길택은 담임을 맡고 있던 아이들 앞에서 회초리를 꺾어버리며, "이제는 너희들을 절대 체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학생이었던 한 제자는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 갑자기 변하니까 너무 놀랐다'고 회고했다. 1980년 학교는 회초리로 질서를 잡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던 시절이다. 체벌을 안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체벌이나 공부 숙제를 대신해 아이들에게 시를 쓰자고 했다. 제목을 정해주기도 하였고, 다듬어주기도 하면서 아이들 삶을 시로 승화시켰다. 쓴 시를 모아서 문집으로 엮었다. 철펜으로 일일이 옮겨 써서 등사기로 직접 밀었다. 300부 넘게 찍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전국에 있는 선생님들과도 나누었다.

부인 채진숙 여사는, '그 당시 사북에는 인쇄소도 없었고, 학생이 3천 명도 넘는 학교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등사실을 이용하는 것도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며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그 모든 일을 직접 했다고 회고했다.

<나도 광부가 되겠지>, <우리들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문집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딱지 따먹기'는 1980년 담임을 맡았던 반 아이, 강원식이 쓴 것으로 노래로도 널리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군부정권은 임길택을 사상이 불온한 교사로 몰았고, 아이들과 시 쓰기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글쓰기연구회에서 임길택과 글쓰기 운동을 함께 했던 이주영 평론가는, '아이들과 시 쓰기가 중단되면서 스스로 시와 동화를 쓰기 시작한 것'이라며 먼저 떠난 벗을 그리워했다.
 

올해는 임길택이 마흔여섯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20년이 되는 해다. 임길택 문학제는 20주기를 맞아 많은 후배와 동료들이 삶을 기리고 우리 문학 유산으로 든든히 물려받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그때 제자들이 자기가 쓴 시를 직접 낭독하고, 사북초등학교 아이들과 어린이책 작가들이 임길택 시와 동화로 공연도 마련한다.

앞서 1일 오후 6시에는 서울시의회 별관 대회의실에서 임길택 문학 세미나가 열렸다. '임길택 동시와 생명 감수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정유경 동시인은, '여린 사람이면서도 더 여린 생명을 살피고 보듬으려 했던 시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임길택 동화의 시대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김재복 평론가는, '교사로서 뿐만 아니라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작가로 더 매력적'이라며 임길택은 그 자체로 역사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꼴찌도 상이 많아야 한다 - 임길택 선생님이 가르친 산골 마을 어린이 시

임길택 엮음, 정지윤 그림, 보리(2006)


태그:#아동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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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화도 쓰고, 시, 동시도 쓰고, 역사책도 씁니다. 낮고, 작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 곁에 서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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