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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지인과 미술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직까지 미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모른다는 지인에게 미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냥 보는 대로 느끼면 되고 형이상학적인 작품이 아닌 이상 난해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진에 자리한 아미 미술관에서는 연중 다양한 전시전을 열고 있는데 지난 11월 1일부터 2018년 3월 30일까지 '창조하는 자, 공감하는 자'라는 주제로 전시전을 열고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미술관
▲ 아미미술관 미술관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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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 미술관에 심어져 있는 나무에서는 대부분의 낙엽이 떨어져서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연상케 한다. 살아갈 기력을 잃은 채, 차가운 가을바람에 시달리다가  5개밖에 남지 않은 담쟁이덩굴의 잎이 다 떨어질 때 자기 생명도 끝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를 위해 걸작의 꿈을 이루지 못했던 베어먼 노인은  벽을 캔버스 삼아 그린 최고 걸작인 마지막 잎새를 그린다. 아미 미술관의 벽을 둘러싸고 있는 녹색은 미술관의 콘셉트와 잘 어울려 보인다. 

내부복도
▲ 미술관내부 내부복도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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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 미술관에는 화려한 예술의 꽃밭의 뒤쪽에서 항상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고 하는 강인한 사람들의 흔적이 이어지고 있다. 아미미술관은 예술가촌이며 예술의 전변과 예술의 미래를 지탱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창조하는 자를 예술가라고 한다면 공감하는 자는 아마도 이곳을 찾은 관람객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자기 일외에 관심이 없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의 일이 다른 것들과 만나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가질수록 인생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인생이 있다고 가정해보면 보통은 사회 속 한 인생이다. 그리고 그 인생은 어딘가로 향한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공연장
▲ 공연장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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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예술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통채로 바뀔 수 있다. 인생은 단조롭지 않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열려 있고 넉넉하며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방법을 배워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사회에서 고립된 타자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했다고 한다. 문명은 우리를 고립시켜 왔으며 현대 사회는 고립된 한 명 한 명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파트
▲ 아파트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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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문명은 고도로 발달해 왔지만 그속에서 인간을 제대로 직면해보려는 사람이 없다. 복잡한 사회구조상에서 우리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만 오히려 그 편리함이 인간을 가리고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사전에 정보가 없이 보더라도 직접적인 방법으로 현대인들의 고립감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사진상의 인물들은 무척이나 작다. 마치 숨은 그림찾기에서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노력을 들여야 인간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푸른공간
▲ 푸른공간 푸른공간
ⓒ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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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내몰려 무한경쟁 속에서 인간들을 살아간다. 그리고 직장을 가지고 나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분하여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경쟁에서 낙오된 인간들은 가치가 없어지고 그냥 소외된 존재로 어딘가에 남겨지게 된다. 우리는 소외된 존재를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없다.

이 작품이 있는 공간은 푸른색으로 가득 차 있다. 푸른색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물이나 청명한 가을 하늘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치 자궁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양수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아마도 작가는 삶에 지쳐 휴식이 절실한 순간 온전히 자신의 방에 머무르며 심신의 안정을 찾는 공간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과 비현실 혹은 환상의 경계에서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욕망을 꿈꾸어 본다.

작품
▲ 목조작품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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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그냥 버려진 것 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 같은 나무 소재의 이 작품에는 소박함이 있다. 조각이기도 하면서 회화가 있는 이 작품에는 친근하면서도 시각적으로 편안하다. 인간은 왜 마음이 불안할 때 혹은 호르몬이 급작스럽게 변할 때 과자를 찾고 일상의 소소함을 바꾸려는 시도를 할까. 디테일한 목조 조각 작품들을 보통 많이 보게 되지만 이 작품들은 그냥 대충 쳐낸 듯 거칠고 그 형태만 겨우 알 수 있도록 러프하게 만들었다. 조각과 회화를 통해 만든 작품들은 설치미술로 공간이 필요하다. 아날로그의 느낌이 풍만한 나무를 통해 여전히 나무라는 식물의 존재가 우리 곁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작품
▲ 사진작품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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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걸린 사진들은 모두 혼자 있는 모습을 찍었다. 정면을 응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언가 생각하면서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몽환적으로 때로는 감상에 젖어 멍하게 무언가를 바라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있다. 웃는 얼굴은 없다. 사진 속의 피사체는 대부분 여자다. 사진 속 숨은 의미 등 사진 감상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 필요는 없지만 사진 앞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하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몽환
▲ 몽환적인 여성 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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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성은 눈가의 색조화장이 눈에 뜨인다. 자유를 얻은 것 같으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그녀의 얼굴과 목선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원래 문신과 화장은 악령이 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구멍(입이나 눈)을 지키기 위해 탄생했지만 16세기 이후에는 이미 주술성을 잃어버리고 여성성을 부각하기 위한 무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극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재료에는 유해한 경우가 많았다. 연백이나 수은은 오랜 기간 여성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대표적인 재료로 가짓과의 식물에서 추출한 액체인 벨라도나를 희석해 눈에 떨어뜨리면 눈동자가 촉촉해지고 커지는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오늘날 컬러렌즈가 대신하고 있다. 벨라도나는 강한 독성을 지난 탓에 오늘날 녹내장 치료 등에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
▲ 사진찍은 사람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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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창문 그리고 여인들의 사진이 있는 곳에 있는 이곳은 사진 찍기에도 좋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빛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음의 영역에 있는 사진으로 눈이 옮겨 간다. 문득 생각해보니 이 방에 있는 모든 주제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걸려 있는 사진 속의 사람도 여자다. 카스틸리오네는 '궁정인' 제3권에서 "여성은 육체는 약하지만 지성이 뛰어나 남성 이상으로 사색에 적합한 능력을 가졌다."라고 기술했다.

미술관
▲ 아미미술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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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너무 빨리 바뀌고 짧은 시간에 시선을 끌어야 하는 세상에서도 '예술'의 가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분명해질 것이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자는 곡을 쓰건 그림을 그리던 글을 쓰건 간에 순간에 상상했던 세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존재의 의미를 최대한 표현해내는 것이 예술가들의 일이다. 그러고 나서 그것에 공감하는 것은 온전히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아미 미술관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남부로 753-4
창조하는 자, 공감하는 자
2017.11.1 ~ 2018.3.30


태그:#아미미술관, #창조하는자, #공감하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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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쓰는 남자입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하며, 역사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열심이 사는 사람입니다. 소설 사형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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